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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Jan 01. 2019

5. 자연은 그 자체로 완벽한 것_카스무, 에스토니아

레고랜드는 왜 숲을 파괴하려 하는가

카스무, 라헤마 국립공원, 에스토니아




그림 같은 전원 마을이 화사한 표정으로 나를 맞이했다. 탈린에서 한 시간 거리의 라헤마 국립공원에 자리한 아담하고 평화로운 마을 카스무. 목재 가옥들이 여유로운 간격으로 서 있는 마을 풍경도 아름답지만 그 뒤로 펼쳐지는 울창한 삼림은 더욱 아름답다며 메릴린이 적극적으로 추천한 곳이었다. 여행자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지역이라고 했는데 가서 보니 현지인 방문자도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마을을 나 혼자 독점하고 있는 듯했다.


같은 시각, 한국에서는 동료 예술가들이 준비한 야외 축제가 한창이었다. 춘천 중도에 레고랜드를 건립하면서 그 곁에 자리한 작은 무인도의 숲을 벌목하려는 개발 주체의 움직임에 분개한 동료 예술가가 섬 위에서의 축제를 기획했다. 뜻을 함께하는 예술가들이 저마다의 재능을 동원해 축제에 활기를 불어넣기로 했다. 나 역시 참여를 권유받았는데 축제가 열리는 기간에는 여행길 위에 있는 상태라 직접적인 참여는 어려웠다. 작품으로라도 힘을 보탤 요량으로 사진 몇 점을 추려 동료 작가에게 현장 설치를 부탁해 두었다.


작품을 현장에 보냈으니 내 할 일은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여행길에 오르려고 하니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말 한마디 못하고 잘려나가는 나무들의 처지도 안쓰러웠지만 거대 권력의 횡포로 날마다 무릎이 꺾이는 우리 미생들의 신세도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축제를 위해 길 위에서 추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는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숙고 끝에 세계인들이 숲 보호의 염원을 자필 메시지로 적어 피케팅 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 ‘I am a forest’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I am a forest’라는 문구에는 ‘사람과 자연은 하나다’라는 의미를 담았다. 숲이 처한 위기를 알리기 위한 프로젝트지만 황폐해져 가는 인간관계와 소외의 문제도 아우르고자 했다. 숲의 위기는 숲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단절이 숲의 위기를 불렀다.


비단 한국만의 일이 아니었다. 지구의 허파라는 아마존과 시베리아의 광대한 삼림 그리고 지구상의 크고 작은 숲들이 끊임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아마존을 여행할 당시, 무분별한 벌목의 여파로 헐벗은 땅이 그대로 드러난 구간들을 계속 마주치면서 답답한 심정을 억눌렀던 기억이 여전했다. 지상 최고의 숲을 만나러 간 길에서 벌거벗은 밀림을 통과하는 기분이 암담했다. 환경운동가도 아닌, 그저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 개인인 나조차 그런 심정을 느낄 정도로 숲의 위기는 심각했다.


무분별한 벌목 현상의 이면에는 생명 학대, 자기 방치의 원리가 자리잡고 있었다. 수많은 이들이 오늘의 이익에만 급급한 나머지 자신들의 요람, 더 나아가 우리 모두의 생명의 터전인 대자연을 스스로 파괴하는 중이었다. 산과 바다가 뒷걸음질 치는 만큼 우리 안의 생명심도 잦아들었다. 재앙은 자연 대 인간의 관계에만 머무르지 않고 인간 세계 깊숙한 곳까지 넘어왔다. 관계가 무수히 단절되면서 결국 고립이 일상화되기에 이르렀다. 말끔한 겉모습과는 달리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이들이 잔뜩이었다. 처음에는 멀쩡한 척하다가 나중이 되어 텅 빈 삶을 호소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한 현상의 어딘가에 숲 파괴 문제가 닿아 있을 터였다.


재난으로 인해 부러진 나무. 재앙의 여파를 혼자 짊어지지 못하고 주변의 나무들로 옮기고 있다. - 카스무, 라헤마 국립공원, 에스토니아


죽기 전에 세상을 위해 좋은 일 한 번은 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이 세계의 구성원으로서 최소한 내 몫만큼의 역할은 하고 싶었다. 키 작은 소시민이니 역사에 이름을 새긴 이들 만큼 멋진 일을 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또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예술가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지를 이따금 고민했다. 우열의 논리, 규모의 경제, 성과주의를 앞세운 당대의 지배 논리에 힘을 보태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가치가 잠식한 이 세계의 목덜미에 의문 부호를 꽂는 것이 예술가에게 주어진 사회적 역할이라는 판단에 도달했다. 여행을 앞두고 축제를 위해 추가로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다가 ‘I am a forest’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결행을 마음먹었다. 성과의 크기에 연연하기보다는 소기의 방향에 맞춰 묵묵히 나아가기로 했다. 내 안의 자연성을 얼마나 되살릴 수 있는지, 그 결과를 얼마나 실천적으로 여행길 위에서 옮길 수 있는지가 프로젝트의 성패를 가늠할 것이었다.


