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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적 육식 : 다시, 생태주의로

feat.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의 명저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읽다보면, 나치의 유태인 학살 못지않은 끔찍한 장면을 마주하게 된다. 소 값이 폭락했던 어느날, 미국에서 '소 학살'이 일어났는데, 600만 마리의 소를 모두 도살한 후 불태웠다. 6만, 60만도 아닌 600만 마리라는 압도적인 숫자 앞에 치를 떨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왕 그많은 소를 살처분 할 거라면 차라리 아프리카 등지에 나눠주지, 하는 생각을 하자마자 책에선 왜 자본가들이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지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논리에선 그렇게 하는 게 오히려 손해이며 차라리 죽여 없애는 게 더 '합리적'인 판단이라는 식의 글을 읽게 되자 왜 그토록 자본주의니 신자유주의니 하는 자본가적 논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었는지 단박에 깨달을 수 있었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생태계를 파괴한다. 따라서 자본주의와 생태주의는 절대 양립할 수 없다(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심지어 인간마저 '상품화' 하므로 어쩌면 페미니즘과도 양립하기 어려울지도). 소위 글로벌 자본이라고 하는 것들이 아마존 밀림에 침투해 환경을 파괴하고 원주민들의 삶을 무너뜨리면서 얻어내는 자원들(이를 테면 커피 원두를 비롯한)을 떠올려보면 이해하기 쉽다. 자연 상태 그대로, 생태주의 철학을 유지하면서 돈을 버는 건 불가능하다. 교환가치를 제외하면 쌀 한 톨만도 못한 종이쪼가리를 얻기 위해 지구는 점점 피폐해졌고, 이에 비례해서 자본가들의 삶은 더 윤택해졌다.


페미니즘이 필연적, 궁극적으로 채식주의와 만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최근에 많은 접점들이 점차 연결되기 시작했고, 드디어 GD심화 클럽에서 '육식의 성정치'라는 책이 전면에 내걸렸다. 페미니스트와 비건은 결국 합일돼야 하는 걸까.


약 100년 전, 미국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엔 늑대의 씨가 말랐다. 인간들이 늑대란 늑대는 모두 무자비하게 사냥해버렸기 때문이다. 늑대가 자취를 감추자 사슴과 엘크 등 초식동물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포식자를 만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초식동물의 세상이 된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의 생태계는 엉망이 됐다. 사슴과 엘크는 풀과 나무를 닥치는대로 뜯어먹었고 이건 도미노처럼 생태시스템을 마비시키는 나비효과로 작용했다.


그러던 중, 1995년 14마리의 늑대가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에 방사됐다. '리와일딩'이라고 불리는 이 방식은 생태계 최고 포식자를 특정 지역에 다시 풀어놓음으로써 망가진 생태계를 간섭 이전 단계로 돌리는 방법이다. 14마리의 늑대는, 놀랍게도 폐허가 되고 있던 옐로우스톤을 복원해내기 시작했다. 늑대들이 사슴과 엘크를 잡아먹었을 뿐인데, 초식동물들의 개체 수가 줄어들자 나무와 풀이 다시 자라났다. 자라난 나무와 풀 덕분에 새들이 찾아왔고, 비버가 돌아와 강둑을 만들었다. 늑대가 코요테 같은 하위 포식자를 잡아먹자 코요테의 먹이였던 토끼를 비롯해 쥐와 같은 설치류들이 늘어났고, 이들을 주식으로 삼는 맹금류도 다시 돌아왔다.


늑대의 육식을 예찬할 생각은 없다. 다만, 생태계는 생태시스템대로 흘러가도록 놔두는 게 가장 좋다는 건 불변의 진리다. 만약 어느날 갑자기 뉴런이 대폭발하면서 진화한 똑똑한 늑대가 나타나 사슴과 엘크를 잡아들여 지금의 인류처럼 공장식 축산업 제도를 만들었다면 옐로우스톤의 생태가 지금만큼 회복됐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늑대는 다만, 배고플 때마다 사슴을 잡아먹었을 뿐이다. 사슴을 놓쳤을 땐 이따금 코요테를 할 수 없이 잡아먹었을 뿐인데 생태계는 점점 복원됐다.


문명화된 현대 사회에서 최상위 포식자인 인간의 '생태적 육식'이 가능할까. 배고픈 한 명의 인간이 허기를 달래기 위해 동물 한 마리를 잡아먹는다면, 그런 식의 육식이 생태계에 위해를 가할 리 없다. 그런 방식의 '윤리적 육식'은 페미니즘과 대척점에 서 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야생의 사고'를 쓴 레비스트로스를 필두로 다양한 생태사상가, 생태철학자들이 인디언을 주목했다. 인디언들은 '양식'을 하지 않았고, 공장식 축산업을 만들지 않았다. 인디언들은, 예컨대 강에서 물고기를 사냥해 잡아먹은 후엔, 뼈를 깨끗이 씻어서 다시 강물에 흘려보내며 감사를 표하는 방식으로 육식을 했다. 그러나 이게 불가능한 지금은, 현실적으로 육식이란 곧 자본이 생태시스템을 몽땅 파괴하고 공장시스템화한 고기를 먹는 것을 의미하게 됐다. 동물을 비록 하위 포식자지만 지구라는 공간을 함께 나눠쓰는 존재로서 존중하기는 커녕, 단순한 고깃덩어리로만 '대상화'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무엇이든 존재 그 자체로 존중하는 게 어쩌면 생태주의 철학의 핵심 사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성을 하나의 인간으로 존중하지 않고 성적 존재로 대상화하는 행동이 절대 용납될 수 없듯이 동물이든 식물이든 어떤 존재든 지구의 자원을 함께 나눠쓰고 있는 동료로서, 함께 터전을 공유하는 존재로서 존중하지 않는 행동 또한 옳지 못하다.


'시애틀 추장의 편지'에서 드러나는 인디언 추장 시애틀의 진심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자매고 형제라는 것, 그걸 깨달아달라는 것이었다. 피터 크로포트킨이 쓴 '만물은 서로 돕는다'를 관통하는 사상 역시 세상 만물은 유기적인 공동체로서 연결돼 있다는 점이다. 지금은 인간에게 착취 당하는 대상일 뿐인 동물조차 친구로서 존중할 수 있다면, 그런 세상에서 같은 인간을 향한 무자비한 폭력과 차별, 착취는 과연 생존할 수 있을까. 육식이냐 채식이냐 같은 다분히 논쟁적인 주제를 넘어 보다 근본적인 고민을 해보고 싶다.




Q. 현실적으로 생태시스템을 파괴하지 않는 '윤리적 육식'은 거의 불가능한데,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만이 진정한 페미니즘을 실현하고 자본주의(혹은 자본가)의 횡포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대안일까요?


Q. 만약 채식주의자가 됐을 경우 현실적으로 따르는 제약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 주변엔 공장식 도축 방식으로 잡힌 육류들을 제외한 먹거리가 생각보다 많지 않기 때문이죠(1년 365일 내내 '혼밥' 할 수 있다면 큰 걱정이 없지만, 타인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경우가 많은 직장인들에게 채식이 가능한 식당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니까요). 요즘 들어 서서히 생겨나고 있는 비건 레스토랑 또한 가격이 아직까진 비교적 높게 형성돼 있습니다. 이런 사회적 제약을 극복하고 채식주의를 실천하기 위한 방안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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