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어려서 그렇습니다 Chapter 1 : 홀로 서는 나날
결국 퇴사를 했다. 회사가 싫었던 것은 아니고, 사실 만족하며 다니는 것에 조금 더 가까웠는데, 마음 깊숙한 곳에 퇴사를 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용기에 대한 깊은 존경심이 있었다. 반복되는 일상의 타성에 젖어들 때쯤, 나에게도 '드디어' 퇴사의 계기가 찾아왔다.
나의 첫 직장은 20명 안팎의 디자인 스튜디오였는데, 학교 다닐 적 짧게 경험해본 큰 회사의 비합리적, 비 생산적 운영방식에 대한 반대급부로 선택한 회사였다. 졸업과 동시에 유일하게 지원했던 곳이었고, 운 좋게도 큰 무리 없이 바로 고용되어 약 2년간 근무했었다. 사람도 좋았고, 회사일도 익숙해져 크게 어려움이 없었지만, 결국 퇴사하게 되었다.
인생 노잼 시기
퇴사의 이유는 여러모로 복합적이었지만 , 가장 큰 이유는 작년 말부터 끊임없이 생각했던 “동기부여 문제”였다. 인센티브, 월급, 프로젝트 매니저로서의 자리, 이름 있는 클라이언트.. 그 어떤 것도 나로 하여금 큰 동기를 주지 못했다. 해야 할 일이 있고, 책임이 있기에 누구보다 열심히 했지만, 의문이 든 시점부터는 일에 대한 즐거움과 설렘 대신 책임감과 부담감만 자리 잡고 있었다. 나도, 친구들도, 회사 몇 분도 이러한 감정을 “우리가 인생 노잼 시기”여서 그렇다고 잠정적 결론을 내렸다.
”인생 노잼 시기 : 다들 그렇게 살아”
나의 고민에 대해 가장 많이 돌아온 답이었다.
6시 퇴근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저녁시간과 주말에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 그것이 99프로의 직장인이라 다들 말해주었다. 그리고 이에 나도 순응하며 살아갔다. 반복되는 일상의 사막 속에서 퇴근 후의 작은 취미를 오아시스로 여기며 묵묵히 걸어가는 나날이었다. 퇴근 후의 작은 일상이 가뭄 뒤의 단비 마냥 나의 갈증을 채워주었지만, 충분치 않았음에는 분명하다.
퇴사를 하고 자기 꿈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 아무런 연고 없이 훌쩍 외국으로 떠나는 친구들, 과감히 진로를 바꾸며 새로운 도전을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나의 동경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훌쩍 떠나 여행을 하고 자신만의 일을 즐겁게 하는 사람들의 '행동'은 부럽지 않았다. 내가 당장 내일 퇴사하고, 돈이 충분히 있더라도 뜬금없이 전 세계 일주를 하거나 카페를 차리진 않으리라. 나의 그들에 대한 동경의 대상은 그러한 결정을 내리는 '단단한 마음'이었다. 나는 그 마음을 '용기'라고 정의 내렸다.
”퇴사에는 계기가 필요해.”
고등학교 친구이자 퇴사 선배인 이 모양이 해준 조언이다. 계기라.. 얼마나 나를 화나게 하면, 그토록 노력을 해도 잘 안되던 결심까지 하게 될까?
친구의 조언(?) 이후로 나에게 수많은 고비는 왔었다. 클라이언트와의 충돌, 야근, 억울한 상황.. 모두 나를 '울컥'하게 만드는 일들이었으나, 대부분 하룻밤 자고 나면 사라지는 한순간의 파도와 같은 충동이었다.
그렇게 울컥했던 감정을 하룻밤 사이에 잠재우고 나면, 스스로의 안정된 마음에 안도와 어이없음을 동시에 느끼곤 했다. 그렇게 파도가 여러 번 거쳐가면서 "도대체 나에게 계기는 언제 올까" 하는 의문을 수없이 던지게 되었다. 이렇게 겁 많은 내가 용기를 낼 타이밍이 오긴 올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계기는 내가 상상치 못한 곳에 있었다.
회사를 잠시 쉬는 타이밍이 있었는데, 그동안 마음만 먹고 실천하지 못했던 작은 일들을 했다. 내가 소홀히 했던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고, 배우고 싶었던 것을 배우고, 때로는 밤을 새우며 나만의 프로젝트를 준비하면서
정말 오랜만에 가슴이 뛴다는 느낌을 받았다.
문득 어디서 많이 느껴봤던 감정인데 하고 되짚어 보니, 20살 초반에는 정말 시도 때도 없이 그러한 감정을 느꼈었던 거 같다. 하지만 그런 감정으로 말미암아 엎어지는 크고 작은 일들을 경험하며 그 감정을 “뭘 잘 모르는, 나이 어린, 철부지의” 감정이라고 치부하며 마음 깊숙한 곳에 고이 보관해두고 있었던 것이다.
