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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삶

feat. 조치훈 9단 인터뷰

한국을 넘어 세계 바둑의 전설로 불리는 조치훈 9단을 오랜만에 인터뷰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는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명언을 들어보지 않은 영화 학도가 없듯이, "목숨을 걸고 둔다"는 조치훈의 어록을 모르는 바둑인은 없다. 하지만, 조치훈 9단은 더이상 바둑에 목숨을 걸고 있지 않았다.


전성기 시절, '폭파전문가'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으로 열도의 바둑계를 초토화시켰던 조치훈 9단은 타개의 귀재였다. 조 9단의 돌은 잡힐듯 잡힐듯 절대 잡히지 않았다. 그런 조치훈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용기가 있었으면 자살했을 거예요. 자살할 용기가 없어서 지금까지 살았어요."


백전노장의 회한어린 한마디는 잠시 기억 저편으로 밀려나 있었던 옛 경험, 그날들의 질감을 고스란히 재소환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겠지만, 나에게도 역시 죽음이라는 단어는 낯설지 않았다.


초등학생 시절 나의 전국랭킹은 열 손가락 안에 들었는데, 이따금 그 당시 바둑 잡지를 펼쳐 전국초등학생 랭킹을 보고 있노라면 나를 제외한 대다수가 프로기사가 되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 이런 운명을 예측했는지 어머니는 시종일관 내가 바둑을 전문적으로 하는 것에 반대했다. 반면 고등학교 3학년 때 은행에 취직해 성인이 되기 전부터 생업전선에 뛰어드셨던 아버지는 샐러리맨으로 살아가는 인생의 고달픔을 종종 언급했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갖는 건 굉장한 축복이란다."


아버지의 조언이 중학교 진학 문제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던 내겐 판단의 근거가 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만약 이때,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됐음에도 그걸 계속해서 좋아할 수 있는 재능은 별개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선택이 달라졌을까.


본격적으로 승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는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오늘은 좌절했다가 다음 날엔 희망을 보기도 했고, 누구든 다 이길 수 있을 것 같다가도 누구에게도 질 것 같은 기분들이 매일매일 교차했다. 이기는 게 당면과제가 된 순간부터 과정이 주는 즐거움이 점차 사라졌다. 내용이 아무리 훌륭해도 지면 끝이었다. 바둑이 점점 재미 없어지기 시작했다.


주말마다 열리는 연구생리그전을 마치고 집에 가면, 그날 내 성적에 따라 집안 공기가 달라진다. 2승을 거둔 날은 어머니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하이톤이 된다. 덩달아 나도 뭔가 의기양양해진다. 1승1패일 땐 여느 평일과 비슷. 그러나 2패를 하고 온 날은 뭔가 확연히 달랐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드러내놓고 나를 탓하진 않았지만 미묘하게 기류가 다르다는 것쯤은 알만한 나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식사를 하던 도중 아버지가 어머니께 사소한 일로 짜증을 냈다. 어머니는 "영재가 2패한 게 나 때문이야? 왜 나한테 화를 내" 하고 받아치셨다. 막연히 짐작하고 있는 것과 이렇게 현실이 된 상황을 지켜보는 것 사이엔 또 그 나름의 간극이 있었다. 아, 그렇구나. 내가 지면 안 되는 거구나. 나 때문에 부모님이 싸운 거구나. 바둑을 졌을 때보다 더 마음이 아팠다.


그날 이후 2패한 날엔 집까지 걸어왔다. 한국기원은 상왕십리역에, 집은 건대입구에 있어서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다. 지하철로 5정거장, 걸어서 1시간 남짓. 바둑을 지면 집에 가기 싫었다. 당시엔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라 문자로 성적을 미리 보고해둘 수도 없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머니는 의례, "오늘은 어떻게 됐니?" 하고 물어보실 테고, "졌어요"라는 대답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나는 내 방으로, 나만의 동굴로 숨을 수밖에 없겠지. 집까지 걸어가는 건 집에 최대한 늦게 도착하기 위한 방법이었던 동시에 바둑에 진 너는 지하철을 탈 자격조차 없다고 스스로를 벌주는 방법이기도 했다.


중학교 3학년, 10연승을 하며 3개 조를 연속으로 올라갔을 때가 마지막 리즈시절이었다.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와 대국한다면 과연 이길 수 있을까. 고등학생이 되고 바둑 실력이 더이상 늘지 않는 지경에 이른 다음부턴 모든 게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특히 프로를 선발하는 입단대회 최종 예선에서 패했던 날은, '죽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나는 무가치한 인간이라는 자괴감이 온몸을 조여왔다.


대학에 입학하고, 다른 세상도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직접 느끼고 체험하면서 바닥까지 추락했던 자존감을 조금씩 회복해나갔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게 됐다. 그러자 이번엔 진짜 죽음들이 찾아왔다.


맞선임의 죽음은 파란만장했던 내 군대시절의 정점을 찍는 사건이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녔던, 나보다 한 살 어렸던 맞선임의 부모님이 멀리 지방에서 부고를 듣고 올라오는 그 시간은 너무도 길었다. 긴긴 시간 동안 생소한 그러나 너무 현실적이어서 오히려 비현실처럼 느껴지는 그의 모습을 그저 바라보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다.


얼마 전엔 바둑계 최고의 글쟁이라 불렸던 선배 기자가 암 투병 끝에 유명을 달리했다. 오랜만에 막내가 들어왔다며 아껴주셨던 분, 이젠 콧대 높은 프로기사들한테 자문 받으러 다니느라 고생 안해도 되겠다며 나를 종종 추어올려주셨던 분이 저승기원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소식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세상에 우연히 던져진 우리들로선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엔 답할 수 없다. 삶에 대해 탐구하면 탐구할수록 그 끝에서 만날 수 있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오직 죽음뿐이다. '생의 철학자'라 불린 니체가 그랬고, 삶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했던 헤밍웨이도 마찬가지였다(바둑판 안에서 돌을 가장 잘 살리는 조치훈 9단이 '자살'을 언급한 건 우연이었을까).


요즘엔 죽음에 대해 초연해졌달까, 갑자기 녀석과 마주친다해도 당황하지 않을 정도의 내공은 생긴 것 같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영화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는 작품인데, 만약 4학년 1학기 때 일찌감치 취업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대학원에서 함께 공부하게 됐을 모 교수님은 영화의 주인공 안톤 시거가 '죽음' 그 자체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어느 날 갑자기 안톤 시거를 만나, 동전의 앞면과 뒷면 중 하나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하더라도 웃으며 하나를 고를 수 있을 것 같은 요즘이다.


삶에 큰 미련이 있다거나 이루고 싶은 원대한 목표 혹은 꿈이 있어서 사는 인생은 더이상 아니지만, 그렇다고 조속히 죽을 이유 또한 마뜩찮다. 죽음이야 언제 겪어도 마찬가지인 경험일 테니까. 삶의 이유를 찾은 게 아니라 굳이 서둘러 죽을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달까.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먼 미래를 상상하며 노년의 '삶'을 대비하는 건, 글쎄 무슨 의미일까 싶은 생각이 든다. 삶은 애초에 내 의지도 아니었으므로. 차라리 '죽음'을 디자인 하는 게 훨씬 주체적인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러저러한 것들은 뒤로 제쳐두고 하루하루를 축제처럼 사는 게 훨씬 중요하지 않겠나. '생'의 세상에선 지금의 삶을 온전히 즐기고, 언젠가 죽음을 만나게 된다면 그땐 '사'의 세상에서 먼저 간 존재들과 반가운 해후를 하면 될테니. 그때까지, 아버지 그리고 먼저 간 모두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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