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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 九단과의 첫 대결

feat. 가보로 남길 뻔 했던 기보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바둑인은 죽어서 '기보'를 남긴다…는 말은 물론 없다. 하지만 내겐 가보로 남길 뻔 했던 기보가 존재한다.


요즘엔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인간이 컴퓨터와 바둑을 두면 지는 시대가 도래해버렸는데(지금 생각하면 너무 우습지만, 생전에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고 생각하던 게 불과 4년 전이다), 예전엔 '명국'을 남기겠다는 게 프로기사들의 공통적인 목표였다.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기보를 남길 수 있다면 바둑 인생의 큰 목표를 달성한 것이라는 분위기가 있었고, 승패와 관계 없이 좋은 기보를 남기겠다는 일념으로 최선을 다해 바둑을 두던 시절이었다.


때는 바야흐로 2007년. 이세돌이 세계대회 4관왕에 올라(국내에선 적수가 없었던 지 오래)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의 기사로 자타의 공인을 받고 있을 때였다. 당시 이세돌 9단의 친형(프로기사 이상훈 9단)이 운영하던 바둑도장에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도장 간판이 바뀌었다. '이상훈 바둑도장'에서 '이세돌 바둑도장'으로. 바둑으로는 전 세계 어디에도 적수가 없던 일인자 이세돌이 본격적으로 후학을 양성하고 싶다고 선언한 게 2007년이었고, 아무리 이세돌이라도 이미 도장 체제가 굳건한 한국바둑계에서 '맨땅에 헤딩'하는 건 리스크가 좀 있으니 본인이 운영하던 바둑도장을 통째로 동생에게 넘겨준 것이었다.


나이 제한에 걸려 연구생 마지막 해를 보내고 있었던 나는 당시 도장에서 서열이 가장 높은 그룹에 속했다. 스파링을 위해 도장에서 섭외한 프로기사 분들과는 호선에도 이겼다 졌다 하는 사이였고, 연구생 1군이었으므로 당시 지도 사범이었던 이상훈 9단을 비롯한 모든 프로기사와 호선에 둘 때이기도 했다.


이윽고, 이세돌이 도장에 왔다. 매일매일 이세돌의 기보를 놓아보며 바둑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세계 최강자 이세돌이 눈 앞에 나타나다니. 도장 선후배들은 모두 나처럼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이세돌을 한 번 보고 바둑판을 한 번 보고 있었다.


당시 도장 서열은 3위였는데, 1위를 하고 있던 형과 2위였던 동갑내기 친구가 첫 날 대국할 기회를 잡았다. 먼저 1위였던 형은, 이상훈 9단의 조율 아래 '정선' 치수로 대국했다. 호선이란 먼저 두는 쪽(흑)이 유리한 정도를 계산해 6.5집('여섯집반'이라고 부르며, 일곱집을 이겨야 '흑반집승'이 된다)을 '공제' 하고 대국하는 보편적인 승부 바둑의 룰이다. 반면 정선은 먼저 두었음에도 공제를 하지 않는 방식으로, 수치로 따지면 6.5집의 핸디캡이 있는 대국 방식이었다.


그동안 프로기사들과 호선에 숱한 대국을 했던 우리들이었지만, 아무리 정선으로 치수를 접혔다 해도 이세돌을 이긴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바둑황제' 조훈현 시절엔 '도전 5강'으로 불렸던 2인자 그룹들이 '치수고치기'를 벌인 끝에 '2점'에도 진 역사가 있기 때문이었다. 같은 프로기사, 그것도 타이틀도 따낸 적이 있는 강자들조차 당대의 최강자에겐 두 점을 깔고 대국해도 패하는 판국에 아직 프로기사도 아닌 연구생 신분의 우리들이 세계 최강 이세돌에게 정선에 이기는 건 상식적으로 거의 불가능했다.


첫 판을 둔 1위 형은 본인의 기풍대로 침착하고 유연하게 판을 짜나갔지만 이세돌의 따끔따끔한 잽을 쉴 새 없이 얻어맞다가 어느 순간 가랑비에 옷 젖듯이 역전을 허용했다. 2위였던 친구는, 본인의 장기인 난전으로 유도해 정신 없이 백병전을 벌이는 무모한 전략을 펼치다 '전투 13단' 이세돌의 핵펀치에 KO 당하고 말았다. 예상대로였다.


