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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이 여자였던 시절

트레바리 GD-셋토 2019년 10월 모임 독후감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관계(다시 말해 한쪽이 다른 한쪽에 법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상태)를 만들어낸 원리는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고, 인간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중대한 장애물 중 하나이다. 이것은 완전 평등의 원리로 대체되어야 마땅하다. 어느 한쪽에 권력이나 특권을 주면서 그 반대편의 권리를 박탈하는 일은 다시는 없어야 한다."


위 인용문은 누가, 언제 쓴 글일까. 아마도 이 질문에 답하긴 쉽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다. 놀랍게도 이 글은 1869년 출간된 책의 1장 도입부를 장식하고 있다. 저자는 존 스튜어트 밀. 네이버에서 검색한 책 정보에서  '출간된 지 15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큰 사랑을 받는 책' '필독 고전'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자유론]의 저자, 바로 그 존 스튜어트 밀이다(정작 자유론은 아직 제대로 읽어보지도 못했는데, [여성의 종속]이라는 제목의 이 작품을 통해 존 스튜어트 밀과 먼저 만나게 됐다).


영화 [벌새]를 보고, [보라색 히비스커스]를 읽고 어떤 식으로 독후감을 써야할지 고민했다. 몇 년 전 이직을 하면서 훨씬 많아진 해외 출장 탓에, 그때마다 책을 몇 권씩이나 캐리어에 짊어지고 다니는 게 힘들어 수차례 망설이다 구입한 전자책 리더기가 있었다. 책세상문고 고전 시리즈를 꽤 괜찮은 가격에 '50년 대여' 해준다는 말에 혹해 충동구매 한 이후 지금까지 열어보지도 않고 있다가(이렇게 또 호갱이...) 정말 오랜만에 들어간 도서 목록에서 [여성의 종속]이 보인 건 우연이었을까(물론 아직도 대여기간은 48년 88일이나 남았다).


존 스튜어트 밀의 [여성의 종속]을 번역한 서병훈 씨는 이 책이 밀의 다른 책의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고 있다고 지적하며, 그러나 이 책은 자유, 인간 본성, 사회 등에 관한 그의 철학 전반을 포괄하는 '존 스튜어트 밀 사상의 종합판'이라고 평가한다. 이 책이 페미니즘에 관한 최고 권위를 지닌 고전으로 자리를 굳힌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말로 마무리를 짓고 있는데, 사실 전혀 몰랐다.


우연찮게 '페미니즘에 관한 최고 권위를 지닌 고전'을 접하게 돼 전류에 감전된 듯한 전율을 느꼈다. 전자책의 장점 중 하나는 페이지가 술술 넘어간다는 점. 순식간에 빠져들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추후 시간적 여유가... 아니 그럴 맘이 생긴다면 [자유론]도 꼭 읽어봐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계기가 되기도).


"사람들은 어떤 제도를 처음 만들 때 그것이 무엇인가 바람직한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아니면 적어도 과거 한때 그랬다는 강한 기대감을 품게 된다. 그래서 그런 목표를 달성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과거의 경험을 빌려 특정 제도를 채택하고 유지한다. 만일 사회적 지배 관계를 규정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양심적으로 진지하게 비교한 끝에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제도가 처음 만들어졌다면 조금은 나아졌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여성이 남성을 지배하거나 남성과 여성이 평등한 지위를 누리는 제도, 아니면 이런 여러 양상들이 혼합되고 상황에 따라 각각 상이한 조직 원리가 적용되는 등 지금과는 다른 사회적 조직 양상을 골고루 시험해본 뒤, 그런 경험에 입각해서 여성이 사회 문제에 대해 아무런 발언권도 가지지 못한 채 그저 하나의 사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운명을 좌우하는 남성에게 법적으로 복종할 의무를 지는 것, 한마디로 전적으로 남성의 지배를 받는 것이 양쪽 모두의 행복과 안전을 보장하는 최선의 길이라는 판단에서 그런 제도가 생겼다면 그 당시에는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믿을 만한 근거가 어느 정도는 있는 셈이다. 그러나 남성과 여성을 지배하는 제도의 경우는, 어느 모로 보나 정반대의 과정으로 만들어졌다. 우선 첫째, 약한 쪽을 강한 쪽에 완전히 복속시키는 현재의 이 제도가 더 좋은 것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은 단지 이론에 입각해서 그런 주장을 펴고 있을 뿐, 다른 양상은 전혀 시험해보지 않았다. 둘째, 그렇다고 이런 불평등한 제도가 심사숙고의 결과이거나 신중한 혜안을 갖춘 것도 아니었고, 사회 사상을 고양하거나 인류에게 도움을 준다든지 아니면 사회질서를 바로잡는 데 조금이라도 유익한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인류 역사의 여명기부터 모든 여성이(남성에 비해 육체적인 힘이 부족한데다 남성이 기대하는 것들을 만족시키려고 애쓰다보니) 일부 남성들에 종속되는 상태에 빠지게 되었을 뿐이다. 법과 정치체제는 단순히 물리적 사실에 불과했던 것을 법적 권리로 전환시키면서 사회적 구속력을 부여하고, 이런 권리들을 주장하고 보호해주는 공적, 조직적 수단을 확립함으로써 무질서하고 무법한 상태에서 벌어지는 난폭한 충돌을 방지하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한다. 이미 복종을 강요당했던 사람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 합법적으로 지배당하게 된다."(존 스튜어트 밀, [여성의 종속])


