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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Jan 03. 2019

6. 우리는 숲이다_타르투, 에스토니아

다국적 청춘남녀와 함께한 사우나 기행

타르투 카운티, 에스토니아




기차역 앞으로 낡은 폭스바겐 골프 한 대가 멈춰 섰다. 에스토니아의 문화 수도라는 타르투에서 나를 호스팅 하기로 한 18세의 카우치서퍼 르마시가 픽업을 나온 것이었다. "와썹!"을 연발하며 분 단위로 스웩을 남발하지 않을까 싶었던 르마시는 승용차 안에서 대화를 나눠보니 아주 지적이고 성숙했다. 능숙한 영어 솜씨로 대화를 주도하는가 하면 화두마다 다양한 관점을 아우르며 합리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한창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차량이 그의 집 앞에 멈춰 섰다. 도심 인근의 주택 단지에 자리 잡은 다세대 가옥.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고 했는데 아기자기한 짜임새로 공간들을 배치한 복층 구조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엄마와 새아빠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네 살배기 여동생도 인형처럼 예쁘고 귀여웠다.


여장을 푼 후 르마시와 함께 밖으로 나섰다. 자동차에 관심이 많은 르마시가 교외로 중고 자동차 부품을 가지러 가자고 청하기에 그러자고 했다. 며칠간 신세를 져야 해 르마시에게 보답을 하고 싶던 차였다. 르마시의 지인 집에 들러 승용차 뒤에 카트를 체결한 후 목적지로 향하는 길. 도심을 벗어나자 야트막한 구릉 위로 초록이 끝없이 물결쳤다. 평지로 이루어진 에스토니아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라고 해 봐야 해발 300미터가 채 되지 않았다. 굴곡은 없는 대신 온 천지가 초원이었다. 목적지로 향하는 한 시간 동안 눈이 쉴 새 없이 호강했다.


인적이 드문 숲 지대에 자리한 외딴 목조 가옥 앞에서 차량이 멈춰 섰다. 곧이어 중년 사내 하나가 등장해 우리를 안내했다. 부품은 가옥 옆의 창고에 있었는데 양이 생각보다 많았다. 자잘한 부품들은 반복해서 나르면 됐지만 엔진은 세 남자가 동시에 달려들어도 끄떡하지 않을 만큼 무거웠다. 땀을 뻘뻘 흘리며 부품 적재를 마무리한 후, 다시 왔던 길을 거슬렀다. 


도심에 진입하기 전 르마시가 한 가옥 앞에 차를 세웠다. 두 번째 부품 수거 작업. 가옥 옆에 놓인 커다란 사각 철제통 안에서 엉망진창으로 엉켜 있는 또 다른 부품 더미가 우리를 향해 얄미운 미소를 날렸다. 실어온 부품을 르마시네 집 주차장으로 모두 옮긴 후 시계를 보니 출발한 지 5시간이 지나 있었다. 고되긴 했지만 땀 흘려 노동하는 기쁨이 컸다. 르마시에게 도움이 된 듯해 마음이 뿌듯했다.


르마시의 네 살배기 여동생 엘로, 타르투, 에스토니아


르마시와의 궁합은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서로 손발이 아주 잘 맞았는데 너그럽고 개방적인 그의 품성 덕분이었다. 르마시는 여행 애호가인 엄마와 함께 어린 시절부터 카우치서핑으로 여행했다. 카우치서핑의 세계에서는 나에게 대선배인 셈이었다. 까탈이라고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고, 오히려 나눌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나누려고 했다. 내 스케줄을 사전에 묻고 때맞춰 대응해 준 르마시 덕분에 모든 일정이 순조로웠다. 거기에 더해 르마시는 한 발 앞서 계획을 짜고 그것을 실행으로 옮겼다. 개인적으로 움직일 필요 없이 르마시와 내내 붙어 다니며 도심과 교외를 구경했다. 도시의 규모는 작았지만 나라를 대표하는 대학 도시답게 생동하는 학생들의 발걸음이 길목 곳곳을 싱그럽게 수놓았다. 청년 문화로 술렁이는 이색 문화 공간들도 여행의 감성을 돋웠다. 


또 다른 카우치서핑 대선배이자 르마시의 엄마인 이리나도 호의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네 살배기 딸 돌보랴, 스포츠센터에 운동하러 가랴 분주한 와중에도 당연하다는 듯 끼니마다 식사를 차려 주었다. 귀찮아하는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래저래 고마운 마음이 깊어 그 보답으로 르마시의 네 살배기 동생 엘로와 자주 놀아 주었다. 인형을 빼닮은 엘로도 나를 잘 따랐다. 르마시의 엄마가 엘로에게 나를 그만 괴롭히라고 주의를 줄 정도였는데 오히려 내가 귀가할 때마다 엘로는 반가운 표정으로 나에게 달려들었다. 그 모습이 여간 사랑스럽지 않았다. 


