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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지 Oct 04. 2022

불편하겠다는 결심

셋, 책일기

     저는 책을 읽기 시작하면 끝을 보는 편인데요. 반대로 중간에 덮어버린 책은 영영 다시 펼쳐지지 않더라고요. 이 책도 분명 어떤 핑계를 대며 덮어두었던 건데요. 마음이 불편해져서 쉽게 포기했던 거 같아요. 유림님도 지난 일기에서 소개해주신 적 있죠? 이번에는 정말 크게 각오하고 다시 펼쳤습니다.


     얼마 전 시부모님이 대왕 랍스터를 보내주셨거든요. 제가 원래 갑각류를 진짜 좋아해요. 그런데 1박 2일에 걸쳐 부산에서 서울로 날아온 랍스터는, 싱크볼 안에서 뽀득뽀득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너무 큰데 살아 움직이고, 살아 움직이는데 죽여서 쪄먹을 생각을 하니, 너무 막막하고 무섭더라고요. 인터넷에 찾아보니 고통을 최소화하려면 망치로 머리를 내려쳐서 기절시켜야 한다고 하던데, 정말로 끔찍한 도살자가 된 기분이었어요. 생물을 직접 죽인다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려고 안방에 숨어서 신랑에게 전화를 했죠.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죽여주면 나는 또 맛있게 먹겠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스스로 혐오감이 피어오르기 시작한 거예요.


     세상을 조각조각 바라보면 얼마나 편리한가요. 접시 위에 올라간 음식은 그저 식자재이고, 오늘 빵빵하게 켜 둔 에어컨은 그저 돈을 내면 생겨나는 전기라고 생각하면요. 그런데 그건 마치 이 세상에 감정과 고통을 느끼는 존재가 나 하나뿐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것과 비슷하겠죠. 모두가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을 잊고 산다면, 우린 모든 방면에서 무척이나 편리한 선택지를 고를 수 있겠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잖아요. 외면하고 회피할까, 마주하여 결단을 내릴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끝에 이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진 겁니다.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를 떠올린 건 지혜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어요. 당장 비건이 될 수도 없고, 모든 에너지 사용을 포기하고 산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데, 세상을 위해서 도대체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더라고요. ‘세상을 위한다’라는 표현도 너무나 막연해서 아주 작은 실천사항을 떠올릴 수조차 없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탁월한 선택이었지요.


     저자 호프 자런은, 인간이 조금 더 넉넉한 풍요를 선택하는 동안 지구가 어떻게 변했는지 정확한 숫자를 들어 설명해요. 지구가 망가졌다거나 인간이 망쳐버렸다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아요. 그저 이러한 변화가 지속된다면, 인류는 지속될 수 없을 거라고 담백하게 결론을 내리죠. 그리고 그 이유는 두려움을 유발하여 경각심을 심어주려는 의도라고 설명해요. 동시에, 숫자로 증명되는 현실보다 미래는 희망적이라고 이야기해요. 그건 우리가 스스로 변화할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래요.     

    

“인간은 무엇이든지 배울 수 있는 종이니까.”
아버지가 그렇게 믿은 것은 딸인 나를 사랑했기 때문이었고, 아버지 덕분에 나 역시도 그렇게 믿게 되었다. 열심히 일하고 사랑한다면 결국 우리가 가장 바라는 일이 실현될 것이라는, 나의 첫 과학 교사이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학 교사의 말을 나는 믿었다. 
p222-223     

     커다란 변화가 필요한 게 아니라고. 약간의 불편함을 감내할 정도면 충분하다고. 그렇게 독자를 응원해요. 세상을 위한 지침 따위를 제시하는 게 아니라, 세상의 변화를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해요. 19가지 주제를 가지고 우리가 누리는 어떠한 편리가 세상을 어떻게 바꿨는지 상세하게 설명하기 때문에 하나하나의 주제에 관해서 각자 생각할 수 있게 하죠. 저자의 희망적인 마음이 글자를 타고 제게도 옮은 건지, 막연한 두려움이 걷히고 마음에 희망찬 계획이 하나씩 생겨났어요.


     랍스터 이야기로 마무리를 할게요. 많은 고민 끝에, 집에서 가장 묵직한 망치를 들고 머리통을 단번에 내리쳤어요.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날 것 같네요. 누군가 보기에는 그저 호들갑 일지 모르겠지만, 제게는 누군가의 뒤에 숨어서 풍요만을 뽑아먹지 않겠다는 일종의 결단이었달까요? (뭔가 너무 거창한가요?) 아무튼 직접 조리했고, 생각해서 보내주신 시부모님의 마음에 감격하며, 희생된 랍스터를 생각하며, 감사히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런저런 생각하기 이전만큼 맛있게만 느껴지지는 않더라고요. 어쩐지 씹어 넘기는 한입 한입에 무게가 실려 있는 기분이었어요. 

    

     깨닫고 나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어느 철학자가 말했죠. 이제는 흥청망청 오늘의 편리와 풍요를 만끽해버릴 수 없을 것만 같아요. 왠지 모를 찝찝함을 떨칠 수 없을 것 같아서요. 그러니 제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는, 저자의 희망을 나눠가지는 것뿐 아닐까요? 인간은 뭐든 배울 수 있기에, 깨닫기만 한다면 더불어 살아갈 세상의 수명을 위해서 개인적 편리와 풍요를 어느 정도 포기할 것이라고요.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는 우리 모두가 무얼 하고 있는가 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라는 말에 나와 여러분이 언제나 포함되어 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사실을 굳이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한 부분이다. (...)

물론 희망은 있지.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나는 강하게 믿는데, 네가 그 희망을 스스로 지켜갈 수 있다면 좋겠구나.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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