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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콜로지카

feat. 살아남기

에코페미니즘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 그리고 책이 '살아남기'로 정해졌을 때까진 내가 이책을 다시 펴보게 될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몇 권 남지 않았던 중고 서적을 운 좋게 '득템' 하고, 우여곡절 끝에 책을 받은 후 표지에 써 있는 '여성' '생태학' '개발'이란 단어와 마주하고 나서야 불현듯 이책이 떠올랐다. 사르트르가 '유럽에서 가장 날카로운 지성'이라고 평가했던 앙드레 고르의 역작 '에콜로지카'가 바로 그책이다.


앙드레 고르에 대해 얘기하려면, 먼저 그의 아내 도린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언론인이자 학자였고 '녹색 정치의 창시자'로도 불렸던 앙드레 고르는 자신의 로망이었던 파리에서의 삶을 모두 접고 낙향한다. 아내 도린이 의료 사고로 불치병을 얻게 됐기 때문이다. 도린을 간병하기 위해 모든 사회활동을 접고 시골에 집을 얻은 고르는 언제 생명이 꺼져도 이상할 게 없던 아내를 20년 넘게 간병한다. 마침내 마지막 순간. 비극이라면 비극이고 희극이라면 희극인 그날 이후 앙드레 고르가 아내에게 썼던 마지막 편지가 책으로 출간된다. 잠시 옆길로 새는 감이 다소 있지만, 너무 좋아했던 책이고 좋아했던 문장이라 내친 김에 이책의 서문만 소개해본다.


"당신은 곧 여든두 살이 됩니다. 키는 예전보다 6cm나 줄었고 몸무게는 겨우 45kg입니다.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탐스럽고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함께 살아온 지 쉰여덟 해가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앙드레 고르, 'D에게 보낸 편지')


고르는 스스로 'D에게 쓰는 편지'에서 고백했듯이 자신의 사상, 철학적 기반의 확립에 아내 도린의 영향이 절대적이었음을 여러 차례 밝혔다. 에코페미니즘이란 건 단순한 생태주의 혹은 생태철학과는 결이 조금 다른 개념이겠지만, 그럼에도 반다나 시바가 하고 싶었던 얘기와 앙드레 고르가 주장했던 생태학은 무늬가 꽤 닮았다고 느껴졌다. 이제부터는 정치적 생태학의 정수라고 불리는 '에콜로지카'를 인용하며 반다나 시바의 이야기를 확장해보고자 한다.


"경제활동 운용을 결정하는 소비 예측은 늘 다음과 같은 과정 위에 세워진다. 심층적 사회변혁은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생산방식과 소비방식, 삶의 방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늘 가난뱅이가 있으면 부자가 있고, 복종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명령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줄 서서 기다려야 하는 전철이 있는가 하면 반도 안 찬 채 비행하는 콩코르드가 있을 것이다. (중략)


깨져서 수리 불가능한 도구, 노동재해를 입은 사람들과 교통사고 피해자들이 필요로 한 보철구 및 의료 서비스 등으로 인한 생산증가 등 그 모든 생산과 구매의 증가는 국가적 부의 증가로 잡힌다. 파괴는 이리하여 부의 원천으로 나타나는데, 부서지고 폐기되고 내다버린 모든 것은 대체되어야 하고, 따라서 생산과 상품 판매, 화폐 유통, 이윤을 불러올 것이기 때문이다. 물건들이 깨지고 닳고 구식이 되고 폐기되는 속도가 빠를수록 국민총생산은 증대할 것이고, 국가회계 상으로는 우리가 부유한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심지어 신체적 상해와 질병도 약과 의료서비스 소비를 증가시키는 한 부의 원천으로 잡힐 것이다.

그런데 그 반대의 일이 발생한다고 하자. 신체 건강하여 의료비용이 나가지 않고 우리가 구매한 물건들이 근 반평생 쓸 수 있고, 구식으로 전락하지도 않으며, 낡지도 않고, 수리도 되고, 심지어 쉽게 다른 것으로 전환된다고 해보자. 그러면 국민총생산은 물론 내려갈 것이다. 우리가 노동을 덜 하고, 소비를 덜 하고, 필요도 덜 갖게 되기 때문이다. 낭비의 최대추구에 기반을 둔 경제시스템을 낭비의 최소추구에 기반을 둔 경제시스템으로 어떻게 대체할 것인가?"(앙드레 고르, '에콜로지카')


앙드레 고르의 문제 의식은 시바의 문제 의식과 닮았다. 서문부터 '악개발'이란 단어가 등장하고, 초장부터 '아는 것이 힘'이라고 설파했던 프랜시스 베이컨을 호되게 비판하면서 책의 대문을 연 시바의 사상이 너무 급진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고르 역시 이에 못지 않았다. 적어도 시바의 텍스트가 평소 한 번쯤은 생각해봤던 내용이었다면 고르의 자동차 비판을 처음 접했을 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2007년에 쓰인 '에콜로지카'에선 자동차를 아예 하나의 챕터로 나눠 따로 다룬다.


"자동차의 깊은 해악은 그것이 마치 성이나 남프랑스 리비에라 해안의 별장 같다는 것이다. 즉 아주 부유한 소수만의 배타적인 쾌락을 위해 발명된 사치품이며, 그 개념이나 본질에 있어서 전혀 보통사람(민중)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나 갖고 있어도 사용가치가 그대로 유지되는 진공청소기나 라디오나 자전거와 달리, 자동차는 해안의 별장처럼 대중이 그것을 갖지 못해야만 이익과 이점을 지닌다. 왜냐하면 그 개념이나 애초에 대상으로 삼은 계층으로 볼 때 자동차는 사치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치란 본질상 민주화되진 않는다."(앙드레 고르, '에콜로지카')


자동차가 사치품이라니, 이런 글을 처음 읽고 단번에 수긍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글은 2007년에 쓰였다. 1907년이 아니라. 고르는 주장을 이어간다.