하루는 세 사람과 함께 교외의 경치 좋은 호수로 소풍을 다녀오기도 했다. 출발에 앞서 재래시장에 들러 군것질거리를 샀는데 그들은 김밥과 피자와 양념치킨 대신 완두콩, 당근, 베리 등의 신선한 야채와 과일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우리와는 다른 소풍 먹거리들.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지는 호숫가에 도착해 행복을 증진하기 시작했다. 가족의 일원이 아님에도 일순간 가족이 된 것처럼 알콩달콩한 순간들이 호숫가 주변으로 흘렀다. 


벤과 대화를 나누는 르마시와 카롤린, 시내, 타르투, 에스토니아


시가지에 어둠이 깔리는 저녁에는 영화배우 나탈리 포트만을 빼닮은 르마시의 여자 친구 카롤린을 불러 셋이서 시내로 맥주 투어를 다니곤 했다. 에스토니아에도 훌륭한 맥주가 많다며 르마시와 카롤린이 도심의 명소들로 나를 이끌었다. 두 번째 날에는 르마시의 새로운 카우치서핑 게스트이자 러시안 히치하이킹 여행자인 율리아와 키릴이 맥주 탐험대에 합류했다. 나 같으면 한 사람 호스팅 하기도 벅찰 텐데 르마시는 어지간한 카우치서핑 요청은 모두 받아들였다. 혼자 술을 마시고 있던 캐나다 여행자 벤도 맥주 탐험을 나선 길 위에서 만났다. 성격 좋은 르마시가 벤에게 말을 걸었고, 명랑한 벤이 기다렸다는 듯 호응했다.


처음 만난 날 르마시가 나에게 타르투에서 꼭 해 보고 싶은 게 무어냐고 묻기에 사우나 체험이라도 대답했었다. 사우나 체험을 생략하고 핀란드를 빠져나와 아쉬워하던 차에 에스토니아에도 사우나 문화가 존재하고, 그 형식은 핀란드와 똑같다는 얘기를 들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내가 사우나 체험을 언급한 직후부터 르마시는 사우나를 보유한 지인들에게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성격 좋은 벤의 합류로 더욱 명랑해진 술자리의 분위기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르마시가 말했다. “우리 내일 다 같이 사우나에 가자. 카롤린의 외갓집에 사우나가 있거든!” 커다란 환호성이 로데오 거리에 울려 퍼졌다.


다음날 오전, 벤이 짐을 싸 들고 르마시네 집으로 찾아왔다. 여행 동료이자 대학 동기인 노엘과 함께였다. 전날 밤 르마시가 벤에게 동행자도 데려오라고 꼬드겼더랬다. 늘어난 일행은 노엘로 끝이 아니었다. 카롤린의 친구인 에바와 카롤린의 엄마도 사우나 기행에 합류했다. 에바야 또래 친구들과 함께 어울릴 목적으로 나왔다지만 카롤린의 엄마까지 등장할 줄은 몰랐다. 그녀의 역할은 자녀가 친구들과 벌이는 대규모 나들이에 차량 운전과 물자와 신용카드를 제공하는 것. 슈퍼마켓 계산대 앞에서 사명감을 불태우는 그녀를 향해 세계 청년들의 존경 어린 시선이 쏟아졌다. 이렇게 해서 늘어난 일행의 수는 총 9명. 기회가 되면 사우나 한 번 가보고 싶다고 했던 말이 르마시의 추진력에 힘입어 1박 2일 시골 여행으로 탈바꿈했다.


카롤린의 외갓집, 타르투 카운티, 에스토니아


9명이 나눠 탄 두 대의 차량이 초록 들판을 신나게 가르기 시작했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카롤린의 외갓집은 이국의 시골 정취가 한껏 묻어나는 곳이었다. 시계를 보니 슬슬 저녁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 시각. 저녁 밥상은 내가 책임지기로 했다. 주 요리는 떡볶이와 수제비. 이동하는 길에 들른 슈퍼마켓에서 고추장을 발견해 냉큼 카트에 담았다. 메릴린의 집에서와 마찬가지로 르마시의 집에서도 수제비를 한 차례 만들어 대접한 적이 있는데 르마시가 꽤 흡족해했다. 저녁 준비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렸다. 워낙 시골이다 보니 가스레인지의 화기가 많이 약했고, 음식량 역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최대치를 한참 넘었다. 장시간을 끙끙거린 끝에 내놓은 음식들에 대해 친구들의 반응은 아주 좋았다. 특히 떡볶이가 인기 만점이었다. 카롤린이 자신이 지금까지 먹어 본 수프 중에 최고라며 격찬하기도 했다. 여행의 흥분은 변변치 않은 것조차 아름답게 느끼도록 해 주는 법. 카롤린이 만족감을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한국의 진짜 떡볶이와 맛이 다르다는 사실은 고백하지 않았다.


