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 책일기
친구들, 안녕하세요.
요즘 답답해서 심장이 폭발할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심리 상담을 받아볼까 고민했어요. 그러다가 정여울 작가님의 <<1일 1페이지,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심리 수업 365>> 를 책장에서 발견하고는 조금씩 읽어나가고 있어요.
이 책은 정여울 작가님이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한 치열한 기록이에요. 그래서 읽고 나면 마음의 안정을 얻고 치유될 줄 알았는데요? 오히려 저 자신이 너무 불쌍하게 느껴져서 슬퍼지는 거 있죠.
클라리스는 평생 한 번도 일탈을 해본 적 없는 모범적인 삶의 주인공이었다. 그런데 손녀가 사교계 데뷔 무대에서 큰 실수를 하고 어깨가 축 늘어진 모습을 보이자 처음으로 일탈을 꿈꾼다. (...) 천하의 모범생이자 완벽주의자였던 할머니는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경호원도 모두 떼어놓고, 손녀와 단둘이 낡은 60년대식 머스탱을 타고 소풍을 나간다.
그 장면에서 이상하게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왜 이러는 걸까, 생각해보니 나는 나에게 그런 말을 해줄 사람을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나 역시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다. 오늘은 그냥 놀아버릴까.
아무 걱정 없이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그냥 놀아버리자. 나는 남몰래 기다려 왔던 것이다. 저렇게 따스한 눈빛을 지닌 할머니나 어머니, 또는 나를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하는 누군가가 다정하게 ‘아무 걱정하지 말고, 모든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그냥 놀아버리자’라고 손을 내미는 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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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아 버린 거예요. 어디가 답답했는지. 왜 속상했는지. 매일 마주치는 사람들이, 저를 열렬히 응원하는 마음은 가슴 깊은 곳에 고요히 묻어두면서, 단편적인 비판의 말들은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다고, 새삼 생각하게 된 거예요. 깨달음이란 참으로 잔인해서, 모호했던 감정이 가시화된 문장으로 굳어지면 잊히지 않아요.
이제는 그들의 걱정이 짜증이 나기 시작했어요. 그들의 조언이 하찮게 느껴지기 시작했고요. 그들의 관심이 버겁게만 느껴졌어요. 그냥 도망치고 싶었어요. 아니, 차라리 저를 온전히 내어주고 싶었어요. 그들의 바람대로 삶을 가득 채워서, 엉망으로 망가진 결과물을 확인하고 싶어 졌던 거예요. 그들이 사랑하는 저를, 도저히 사랑하고 싶지 않아 졌어요.
친구들, 정유정 작가님이 유퀴즈에 나오셨는데, 보셨나요?
리밍 님이 소개해주신 데뷔작은 보지 못했지만, 저 역시 <<종의 기원>>을 흥미롭게 읽었어요. 여운이 짙어서, ‘악인’에 대한 작가님의 생각을 알고자 인터넷을 한참 뒤졌던 기억이 나요. 당시에는 ‘악이란 생존력이다’라고 하셨거든요. 모호하게 공감한 상태로 그 말을 마음에 간직했었어요. 언젠간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겠지, 하면서요, 그런데 이번 인터뷰에서는 ‘싸이코패스’가 무엇인지 이야기를 하셨더라고요.
싸이코패스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은 나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싸이코패스는 남 생각을 하지 않아요. 내가 가지고 싶으면 가지죠. 내가 가지고 간 것 때문에 누군가가 가지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아요.
소름이 돋았어요. 싸이코패스가 멀리 있는 것 같지 않아서요. 제 안에서 폭발하려고 했던 것은, 분노도 슬픔도 고통도 아니고, 저의 싸이코패스적 자아였던 거예요. 자기중심적 이기심이 폭발하려고 했던 거예요.
저를 슬프게 만든 그들을 미워하고 싶었어요. 그들의 상황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고, 그들의 감정에 공감하고 싶지 않았어요. 아니, 이해하게 될까 봐 다른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애썼어요. 알고 있었거든요. 그들은 저를 사랑한다는 것을. 이 세상 누구보다 저를 위한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해 무조건적인 응원과 신뢰를 보내는 사람은 이 세상에는 없다며, 그렇게 토라져 있었어요. 다른 누군가를 위해 그렇게 해줄 생각은 하지도 않은 채로요.
슬픔은 자신의 내부로 끝없이 파고드는 감정의 중력이다. (..) 슬픔에 빠졌을 때 오히려 인간은 자기중심적인 상태에 빠진다. 그것이 슬픔이 갖는 부정적 내향성이다.
그런데 웃음은 잠깐 ‘자기’라는 존재를 불현 듯 놓아버리는 것이다.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사실, 내가 무슨 일을 하는 중이라는 현실, 나의 책임이 무엇이고 내 슬픔이 무엇인지에 대한 자각, 이 모든 것을 그 순간 잠깐 놓아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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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중력에 이끌려, 자기중심적인 상태에 빠지게 되었나 봐요. 동시에, 제가 그런 상태에 빠져 있는 줄도 몰랐나 봐요. 저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어가든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주변 사람들만 탓하고 있었나 봐요. 치우친 사람들이 보통 그렇듯이 말이에요.
이기심과 이타심 사이에서,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자리를 잡기 위해 애쓰고 있어요. 슬픔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슬픔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어요. 치우치지 않기 위해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어요. 치우치면 미쳐버리니까. 사이코패스가 되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노력하다 보면 쉬워질 거라는 말을, 이제는 믿지 않아요. 세상은 매 순간 변하고 나도 또 그러하니까. 치우치지 않기 위한 싸움은, 사라지는 그날까지 멈출 수 없겠죠. 그날까지 우리는 부단히 노력해야 할 거예요. 온몸에 힘이 모두 빠져서 마침내 존재가 사라지는 그날까지, 우리는 힘들 거예요.
하지만 그 치열함이, 우리를 단단하게 하겠죠. 우리를 당당하게 해 주겠죠.
내 고민으로 인해 내 안에서 화산이 폭발할 것만 같은 순간. 소리 내어 천천히 시를 읽어보는 조금은 엉뚱한 모험을 시작해보자. (..)
분노로 인해 숨이 가쁘던 호흡이 잦아들고 내 목소리를 차분히 들어주는 ‘또 하나의 나’를 만남으로써 ‘분노하는 나’의 일그러진 얼굴을 비로소 제대로 바라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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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 치열한 싸움을 기록해 봐요. 어쩌면 모두가 같은 싸움을 하고 있어서 클리셰처럼 느껴질지라도. 세상을 위해 곱게 빚어놓은 얼굴 말고도, 분노와 슬픔으로 일그러진 얼굴까지 상세히 묘사해 봐요. 누군가가 우리의 글을 읽고, 다시 일어나 싸울 결단을 할 수 있게 되도록. 그렇게, 우리만의 방식으로 그들을 말해줘요. 아무 걱정하지 말고, 너만의 방식으로 멋들어지게 놀아보라고!
정말. 읽고 쓰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겠어요. 언제나 같은 결론이네요?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오늘도 읽고 쓰는 일을 통해서, 저의 일그러진 또 하나의 얼굴을 찾았고, 또 수용하게 되었으니.
읽기와 쓰기로 무장을 하고, 일단 오늘치의 어둠은 모두 물리친,
영지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