모험심과 호기심을 마음 깊숙이 꾹꾹 숨겨둔 나는, '어른'이 돼가는 듯했다. 말과 행동에 앞서 한번 더 신중하고, 솟아오르는 모험심과 호기심에 이어지는 무수한 질문 대신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요 근래의 나의 모습은 내가 상상했던 어른의 모습이었다. 그러한 나는 분명 사고도 안치고 일도 척척 해갔는데, 가슴속 깊은 곳의 어떠한 갈증에 조금씩 타고 있었다. 마치 안 맞는 아빠의 커다란 옷을 입은 것 마냥, 불편한 마음이 조금씩 차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문득- 내가 그동안 잊고 지내던 나의 원래 모습이 기억났다. 나는 대책 없어도 “흥미로운” 사람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철부지겠지만, 적어도 나 스스로는 꿈 많고 열정적이었던 내 모습이 너무 좋았다. 불나방 마냥 관심 가는 것이 생기면 달려들어 때론 불에 데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불 가까이 내 힘으로 날아가는 나의 모습이 좋았다.
"해보고 싶었던 작은 것들을 하나씩 해봐야지, "
"배우고 싶었던 것을 하나씩 배워야지, "
"어디 소속되기보다는 나 홀로 서는 힘을 기를래."
꼬꼬마가 되기로 결심하자 여러 계획들이 순식간에 머리를 스쳐갔다. 계획 속의 나는 내가 한동안 잊고 지내던 '흥미로운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나는, 나 스스로가 만족하는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퇴사를 결심했다.
퇴사를 결심한 후 이런저런 계획을 막 세우기 시작했다.
졸업 전시와 동시에 등한시되었던 일러스트 그리기, 말로만 해왔던 에세이 쓰기 , 일본어 공부, 외국에서 한 달 살아보기, 목수 따라다니면서 일 배우기, 작은 가게 준비하기 등등..
수십 가지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가 현실적인 문제로 되돌이표 쳐 돌아왔다.
회사 다니면서 틈틈이 세팅해놓았던 투자 물건들의 수익 + 퇴직금 + 단기간에 구한 작은 알바 거리 + 외주 작업을 받을 수 있는 통로 등 여러 가지 요소를 수적으로 계산해보았고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 굶어 죽지는 않겠다.
스스로에 대한 수적인 검증이 끝난 이후에는 나를 말리는 어른들의 여러 조언이 이어졌다.
"요즘 경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회사라는 방어막이 벗겨지는 걸 감당할 수 있겠어?"
"계획은 구체적으로 세웠니?"
“3년은 채워야 하지 않아?”
“박수 칠 때 떠나란 말이 있잖니, 좀 더 있어보는 거 어때?”
등등 퇴사를 말리는 어른들의 조언이 이어졌고 실제로 마지막까지 나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질문들에 나만의 기준으로 하나씩 답을 써나갔다.
특히, '박수 칠 때 떠나야 하지 않니?'라는 질문에 '과연 내가 박수받는 시점이 있긴 할까..ㅋㅋ'라는 답변을 스스로 내렸다. 하지만 마냥 부정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결론은 아니었다. 내가 마음이 확고한 이 시점에 모두들 나의 선택을 응원해주리라는 왠지 모를 자신감이 있었다.
2019년 7월 16일, 그렇게 결국 퇴사했다.
퇴사를 결심한 순간, 응원을 받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막상 진짜로 한다고 얘기하니 주변 사람들이 상당히 축하를 해주었다. 약간 얼떨떨한 심정이었는데, 99프로의 확신을 갖고 있던 찰나 주변 사람들의 응원이 마지막 1프로를 채워주었다.
퇴사 날, 사람들과 점심식사를 할 때는 박수갈채까지 받았다. 설령 그 박수의 대상이 '내가 내일 늦잠 잘 수 있다는 달콤한 사실' 일지어도, 어찌 됐건 축하받았고 응원받았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매일 보는 운세 어플에 잘 나오지도 않는 '100'이 뜨니, 이쯤 되면 내가 퇴사를 할 수 있게 우주가 돕는 것 같더라.
그리고 오늘은 퇴사 5일 차이다.
어제 아침에는 느지막이 일어나 가족들과 브런치를 즐겼고, 오후에는 퇴사와 동시에 친구가 소개해준 일러스트 작업 알바를 했고,
그제 밤에는 또 다른 친구가 소개해준 전시 디자이너 지원서를 새벽 4시까지 작성했다.
사실 이쯤 되면, 나는 친구들 없으면 굶어 죽지 않나 싶기도 하다.
오늘 아침에는 이 글을 작성했고, 오후에는 예쁜 카페에 나가 글에 실릴 그림을 그릴 예정이다.
이렇게 적고 보니, 아직까지는 전보다 훨씬 만족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내 퇴사 선배 친구는 퇴사에는 계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얘기하고 싶다.
“퇴사의 계기는 부정적인 일들만 있는 게 아냐. 나 스스로에 대한 엄청난 긍정적인 발견일 수도 있어. ”
< 어려서 그렇습니다 >
Chapter 1 : 홀로 서는 나날
Episode 1 : 퇴사의 계기
마침.
<어려서 그렇습니다>에 대해..
"네가 어려서 그래~" 어떤 질문에 대해 열에 여덟 꼴로 돌아오는 답변이었습니다. 지금도 충분히 어리지만, 좀 더 어렸을 때는 그 말이 그렇게 듣기 싫었는데 - 이제는 '뉘예 뉘예 제가 어려서 그렇습니다' 라며 당당하게 제 이야기를 하기로 했습니다.
<어려서 그렇습니다>는 당당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26살 늦깎이 사춘기 영지의 자전적 에세이로, 매주 토요일에 연재하는 것을 '일단'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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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