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자유 없는 자유주의 비판을 넘어

트레바리 GD-셋토 2020년 2월 모임 독후감

이런 유형의 책을 최근엔 거의 읽지 않았지만, 사실 대학생 때는 이렇게 분명 한글로 쓰여 있음에도 '독해'를 해야하는 글을 읽는 걸 꽤 좋아했다. 수학적인 글, 즉 논리적 빈틈이 없는 글을 좋아하게 된 건 그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논리적 글쓰기엔 치명적 결함이 있는데, 첫 째는 대체로 재미가 없다는 것 둘 째는 일정 수준의 합의가 선결되지 않았을 경우(예컨대 단어에 대한 정의 등)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너무 방대한 내용을 담은 책이라 각 장의 내용을 모두 담아 독후감을 쓰는 건 불가능하거니와, '만약 발제를 한다면 1장으로 하고 싶'었던 만큼 자유주의 페미니즘에 관한 내용에 중점을 두고 독후감을 써보고자 한다.


1장 말미 토론을 위한 질문 제1번 문항이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그 비평가들의 우려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데, 나는 비평가들의 우려 사항이 너무 우려가 됐다. 저자가 '제1의 물결'에서 언급하는 '자유주의 페미니즘: 평등한 자유와 참정권'(24쪽) 파트에 등장하는 인물은 해리엇 테일러와 존 스튜어트 밀 부부다. 저자가 밀의 '자유론'을 읽지 않았을 리 없다고 가정한다면(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을 아내의 영전에 바치며 '자유론'은 어떤 책보다 아내의 도움을 많이 받아 탄생한 작품이란 점을 밝힌 바 있다), 소위 자유주의 페미니즘 비평가라는 사람들은 자유의 정의를 모르는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만약 아니라면, 자유에 대한 그들과 나의 견해가 이미 다르므로 토론에 앞서 단어를 정의하는 게 먼저다).


존 스튜어트 밀이 책 한 권에 걸쳐 논증하려 했을만큼, 자유라는 개념은 그리 간단치 않다. 그중에서 특히 '생각의 자유'와 관련된 부분만 언급해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자유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의 반응, 즉 일종의 선입견은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는 것' 정도가 된다. 이러한 착각이 자유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1: 이성, 자유, 자율성이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니다(51쪽)라는 우스꽝스러운 명제로 도출되고 말았다.


밀의 자유 사상의 핵심, 특히 그중에서도 '생각의 자유'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견해는 '전체 인류 가운데 단 한 사람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은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건 마치 (엄청난 힘을 갖고 있는) 한 명의 사람이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나머지 다수의 사람들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만큼이나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 된다. 따라서 '자유론'의 꽤 많은 페이지가 '사회가 어떤 한 사람의 자유를 간섭하거나 침해할 수 있는 경우를 엄격하게 규정하는 것'에 할애되며, '자유론'이 집필 이유 또한 사람이 누구나 마음내키는대로 행동할 권리에 대해 옹호하기 위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경우, 문명사회에선 구성원의 자유를 침해하는 그 어떤 권력의 행사도 정당화 될 수 없다'는 점을 논리적으로 입증하기 위해 쓰였다.      


밀이 150년 전에 '자유론'에서 경고한 점이 바로 '다수의 횡포가 갖는 위험성' 문제다. 밀은 다수의 횡포에 대해 "개인의 사사로운 삶 구석구석에 침투해 마침내 그 영혼까지 통제하면서 도저히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는다"는 무시무시한 표현을 구사했다. "사회는 다수의 삶과 일치하지 않는 개별성은 절대 발전하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아예 싹조차 트지 못하도록 막으면서 급기야는 모든 사람의 성격이나 개성을 사회의 표준에 맞도록 획일화시키려고 한다"는 게 밀이 지적한 다수의 횡포의 핵심 위험성이다.