내가 한창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나머지 친구들은 사우나를 즐겼다. 부엌 창을 타 넘는 소리로 미루어 다들 쾌락에 휩싸인 듯했다. 나를 위해 기획한 사우나 기행인데 정작 나만 사우나를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많이 아쉽지는 않았다. 나 혼자 잘살려고 기를 쓰는 것보다는 더불어 즐거운 일을 하는 게 더 행복했다. 부족한 솜씨로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분 좋았다. 한국 음식의 등장으로 떠들썩해진 저녁 식탁의 풍경을 흐뭇한 표정으로 구경하다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스팀 사우나로 향했다. 내 필요로 계획된 사우나 기행이니 잠깐이라도 사우나를 체험해 볼 참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사우나는 열기가 거의 빠져 있었다. 한쪽 귀퉁이에 놓인 자갈더미에 물을 붓자 증기가 솟아올랐다. 고맙게도 그 열기는 미지근했다. 놀 거 다 논 서양 친구들이 이국의 음식으로 여행의 흥취를 누리는 동안 뿌연 한증막 속에서 알몸으로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는 기분이 국제적으로 외롭고 쓸쓸하니 좋았다.


스팀 사우나를 마치고 마당으로 나서자 식사를 마친 친구들이 기다렸다는 듯 야외에 놓인 욕탕 사우나로 뛰어들었다. 아까 한참 몸을 담갔다는데 그걸로는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현지식의 전통 사우나 기법을 시연하는 르마시를 따라 사내들은 몽땅 벗었고, 부끄러움을 어쩌지 못하는 여자들은 수영복만 남겼다. 욕조 안에서 술도 몇 순배 돌았다. 몸이 그새 더워졌다면서 쌍방울을 덜렁거리며 호수로 뛰어드는 사내들의 피부가 달빛을 받아 탄력 있게 빛났다. 그에 질세라 수다의 운율에 맞춰 몸을 뒤채는 여자들의 피부도 잉어처럼 번득였다. 그 밤에는 모두가 예외 없이 자연이었다. 우리가 나무이자 숲이었다.


인디언 텐트 안에서 벌어진 한식 만찬, 타르투 카운티, 에스토니아




# 글로벌 사진 프로젝트 <I am a forest>


12th 퍼포머

: Lomas Kama


- 국적: 에스토니아

- 촬영지: 타르투 카운티, 에스토니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 낯선 여행자에게서 SNS로 메시지 한 통을 받았다. 에스토니아에서 유학 중인 한국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녀는 르마시의 집에서 카우치서핑으로 머문 사연을 소개했다. 내 얘기도 나누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데 르마시가 한국인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품고 있다고 했다. 내가 방문했을 당시 휴식년을 누리고 있던 르마시는 최근 에스토니안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해 제품 디자인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문화예술에 대한 애착이 고스란히 스며 있는 감각적인 르마시의 일상을 바로 곁에서 확인했기에 그 소식을 전해 듣는 기분이 흡족했다.



13th 퍼포머

: Karolin Kull


- 국적: 에스토니아

- 촬영지: 타르투 카운티, 에스토니아


이제 막 성인이 된 카롤린은 뜻 밖으로 차분하고 성숙한 모습을 자주 드러냈다. 사려 깊은 태도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 임하는 모습 역시 인상적이었다. 그랬던 그녀가 호들갑을 떤 적이 한 차례 있다. 내가 만든 떡볶이를 먹고 난 직후였다. 음식 맛에 잔뜩 감동받은 표정으로 자신이 지금껏 먹어 본 수프 중 최고의 맛이라고 극찬했다. 잘못 만들어서 수프처럼 돼 버렸고 오리지널과도 맛이 조금 달랐지만 그런 얘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당시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있었던 카롤린은 최근 미국의 디자인 명문인 로드아일랜드 대학교에 진학했다. 인테리어 디자인을 선택했다는 소식이다. 



