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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주지 않는 자유

feat. '아무튼 예능', 복길 / 트레바리 체험독서-액티브

첫 책이 ‘아무튼, 예능’으로 정해진 건 내 기억이 맞다면 9월의 일이다. 그때 나는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9월)’ 혹은 ‘소설가의 일(10월)’ 둘 중에 하나를 읽고 있었을 것이다. 


체험독서는 기존 트레바리에 없던 형태의 모임이다. ‘씀’ 클럽만 했던 나로선 일종의 전환점이 된 클럽이라 어떻든 연장할 생각이긴 했는데, 문제는 첫 번째 책이었다. 독립한 후, 집에 TV를 놓지 않았다. 예능에도 관심이 없었다. 예능을 주제 삼아 어떤 생각이나 대화를 해본 적 자체가 없는데 책 제목이 ‘예능’이라니! 필경 시련이 닥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서점에서 책을 손에 쥔 후 기분이 살짝 나아졌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와 감각적인 표지 덕분에 소장 욕구가 조금 올라갔기 때문이다(게다가 페이지도 적었다). 


애초부터 책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다만 이해는 됐으면, 전혀 못 알아듣는 얘기를 계속 읽어야 하는 불상사만 없었으면, 하는 소박한 심정이었다. 


기대치가 너무 낮았던 탓일까, 생각보다 책이 재밌었다. 책장이 술술 넘어갔다(역시 파트너님이 심모원려 끝에 책을 골랐으리라는 막연한 예측이 맞았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이 책이 ‘예능’을 표방했지만 실상 한국 사회에 대한(그것도 최근 가장 첨예한 주제인 페미니즘을 포함한) 얘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립의 폭력 

장 폴 사르트르는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라는 저서에서 사회적 현안에 중립을 지키는 전문가들을 ‘사이비 지식인’이라고 명명한다. 엄연히 피해자가 존재하는 사안에 대해 제3자의 입장에서 중립 운운하는 게 얼마나 무책임하고 폭력적인지 통렬하게 지적한다.


프랑스의 식민지배가 잘못된 건 맞지만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의 무장봉기는 폭력적이므로 ‘테러’로 규정한다거나, 베트남전의 문제점은 인식하면서도 미군이 철수할 경우 공산주의 세력에 유리하므로 중립을 지키겠다는 식의 의견이 여기에 해당한다. 


만약, 한국과 일본이 아닌 제3지대에서 윤봉길,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두고, ‘일본의 식민지배가 억압적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폭력적인 테러 행위가 용인돼서는 안 된다’는 식의 ‘전문가’ 논평이 나온다면 어떨까? 같은 입장에 있는 제3자들은 고개를 끄덕일지 몰라도 한국인에겐 절대로 공감을 얻을 수 없다. 


피해자가 존재하는 사안에서, 제3자는 절대로 중립적인 시각을 획득할 수 없다. 피해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80년 지난 위안부 문제가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도 사회적 이슈가 되는 이유는 우리가 피해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이 어디 붙어 있는 나라인지도 잘 모르는 지구 반대편 사람들은 어쩌면 ‘다 지난 일인데, 지금은 서로 사이좋게 지내면 좋지 않아?’ 라고 ‘중립적 의견’을 제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본의 진심어린 반성과 사죄 없이 그런 게 가능할 리 없다는 걸 한국인들은 모두 안다.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생긴다. 한국인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 사실을, 예컨대 일본 제품으로 가득한 이글루에 살고 있는 남극의 에스키모들에게 설명한다고 가정해보자. 논리적으로 설득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만약 자신이 위안부 피해자의 가족이라면, 논리고 뭐고 감정이 먼저 앞설지도 모른다). 


서울 토박이인 나로선 지방 출신인 저자가 느꼈을 불평등을 가름하기 어렵다. 남자인 나로선 여자인 저자가 느꼈을 불편함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우린 같은 한국 사회에 살고 있으므로 ‘나도 모두 알고 있는 일’이라고 착각하고 자만하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타인에게 의도하지 않은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우리는 선입견을 잠시 접어두고 마음을 연 채 경청해야 한다.  



#복길 작가를 위한 변명 

이 책은 트위터에 쓴 글을 모태로 탄생했다. 트위터는 사적인 공간이라 아무래도 직설적이고 불친절한(전후 맥락을 상세히 설명하지 않는) 글이 초안이 됐을 가능성이 높다(물론 이때까진, 이 글이 책으로 엮여 출판되리라곤 작가 본인도 아마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편집 과정에서 원문보다 훨씬 매끄럽게 많이 다듬어졌겠지만, 큰 틀에서 기조를 바꾸지 않았을 걸로 추측된다. ‘아무튼 예능’이라는 제목으로 발주를 하게 된 건, 아마도 복길 작가가 트위터에서 얻은 공감이 동력이 됐기 때문일 테니. 


확장성 측면에서 이 책은 일단 성공하지 못한 걸로 보인다. 이번 모임의 독후감들만 놓고 보더라도 비판적인 시선이 많았다. 


이건 어쩌면 형식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형식이냐 내용이냐’, 이 문제는 대학시절과 사회초년 시절의 나를 관통하는 하나의 큰 화두이기도 했다. 복길 작가의 직설적 화법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가 닿지 못한 걸 보면, 이 책은 꽤 생각해볼 ‘내용’이 많은 책임에도 ‘형식’의 불편함이 그것을 가린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극단적 내용주의자에서 이젠 오히려 형식주의자로 변모한 나로선 복길 작가의 이 책을, 그 안에 담긴 글을, 감정이 여과 없이 투영된 그 문장들을 보듬어주고 싶다.  



P.S. 사실 좀 더 말랑말랑한(?) 독후감을 쓰고 싶었는데 다른 멤버님들이 먼저 올려주신 글을 읽다보니 다소 심각해진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책을 진즉 다 읽었음에도 쉽사리 글을 쓰지 못했다. 책을 읽고 해석하는 건 물론 독자의 자유다. 사회 현상을 보고 판단하는 것 또한 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자유란 건 생각보다 굉장히 어려운 개념이다. 특히 ‘생각과 감정의 자유’, ‘의견과 주장의 자유’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만하다. 의도치 않게 서로에게 상처 주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트레바리 같은 모임에서 우리는 더욱 진솔한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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