그날 두 판을 둬주고 간 이세돌은 며칠 후 도장에 다시 왔다. 이번엔 내 차례였다.


그 바둑은 지금도 기보로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12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머릿 속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연구생리그전의 제한시간은 1시간, 프로기전은 통상 3시간이던 시절이었는데 도장에서 두는 대국은 30분으로 줄여서 두던 분위기였다. 이세돌과의 첫 대국 역시 제한시간 30분으로 시작됐다. 생각할 시간은 많지 않았지만 스스로를 믿고 빠른 결단을 내리기로 했다.


첫 번째 접전은 좌하귀에서 발발했다. 이세돌 9단이 내 진영에 침공을 한 것이었는데, 공격보다 타개가 이세돌의 장기였던 만큼 돌을 잡는 건 어려웠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선 치중 후 행마'라고 불리는 바둑의 행마법을 떠올릴 수 있었던 건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다. 국후 이세돌은 순간적으로 그수를 놓쳤음을 고백했는데, 쳐들어온 상대의 돌을 살려주는 것을 전제로 한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1차 대전을 두터운 외세를 쌓으며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나는 자신감이 붙었다. '해볼만 하다'는 생각이 든 것도 큰 수확이었지만 좌변 일대에 철벽을 쌓아놨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반면운영이 편했다.


두터움을 바탕으로 이세돌의 돌들을 오히려 압박해갔다. 이 바둑이 승부 대국이었다면 국면의 양상이 달라질 선택의 기로가 몇 차례 있었지만, 엄연한 지도기였다. 이세돌 9단은 아마 '요 녀석이 언제까지 이렇게 잘 두는지 한 번 보자' 하는 심정이었던 것 같다(통상 지도기에선 프로기사들이 실력의 전부를 발휘하며 승부를 걸지 않는다. 무난하게, 정수대로 응수하며 지도를 받는 쪽의 기량 및 바둑 스타일, 장단점 등을 파악해 복기 지도하는 게 보통이다).


헌데 그날은 바둑이 점점 잘 풀렸다. 게다가 후반으로 갈수록 바둑도 내 스타일대로 짜였다. 개인적으로 초반보다 후반 마무리에 자신이 있는 편이기도 했고, 한 번 유리해진 바둑은 잘 역전당하지 않는 편이기도 했다(초반이 약해서 유리해질 일이 별로 없다는 게 문제지만).


바둑이 95% 정도 끝난 상황에서 형세는 흑의 반면 8~9집 우세였다. 호선바둑이었다고 치고, 덤을 6.5집 공제해도 한집반 내지는 두집반 정도 우세했다. 이 바둑은 정선이었으므로, 8~9집 차이는 끝내기에서 역전 당할 수치는 아니었다. 승리가 눈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역전 당할 가능성은, 사실상 제로에 가까웠다(고 당시엔 생각했다).


바로 그때였다. 엄청난 몰입 상태였던 나의 뇌가 갑자기 딴 생각을 하기 시작한 건. 그전까진 분명 바둑에 몰입해 전력을 다해 수읽기를 하던 나의 뇌는 '승리가 확실하다'고 생각하자마자 눈 앞에 바둑이 아니라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내게 계속 송출했다.


'일단 연구생 중에서 이세돌을 이긴 건 내가 최초네.'

'흠, 정선에 이세돌을 이길 수 있는 프로기사는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와 내가 정말 이세돌에게 (정선이지만) 이기는 건가?'

'이 바둑의 기보는 가보로 남겨 대대손손 물려줘야지'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바둑을 두고 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릴 만큼 집중력의 끈이 툭 하고 끊어져버렸다. 이세돌 9단 또한 세계대회 우승 직후 인터뷰에서 마지막에 약간 흔들렸던 부분을 언급하며 "사실 당시에 승리가 결정적이어서, 우승 후 인터뷰 때 뭐라고 말할지 고민하다가 순간적으로 실수를 했습니다"라고 말해 큰 웃음을 준 적이 있었는데 그 스승에 그 제자랄까.