14th 퍼포머

: Julia


- 국적: 러시아

- 촬영지: 타르투 카운티, 에스토니아


여행 동료인 키릴과 함께 히치하이킹으로 유럽을 횡단하고 있던 율리아는 어학연수를 위해 한국에서 체류한 경험이 두 차례나 있다. 자필 메시지 위에 보이는 '나는 숲입니다'라는 문구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적었다. 한국에서 멋진 추억을 많이 만들었는지 나와 대화를 나눌 때마다 한국에 대한 애정을 한껏 표현해 왔다. 실력이 아직 많이 부족해 한국어를 입에 올리기가 부끄럽다기에 다른 친구들이 보지 않을 때 율리아에게 한국어로 이따금 말을 걸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조심스럽게 대답을 내뱉을 때마다 율리아의 광대뼈 위에서 뿌듯해하는 감정이 진하게 피어났다.



15th 퍼포머

: Kirill


- 국적: 러시아

- 촬영지: 타르투 카운티, 에스토니아


율리아와 한 팀을 이뤄 히치하이킹 여행을 하고 있던 키릴은 담배를 뻐끔뻐끔 아주 잘 피웠다. 담배뿐만 아니라 술도 아주 잘 마셨다. 보드카로 인생을 단련한다는 러시아인다웠다. 흡연에 심취해 있는 모습이나 병맥주를 손에 쥐고 걷는 모습으로만 보면 예의 투박한 러시아 사내들과 비슷했지만 그 외의 상황에서는 친절하고 부드러운 모습도 자주 드러냈다. 키릴은 심부름이나 허드렛일을 아주 잘하는 편이었다. 르마시의 집이나 사우나 기행에서 분주한 상황이 벌어지면 한걸음에 달려와 험한 일들을 해결하곤 했다. 키릴에게서 든든한 느낌을 자주 받았던 이유다.



16th 퍼포머

: Ben Mayer-Goodman


- 국적: 캐나다

- 촬영지: 타르투 카운티, 에스토니아


벤은 희극적인 성향의 소유자였다. 바라보기만 해도 유쾌할 때가 많았다. 성격 또한 명랑하고 소탈했다. 짧은 대화만으로도 좋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후에 보니 이름에도 'Goodman'이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었다. 사우나 기행에서도 벤은 무척 부지런하게 움직이며 다른 이들의 수고를 덜어내곤 했다. 짐 운반부터 아침 준비까지 매사에 솔선수범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벤이 아침 식사로 준비한 캐나다 식의 스크램블드 에그도 아주 맛있게 먹었다. 사우나 기행을 마치고 작별 인사를 나누면서 벤은 언제든 환영할 테니 토론토에 꼭 놀러오라는 인사말을 남겼다. 



17th 퍼포머

Noelle Solange Didierjean


- 국적: 프랑스

- 촬영지: 타르투 카운티, 에스토니아


캐나다에서 유학 중인 프랑스인 노엘은 인문학적인 소양이 깊었다. 함께한 시간 동안 노엘과 치열한 토론을 자주 벌였던 이유다. 철학의 나라인 프랑스 출신답게 내 발언에서 의문점을 발견하면 놓치지 않고 반격을 해 왔다. 물론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며 벌인 토론이었기에 감정적인 소요가 발생하는 일은 없었다. 사우나 기행 중에 개인 시간을 이용해 작은 방의 침대 위에서 고요한 표정으로 혼자 독서를 하던 노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에 손을 얹으며 그렁그렁한 눈으로 작별의 아쉬움을 표현해 오던 노엘을 바라보다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울컥 치밀기도 했다. 



18th 퍼포머

: Eva Maria Shepel


- 국적: 에스토니아

- 촬영지: 타르투 카운티, 에스토니아


카롤린이 또래의 외국 친구들과 함께 사우나 기행을 간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 나온 에바. 대학생이라기에 전공을 물었더니 비올라를 전공했다가 성악으로 바꿨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정수리를 뚫고 올라오는 하이톤의 음색으로 미루어 음역대는 소프라노인 듯했다. 발성 연습을 열심히 해 왔는지 에바의 목소리는 아주 맑고 깨끗했다. 웃기도 아주 잘 웃었다. 사소한 일에도 자지러지기 일쑤였는데 그녀가 선홍빛 잇몸을 드러내며 깔깔거릴 때마다 자일리톨을 귀로 씹은 것처럼 관자놀이 주변이 시원해지곤 했다. 노래를 불러주면 안 되겠느냐고 여러 번 보챈 기억이 나는데 그녀가 노래를 했던가, 안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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