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영지 Jul 11. 2020

뽑지 못하는 사랑니

신경 쓰이는 것들과 같이 살아가는 법을 익히기. 





내 입 크기만큼 동그랗게 파진 천 쪼가리가 얼굴 위로 덮어진다.  낯선 기계들만 시야에 없어지면, 두려움이 조금 가실까 했는데 정말 잘못된 판단이었다. 천에 가려 보이지 않는 풍경들 너머로 들려오는 기계음은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불끈 쥐게 만들었다. 

차갑고 딱딱한 것들이 내 입에 들어가기 무섭게, 이가 갈리는 듯한 굉음과 함께 절로 내 작은 비명도 튀어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플 거예요, 좀 더 참으세요"라는 말만 뒤로하고 입안을 헤집는 무자비한 드릴질은 계속되었다. 도대체 언제 끝나는 것인지.. 두세 가지 다른 소리를 내는 기계가 입안을 휘젓고 나간 후에야 내 긴 치료가 끝났다.  치료의 피날레는 아무렇게나 쑤셔 넣어준 축축한 거즈 솜을 몇 분이고 물고 있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침과 피가 뒤섞여 숨까지 컥컥 막혀오는 듯했다. 

정말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 스물일곱, 내 인생 첫 사랑니 치료의 기억이다. 






때로는 너무 당연하다고 느껴져, 감사한 줄 모르고 지나치는 것들이 참 많다.   예를 들면, 부모님 댁 가면 무한으로 리필되는 과일들이 그렇다. 혼자 서울살이를 해봐야, 과일을 집에 항시 구비해두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깨닫곤 한다. 다양한 과일을 돌아가며 구매하는 부지런함과 센스도 필요하고, 과일이 상하지 않게 적시에 꺼내어 가족들에게 분배해주는 민첩함도 지녀야 한다.  

 27년간 이어져 온 내 "건치 이력" 도 그랬다.  27년 평생, 비염에 위염을 달고 사느라 안 가본 병원이 없는 나인데도 '치과'만큼은 딴 나라 별나라 이야기였다.   아주 고른 이는 아니지만, 교정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 흔한 충치 하나 '한 평생' 있어본 적이 없다.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주기적으로 실시하는 치아 검사 때,  반에서 항상 홀로  충치가 하나도 없는 학생이었다.  그 때문에, 그냥 아 하고 입 벌리고 1분 채 안 걸리는 검사를 받았을 뿐인데 "건치 아동" 이라며 상장까지 매년 받아오곤 했다.  신경치료를 마치고 한쪽에 얼음주머니를 괸 채, 어버버 하며 하던 친구들의 "치과 괴담"은  전혀 와 닿지 않았다.  당장 남동생만 하더라도 앞니가 전부 자기 이가 아니라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으러 가는데, 한 지붕 아래 살면서도 동생의 시련은 "네가 이를 잘 안 닦아서 그래~" 라며 농담으로 넘겨 버렸다. 


그런 내게, 충치가 생겼다. 

희한하게도 초콜릿만 먹으면 어금니가 시큰거렸다.  다른 음식은 안 그러고, 초콜릿만 유독 그랬다.  하지만 참을만한 정도의 고통이라 그대로 방치해뒀는데 - 아뿔싸. 자고 일어났더니 퉁퉁 부은 왼쪽 턱에 부레나케 치과로 향했다.  병원 가는 내내 핸드폰으로 "초콜릿만 먹으면 이가 시려요" 등의 질문을 검색해봤다.  나처럼 두려움에 사로 잡힌 수많은 "초콜릿 이 시림증 환자" 들이 질문한 글들에 의사 선생님들의 답변들이 있었다.  

충치. 하지만 아직은 경미해서, 오로지 자극적인 음식에만 반응하는 경미한 충치 - 가 내 병명인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병원에 도착해 의사 선생님이 내게 제대로 내려준 진단 역시 충치 었다.  그런데 여기에 단서가 하나 더 붙었다. 


"사랑니가, 아주 고약하게 났어요." 


의사 선생님이 보여준 내 인생 첫 치아 엑스레이의 사진은, 내가 알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아래쪽 어금니 양 끝으로, 하늘을 보고 있어야 할 두 치아가 90도로 아주 뻔뻔하게 누워있었다. 언제 갑자기 어떻게 저렇게 자란 것인지.. 게다가 내 치아 중에 크기도 제일 큰 듯했다.  이어서 보여준 내 치아 사진은 더욱 가관이었다. 충치가 난 어금니 옆으로, 사랑니가 아주 조금 비집고 자라 있었다. 마치 빙산의 일부처럼, 나 홀로 거울로는 절대 못 찾을 만큼 작은 크기 었다. 그런데 이 작은 사랑니가 내 건치 이력을 깨고 충치를 생기게 한 것이다.  


사랑니의 만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X레이에서 선명하게 보이는 내 턱 신경의 끝에 사랑니가 제대로 걸려 있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이 사랑니는 턱 신경을 건드리고 있어 빼지도 못한단다. 


"좀 신경 쓰이겠지만, 같이 지내는 수밖에 없어요. 이건 못 빼는 사랑니예요. 못 빼는."


결국, 내 첫 치과 치료는 고약한 사랑니를 남겨둔 채 어금니의 경미한 충치만 제거하는 것으로 끝났다.  사랑니 주변으로 퉁퉁 부은 잇몸을 건드려 몇 배로 고통스러웠던 치료인데, 사랑니가 그렇게 자리 잡고 있는 한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다고 한다. 

일시적으로 멎어 든 왼쪽 턱의 통증에, 언젠가고 또 또 또 이 고통스러운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다시 잇몸이 저려왔다. 