"그 어떤 대중선동가도 지금까지 '휴가를 누릴 권리를 민주화하는 것은 프랑스인 한 가족 당 사유 해변이 딸린 별장 한 채라는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다'라는 주장은 감히 한 적이 없다. 1,300~1,400만 가정이 각각 해변의 10미터라도 자기 것으로 가지려면, 집집마다 그렇게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해변의 길이가 14만 킬로미터는 되어야 한다! 만약 각자에게 자기 몫의 해변을 나눠 준다면, 해변을 아주 작은 띠처럼 토막토막 끊어서, 아니면 별장을 다닥다닥 붙게 촘촘하게 지어서 그 땅이나 집의 사용가치가 제로가 되어버리고 호텔 단지에 비해 나을 것이 하나 없게 되어버린다는 얘기다. 요컨대 해변 사용의 민주화에는 단 하나의 해법밖에 없다. 집단으로 사용하는 해법이다. 그리고 이 해법은 반드시 사유 해변이라는 사치(극소수 층이 모든 이를 희생시키며 누리는 특권)와 대적하는 전쟁을 거치게 된다.

그런데 해변의 경우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을 왜 운송수단의 경우에는 누구나 받아들이지 못할까? 자동차도 해변 딸린 별장이나 마찬가지로 '희귀한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가? 자동차는 다른 도로이용자들(보행자, 자전거 타는 사람, 전차나 버스 탑승자)의 권리를 빼앗는 건 아닌가? 모든 사람이 자기 차를 타게 되면 자동차는 사용가치를 다 잃어버리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각 가정마다 적어도 차 한 대는 굴릴 권리가 있으며 각자가 도심에서 자기 편할 대로 주차하고 운전하고 주말이나 휴가 때면 시속 150킬로미터로 동시에 출발할 수 있게 하는 게 '나라'가 해야 할 일이라고 주장하는 군중선동가들이 넘쳐난다. (중략)


사람들은 자동차라면 좋다고 몰려들었다. 그 결과 도시에서의 운행속도가 그곳이 보스턴이든 파리든 로마든 런던이든 말이 끄는 합승마차 속도 이하로 떨어지며, 주말에 뒷길로 빠지는 도로들로 운행하는 차량의 평균속도가 자전거 속도 이하로 떨어지게 된다. 방사형 도로들과 순환도로, 고가도로를 늘리고 톨게이트와 16개의 나들목을 갖춘 도로를 늘린다 해도 결과는 언제나 똑같다. 도시 교통체증 상황은 더욱 더 마비된다. (중략)


자동차가 대세여야만 한다면, 단 한가지 해법밖에 안 남는다. 그것은 도시들을 없애는 것이다. 즉, 도시들을 수백 킬로미터 간격으로, 고속도로를 죽 따라가면서 교외 신도시들로 띄엄띄엄 배치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바로 그렇게 했다. 이반 일리히는 그 결과를 충격적인 숫자를 동원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앙드레 고르, '에콜로지카')


"전형적인 미국사람이라면 일 년에 1,500시간 이상(주당 30시간, 하루에 네 시간)을 차에 할애한다. 그러니까 미국인은 (일 년에) 10,000킬로미터를 달리는 데 1,500시간이 필요하다. 6킬로미터에 한 시간이 드는 셈이다. 운송산업이 전무한 나라의 사람들이 걸어다닐 때 걸음 속도가 정확히 이와 같은데, 게다가 그들은 어디든 갈 수 있고 아스팔트 포장한 도로가 아니라도 다 갈 수 있다는 이점까지 갖는다."(이반 일리히, '에너지와 형평')


"오전 8시부터 9시 30분까지, 저녁 5시 30분부터 7시까지, 주말에는 5~6시간 동안, 도피의 수단은 길게 줄을 지어 앞뒤차의 범퍼가 닿도록 늘어서며, 속도는 (아무리 빨라야) 자전거 탄 사람의 속도인데다 휘발유가 가스 되어 내뿜는 커다란 구름 속에서 운전한다. 자동차의 장점 중에 무엇이 남았는가? (중략)

더 나쁜 것은 이것이다. 주인이 가고 싶은 곳을 마음 내킬 때, 원하는 속도로 갈 수 있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동차가, 모든 교통기관 중에 가장 노예적이고 임의적이고 예측할 수 없고 불편한 것이 되어버린다. 어디 갈 때 출발시간을 한 시간이나 여유 있게 앞당겨 잡아도 소용이 없다. 교통체증 때문에 언제 도착할지를 결코 알 수 없으니까."(앙드레 고르, '에콜로지카')


앙드레 고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이전에도 이후에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 같은 생각들이다. 반다나 시바의 이번 책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번 시즌의, 그리고 2019년의 마지막 책으로 시바와 만났다. 많은 사람들이 책을 접하기 전에는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을 많은 것들이 이책에서 재조명된다.


반다나 시바의 '살아남기'를 읽으면서 많은 책과 텍스트들이 떠올랐다. 몇 가지만 공유해본다.


  

'시애틀 추장의 편지'


피터 크로포트킨, '만물은 서로 돕는다'


장 지글러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P.S. 부득이하게 이번 시즌 마지막 모임에 참가하지 못하게 된 상태로 독후감을 쓰는 일은 괴롭고 아쉬운 일이었습니다. 모임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없기 때문에 함께 생각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주제를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Q. 반다나 시바의 주장이 현실에서 발현되려면 지배구조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을 바꾸는 것 외에 별 다른 묘안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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