다만 한가지가 크게 달랐다. 이세돌은 그럼에도 이겼지만 나는… 나는 패했다는 것.


이미 끝내기 단계에 이른 대국에서 역전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었다. 이세돌 9단은 돌연, '완생(미생의 반대말)' 상태였던 내 돌에 칼 끝을 겨눴는데, 그쪽은 이미 살아있는 형태로 진즉 수읽기 해뒀던 자리였다.


헌데 마지막 초읽기의 순간, 갑자기 의심마귀가 찾아왔다. 이세돌이 둔 수는 내 수읽기가 맞다면 분명 손해보는 수다. 정확하게 응수했을 경우 흑돌을 잡지 못하게 되므로, 집으로는 두집 가량 손해가 될 소지가 있었다. '혹시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그리고-


내가 놓은 그 다음 한 수는 지금까지도 그 모양이 떠오를 때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되는 최악의 한 수였다. 인터넷 대국이었다면 '마우스 미스'라고 의심 받았을 최악의 떡수였다. 그 수를 두기 전까진 애초 수읽기 했던 형태가 너무나 명료하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으나, 착점 직전 뭔가에 홀린 듯 흔들렸고, 그 수를 놓자마자 '아차, 실수를 했구나' 하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이세돌 9단의 눈빛이 달라지며 총 공세로 태도가 전환됐다. 이후 수순은 최선을 찾아내 결국 흑대마의 사활은 '패'에 걸리게 됐다. 서로 팻감이 많은 상황이라 즉각 판단이 되진 않았지만, 얼핏 내 팻감이 많아보였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아직 역전은 아니구나.


하지만 안도감을 만끽하던 것도 잠시, 그 이후부턴 이세돌이 왜 이세돌인지 알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대 악수가 등장했는데, 어차피 몇 집 손해보면서 보태주는 것보다 패를 이겨서 내 대마를 잡는 게 더 크다는 적확한 판단이었다. 바둑에서 금기시 되는 수법이라 순간적으로 떠올리지 못했는데, 당하고 나니 '빼박' 외길수순이었고, 마지막까지 패싸움을 이어가 보니 '팻감'이 딱 한 개 모자랐다.


마지막 팻감까지 모두 소진된 순간,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됐다(그렇다고 울지는 않았...). 이 기보를 가보로 남기려던 꿈은 물거품이 됐고, 김칫국을 사발채로 원샷한 후유증은 판 위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패배를 선언하는 손이 떨렸다. 너무 아쉬웠고 스스로를 용서하기가 어려웠다. 그때 들려오는 이세돌의 목소리.


"여기 뒀으면 던지려고 했는데."


애초에 수읽기 해뒀던 바로 그 자리를 이세돌 9단이 짚고 있었다.


돌을 모두 걷고 첫 수부터 복기를 시작했다. 바둑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가 이뤄졌지만, 마지막 순간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제외하곤 딱히 지적 받은 수는 없었다. 더욱 아쉽기도 했고 나름 뿌듯하기도 한 감정이 교차했다.


복기를 마치고 돌을 쓸어담으며 이세돌 9단이 말했다.


"다음엔 호선으로 두자."


1위 형과 2위 친구는 듣지 못했던 멘트이기도 했고, 졌음에도 불구하고 인정 받은 것 같아 기뻤다. 얼마 후 펼친 두 번째 대국은 돌을 가린 결과 백을 잡게 됐고 시종 혼전 양상이 펼쳐진 끝에 5집반을 졌다. 천하의 이세돌을 상대로 백을 잡고 대국한 것 또한 기념할 만한 일이어서, 이 기보 또한 현재까지 소장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내 인생의 첫 바둑 스승이었던 아버지는'복기'와 '기보'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강조하셨다. 덕분에 8년 간의 연구생 생활이 담긴 내 기보들은 한 판도 빠짐 없이 모두 보관돼 있고, 아버지는 내가 프로가 되면 이것들을 엮어 책으로 만들고 싶다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다(결국 마지막까지 소원을 이뤄드리지 못했지만).


아직도 예전에 내가 뒀던 바둑의 기보들을 놓아보면 그때 그 순간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내가 기억하고 싶은 기록들은, 고스란히 내 기보 속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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