내 첫 충치, 첫 사랑니의 경험이 더욱 시린 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 일 것이다.  차라리 시원하게 뽑을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물론 직접 그 고통을 겪어보지 않아 무시무시한 사랑니 발치 후기가 먼 이야기 같기는 하다. 하지만 그래도 며칠 아파하고 나면 두 번 다시 사랑니 때문에 고생할 필요는 없는데. 평소의 나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획 뽑아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뽑지도 못하는 사랑니라니.  애매하게 일시적으로 멎어진 통증에 또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고통이 두렵기만 하다. 


 나는 대체로,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을 극단적으로 잘라내곤 했다.  당장 불편하지 않더라도, 내가 괜스레 신경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들은 과감하게 정리를 해버렸다. 사랑니로 치자면.. 통증이 느껴지는 그 때 바로 뽑아버려야 맞다. 

 그래서 방 정리도 자주 하지는 않지만, 한 번 할 때는 정말 '극단적으로 ' 했는데 - 그때마다 가구 하나씩은 버려졌었다.   일도 그렇다.  애매하게 이도 저도 아닌 관계로 이어져 오던 업체들과는 어느 날 단호하게 메일을 써서 관계를 정리하곤 했다.   다른 일에 몰입을 하고 싶은데, 내 스케줄이 구애받지 않더라도 부탁받은 작은 일들에 내가 조금이라도 신경을 써야 되는 상황이 오면, 과감하게 업체를 정리하는 것이다. 당장 그 업체와의 계약을 정리하지 않아도 되는 때에 말이다. 

관계도 그렇다. 대학시절 내리 밝게 인사하고 지내던 어떤 동기모임도, 어느 날 문득 '나와 맞지 않는 사람들인가'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때가 있다.  열심히 응원한 친구에게 내 진심이 전해지지 못해 상처 받을 때도 있었다.  그렇게 그 관계가 충치처럼 서서히 아파올 때면 그 관계를 확 뽑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든다.  물론 업체와의 계약을 종료하거나, 방 정리를 할 때처럼 티 나게 무언가를 하진 않았지만 - 마치 앓던 이를 뽑듯이, 아주 깔끔하게 그 관계를 종료하곤 했다.  그러면 이 뽑은 것 마냥 허전하고 얼얼하지만,  통증은 차차 잦아들고 나의 일상은 통증이 없던 때로 돌아가곤 했다. 


 다만, 이 이야기도 과거의 이야기다. 한 해 두해 나이가 차차 먹으면서 내 주변을 둘러싼 많은 것들이 그렇게 쉽게 끊어낼 내용의 것들이 아니다.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 다고 해서 바로 그만둘 수도 없고, 저 사람이 맘에 안 든다고 해서 연락을 바로 끊을 수도 없다.  

 회사를 나오더라도 얄밉게 새침한 전 거래처 사장님의 연락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은, 이 연락이 또 어떤 기회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이해관계 때문이다.  일에 관련된 관계만 그런 것이 아니다.  아예 다른 일을 하고 지내는 동기들도 웃으며 반갑게 맞이한다.  예전에는 이해관계에 따라 불편함이 있어도 계속 이어져 오는 관계들을 "순수하지 못하다" 거나 "얍삽하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겨우 한 두 해 지나갔다고, 그것이 조금 더 융통성 있게 살아가는 법임을 느끼곤 한다. 

젖니 때의 내가 불편한 것들을 뽑아내고 끊어내면서 그 고통에서 벗어났다면, 영구치의 나는 뽑아내는 법 대신 같이 살아가는 법을 익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프고 신경 쓰이면 빨리 뽑아 버리고, 빨리 회복하고, 빨리 일어나야 하는데.  내 고약한 사랑니는, 내 불같은 성격을 약 올리듯 뻔뻔하게 턱 신경 가운데로 떡 하니 자리 잡았다.   일도, 관계도 이제는 더 이상 뽑지 못하고 안고 가야 하는데 - 사랑니까지 그러랜다. 

처음 하루는 눈물까지 질끈 내는 통증에 한숨만 푹푹 나온다. 하지만 진통제를 먹고 하루 이틀 지나니, 꼭 뽑은 것 마냥 다시 사랑니의 존재를 잊고 살아가게 된다. 


뽑지 못하는 사랑니에 대해 - 나는 결국 의사 선생님 말처럼 '관리를 잘해주고, 잘 신경 써주는 법'을 익혀간다. 사랑니의 통증이 점차 잊혀가듯이 - 나를 불편하게 하는 관계들과 일도 뽑지 않고 차차 잊어가는 법을 익혀본다.  아, 물론 - 그래도 치과 치료는 너무나 받기 싫다 ! 





<어려서 그렇습니다>에 대해..


"네가 어려서 그래~" 어떤 질문에 대해 열에 여덟 꼴로 돌아오는 답변이었습니다. 지금도 충분히 어리지만, 좀 더 어렸을 때는 그 말이 그렇게 듣기 싫었는데 - 이제는 '뉘예 뉘예 제가 어려서 그렇습니다' 라며 당당하게 제 이야기를 하기로 했습니다.

<어려서 그렇습니다>는 당당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26살 늦깎이 사춘기 영지의 자전적 에세이로, 매주 토요일에 연재하는 것을 '일단'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브런치를 구독해주셔도 좋고, 제 글을 메일로 개인적으로 매주 받아보시길 희망하시는 분은  아래 링크로 접속하여 폼을 작성해주시기 바랍니다.


https://forms.gle/7gH69UYVPFeCac8q7

작가의 이전글 아르바이트생에게 해고를 고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