생각 같아선 이 책에서 마음에 들었던 구절들을 몽땅 인용하는 것으로 독후감을 마무리짓고 싶지만, 타이핑 치느라 손목도 꽤 아픈 데다가 혹시 저작권에 위배되는 건 아닌지. 게다가 2시간도 채 안남은 시간 탓에 그런 짓을 시도했다간 제출에 실패할 게 틀림없다.


존 스튜어트 밀은 1800년대, 그러니까 여성에게 투표권조차 없던 시절부터 남자와 여자가 평등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실제로 1865년 하원에 출마한 밀은 '여성도 남성과 똑같은 선거권을 가져야 한다'는 입장을 공공연하게 펼치며 선거운동을 전개했다. '이런 정강을 가지고서는 전지전능한 하느님이라도 당선될 수 없을 것'이라고 비꼬던 사람들을 비웃듯 보란듯이 당선되기도 했다. 밀은 여성들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오랫동안 참여했던 일, 이를테면 문학 같은 분야에서는 같은 기간, 같은 수의 남성 경쟁자들에 비해 질과 양 두 측면에서 그 성과가 결코 모자라지 않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설명했고, 정치적 능력에 관한 한 여성이 결코 남성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도 역설했다). 물론 이 책의 말미엔 '[여성의 종속] 의미와 한계'라는 소제목으로 부족한 점을 언급하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1800년대를 겪어보지 않은 나로선 그때가 어떨지 감히 상상도 가지 않는데, 그 당시에 이미 2019년을 사는 사람들 못지않은 아니 어떤 측면에선 더 탁월하기도 한 생각을 했다는 점에 더 점수를 주고 싶다. 요는, 존 스튜어트 밀의 사상이 대단하고 훌륭하다는 점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존 스튜어트 식으로 표현하면,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의 자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올바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바둑기사 중 좋아하는 분이 있다. '우주류'로 유명한 다케미야 마사키 9단이다. 햇병아리 기자였던 2014년 한국에서 이 분을 인터뷰 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나 지금이나 일본 정부가 도저히 호응해줄 수 없는 정책을 펼치던 건 마찬가지였는데, 다케미야 9단은 한국 기자들 앞에서도 거침없이 일본의 정책을 비판했던 게 아직도 인상깊게 남아있다. 프로기사에겐 생명이나 다름없는 실리를 초개와 같이 버리고 중앙으로 훨훨 날아가 미지의 영역을 자유롭게 노닐던 다케미야의 우주류는 한 시대를 풍미하며 수많은 고수들을 무릎 꿇렸는데, 정작 본인은 우주류가 아니라 '자연류'로 불리길 원했다.

다케미야 9단의 인생관이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 사상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분 또한 늘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해보는 것을 인생의 모토로 삼았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계시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벌새]도 조금 어려웠고, [보라색 히비스커스] 전반에 깔린 분위기엔 질식해버릴 것 같은 기분을 느껴 몇 번이나 책 장을 덮었다가 다시 폈다. 사실 어려울 게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단체에 종속된 인간은 한없이 나약하고 어리석지만 각각의 개체로써,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한 사람 한 사람은 의외로 현명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근 200년 전에 이 세계를 먼저 살았던 분 또한 스스로 깨달았던 진리를 머리 좋기로 소문난 대한민국 남자들이 찾아내지 못해서야 체면이 말이 아니다(주입식 교육의 여파로 오작동 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다는 게 개선점이긴 하지만).


함께 행복한 세상을 위해 인류가 작지만 위대한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길. 트레바리가 아웃박스가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주체가 돼 팍팍한 현실을, 점점 살기 힘들어지는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 데 힘을 보탤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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