이번 모임의 책 '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의 제1장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위와 같은 이유로 제10장 제3의 물결 그중에서도 특히 퀴어 페미니즘과 필연적인 연관이 있을 수밖에 없다. 올바른 자유주의 페미니즘이란 51쪽 비판 이론에 나오는 것처럼 이성이나 자율성 같은 페미니즘과 하등의 관계도 없는 걸 논하는 사상이 아니라, 다수의 생각과 다른 형태의 페미니즘을 상상하는 것이 (밀의 자유론에 입각해서) '다수의 횡포'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가에 대해 철저하게 논하는 것이어야 했다.


다시 언급하면 이런 유형의 책은 저마다의 단어 정의에 따라 논리 전개 도입부에서부터 서로간의 혼선이 생길 수 있다는 매우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이점을 감안하더라도, '자유주의 페미니즘'이라는 거대한 물결이 서로 자유를 정의하는 시각의 차이로 인해 이토록 좁은 범위의 논의 안에 갇혀 허무하게 끝나버린 건 굉장히 안타깝다.


지금까지의 내용들만으론 이 독후감 또한 비판적 시선으로 바라보며 지적해왔던 책의 1장의 내용처럼 논리적 (혹은 재미없는...ㅎ) 글쓰기 틀을 벗어나지 못한 글이 될 가능성이 있다. 분위기를 환기하며, 내가 생각하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을 최근 이슈가 됐던 사건에 대입해보려 한다.


만약 숙명여대 학생 전원을 포함해, 전 세계의 모든 여성들 아니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트랜스젠더(성별전환 남자로 명명됐던)의 입학을 반대한다 하더라도 그 학교에 가고 싶다고 생각한 그 한 명의 자유를 침해할 권리는 없다. 나는 페미니즘의 가장 기본이 되는 사상적 토대가 "불공정한 것에 대한 필연적인 저항"(임경선)이라고 생각한다. 차별은 불공정하다. 균등한 기회를 빼앗는 것도 불공정하다. 이번 사건은 어쩌면 '다수의 횡포'가 한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 심각한 문제일 수도 있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이책에서도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도 인정 받기는 커녕 제대로 이해되지도 못하고 있구나, 하고 씁쓸해 하던 차에 권김현영 선생님이 이틀 전 쓴 칼럼에서 희망을 봤다. 글의 일부를 소개하는 걸로 독후감을 마친다.



관악 여성주의 학회 달은 "여성이 인간이라면 트랜스여성은 여성이다"라는 두고두고 곱씹을 명언을 성명서의 제목으로 썼다. 대학 페미니스트 연합체인 유니브페미는 대학 온라인 익명 커뮤니티에서 다수의 구성원과 다른 모습으로 상정되는 소수자에게 폭력이 집중되는 현실을 고발하며 안전이라는 감각은 동일성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의 "다름과 낯섦을 직시하며, 고민과 대화가 이어지는 과정"에서 획득될 수 있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중략)

숙명여대 동문 763명은 학교 당국이 모든 학생에게 안전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달라며 ㄱ씨의 입학을 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숙명여대 법학부에 재학중이라는 한 학생은 개인 성명을 내어 자신 역시 낯설고 두렵기도 하지만 "합류"를 환영한다고 했다. 많은 성명서가 반복해서 말하는 메시지는 우리가 결코 무지 속에서 안전하다는 감각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함께 지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면, 서로에 대해 알게 되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일지도 모른다. 무지의 공포를 무지에의 공포로 이겨내자. 인간에게 남은 희망이 있다면 그것뿐이다. (권김현영, '무지의 공포')



p.s. 해리엇 테일러와 존 스튜어트 밀 순서로 표기한 것은 아주 마음에 들었는데, 이 둘이 부부 사이라는 걸 밝히지 않은 건 어떤 의도였을지 ㅎㅎ '결혼과 이혼에 관한 초기 에세이'는 둘이 함께 썼고, '여성의 해방'은 해리엇 테일러가 쓴 것이며 '여성의 예속(혹은 종속으로 번역돼 있기도)'은 존 스튜어트 밀이 쓴 것이라고 칼 같이 구분한 센스에선 웃음이 나왔다.

작가의 이전글 본능 거스르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