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 책일기
친구들~ 날씨 왜 이러죠? 어제는 볕이 쨍쨍해서 점심 먹고 산책을 하면서 머리가 홀딱 벗어질 것 같더니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내리면서 불어 치는 바람에 경량 패딩이 생각날 정도예요. 종잡을 수가 없네요.
종잡을 수 없는 한 가지가 더 있어요. 정유정 작가님이요!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로 세계 청소년 문학상을 수상하시더니 <종의 기원>이라는 최강 사이코패스가 등장하는 소설을 쓰셨어요. 저는 <종의 기원>을 먼저 읽고 작가님의 다른 책은 뭐가 있나 찾다가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를 알게 됐는데, 청소년 문학이라는 말에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었어요. 청소년 문학과 사이코패스는 간극이 너무 크지 않나요?
우리는 나란히 앉아 달을 봤다. 반달 위로 잿빛 띠구름이 지나고 있었다. 별똥별이 하나 흘렀고 시원한 바람에 키 작은 향나무들이 쏴아 몸을 흔들었다. 모기가 물어 대고 기분이 우울하다는 점만 빼면 완벽한 밤이었다. 습하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동화 속 삽화처럼 예쁜 밤.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 p199
침대에도 유혈이 낭자해서 침대보, 이불, 베개 할 것 없이 내 몸이 닿은 곳은 죄다 시뻘겠다. (...) 차라리, 나한테 유감이 많은 어떤 놈이 발작 중인 내게 돼지 피를 한 바가지 뒤집어씌웠다는 쪽이 더 그럴싸했다. -<종의 기원> p23
표현도 이렇게 경악하게 달라요. 별똥별과 예쁜 밤, 그리고 피 한 바가지.
저보다 앞서 쓴 자경님의 편지를 읽고 이 편지를 쓰기까지 많이 고민했어요. 자엽꽃자두, 꿀벌, 춤추는 찌르레기가 둥둥 떠다니는 상큼한 오렌지주스 같은 편지에 저는 피 냄새 풍기는 편지라니... 그럼에도 제가 이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이런 오싹한 책으로 편지를 쓰는 건, 저는 이런 작가가 되고 싶기 때문이에요. 별의 반짝임에서도 영감을 얻고 비릿한 피 냄새에서도 영감을 얻을 수 있는 작가요.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는 순수한 열다섯 살 중학생들이 우연히 떠난 여정에서 어느 지역의 미친 독재를 마주해요. ‘이것이 독재다’라기보다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독재를 비판해요. 반면 <종의 기원>은 미친 사람이 주인공이에요.
저는 장르물도 강력한 메시지를 담은 장르라고 생각해요. 시대적으로 먼저 써진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는 미친 제도와 미친 권력층에 의해 누군가가 아파지고 상처가 깊어졌다면, 10년 후(그리고 근래에) 써진 <종의 기원>에선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된 미친 환경과 미친 이기심을 비판하는 것 같아요. 장르물은 그런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생각해요.
전혀 다른 장르의 두 작품을 읽으면서 과연 어떤 쪽의 장르에 더 마음이 기우는지 가늠해봤어요. 지금보다 나이가 더 어렸다면, 지금이 아닌 지난 그 시대를 살고 있었다면 고민 없이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에 기울었을까요? 문득 내로라 출판사가 그로테스크한 작품을 주로 선정하기에 저는 내로라 출판사의 모든 책들을 사랑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맞아요. 제 취향은 영지님과 닮아 있나 봐요.
나중에, 나중에 영지님이 꿈꾸는 세모 집을 지으시면 그 옆에 동그란 집을 짓고 커피를 홀짝이며 책을 읽고 싶어요. 눈이 뿌예질 때까지 책을 읽고 또 읽다가 세모가 네모로 보일 때쯤 잠시 눈을 감고 마당에 핀 자경님을 닮은 야생화 향기를 마시고 싶어요. 생각만 해도 평화로워요.
앗! 그곳에 가기 전에 피 비린내 나는 장르물을 빨리 써야겠어요. 아무래도 야생화 향기를 맡으면서는 피를 떠올릴 수 없을 것 같아요. 평화롭지만은 않은 세상에 살고 있을 때 좀 더 리얼한 장르물을 쓸 수 있을 것만 같아서요. 제가 정유정 작가님의 글 속에서 읽은 시대의 변화처럼 언젠가 제 글을 읽는 독자들도 제가 살아가는 환경의 변화를 눈치챌 수 있겠죠?
오늘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말만 늘어놓은 저는 이만 총총총
- 리밍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