여행 시작일부터 축제 개최일까지 주어진 기간은 열흘. 세계인들을 부지런히 만나 한국에서 벌어지는 무분별한 벌목의 실태를 설명하고 그들의 지지 메시지를 담은 사진을 찍어 바로바로 한국으로 보냈다. 사태는 국내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벌목의 주체가 글로벌 기업인 레고이니 한국만의 일도 아닐 것이었다. 열흘 간 프로젝트에 참여한 이는 첫 주자인 지미를 포함해 총 11명. 사전에 국내에서 전시를 부탁한 몇 점의 작품들과 함께 ‘I am a forest’ 연작 11점까지 동료 예술가가 모두 인화해 축제장에 잘 걸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카스무에 방문한 날은 한국에서 축제가 벌어진 당일이었다. 마음으로 마나 축제에 함께하기 위해 일부러 축제 개최일을 선택해 카스무를 방문했다. 몸은 해외에 있지만 작품들을 축제장에 내건 만큼 행사의 일원으로서 남은 책임을 다하고 싶었다. 이날 하루 만큼은 숲의 정기를 한껏 들이마시며 자연의 소중함을 깊이 되새기기로 했다. 숲 지대의 한 복판에서 축제의 성공적인 개최도 기원하고 싶었다. 의미 있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대자연을 관객으로 삼아 숲 한가운데에서 퍼포먼스를 벌여야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천혜의 환경 속에서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 카스무는 그러기에 제격의 장소였다.


카스무, 라헤마 국립공원, 에스토니아


물어 물어 찾아간 카스무는 메릴린이 설명한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고운 빛깔의 수채화를 연상시키는 한갓진 마을의 정취는 말할 것도 없고 주변과 조화를 이룬 예쁜 가옥들 역시 근사한 모습으로 반짝였다. 전원주택 단지라는 이름으로 급조된 공간에서 흔히 보이는 인공미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었다. 라헤마 국립공원의 자랑인 숲 지대는 그보다 더 아름다웠다. 거대한 삼림 안에 수십 미터 높이의 적송이 지천이었다. 일자로 쭉 뻗은 나무들의 나란한 도열이 일대 장관을 연출했다. 그야말로 숲 다운 숲이 온 공간을 가득 채웠다.


숲 지대를 가로지르는 15km 길이의 트레킹 코스가 눈에 띄기에 신발끈을 고쳐 맸다. 길은 발트해에 면한 해변 탐방로와 거대한 적송들로 가득한 삼림 구역을 골고루 지나쳤다. 해변 탐방로를 걷는 동안에도 곁으로는 잘 빠진 적송들이 병풍처럼 흘렀다. 바다 건너로 보이는 저쪽 숲 지대의 모습도 훌륭했다. 침묵만이 감도는 고요한 발트해의 비경과 아름드리나무들이 빚어내는 신묘한 서정 속에서 풍경의 일부로 존재하는 기분이 아주 흡족했다.


숲 지대의 한 복판에서 퍼포먼스를 벌이려던 계획은 접기로 했다. 마주치는 이도 없으니 무슨 짓이든 해도 상관없겠지만 숲 다운 숲의 스펙타클 앞에서 뭘 더 할 게 있을까 싶었다. 이 천연의 공간에서 인간이 머리를 굴려 하는 일이 그리 훌륭할 리 없었다. 웅장하게 펼쳐진 진짜 숲의 한가운데에서 창작을 핑계로 경망스럽게 굴 수는 없는 일. 자연과 일체를 이루지 못한 채 머리로 행한 짓이 이 완벽한 공간에 누를 끼칠 듯했다. “나는 숲이다”라고 외치기에 라헤마 국립공원은 너무도 장엄했다. 자연과의 진지한 교감 하나면 충분할 듯했다.


그냥 걸었다. 숲길을 흘러 다니며 맑은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고, 더러는 한 자리에 서서 자연이 부리는 오묘한 조화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한국에서의 행사가 성공적으로 진행되기를 기원했다. 에스토니아는 한낮이었지만 한국은 자정을 지날 무렵이었다. 행사에 참여한 예술가들은 이제 술잔을 기울이며 행사를 정리하고 있을 것이었다. 아름다운 풍경으로 가득한 대자연의 보고를 거니는 동안 가슴이 빵빵해졌다. 산소를 가득 채운 심장 안에서 부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스무, 라헤마 국립공원, 에스토니아


카스무, 라헤마 국립공원, 에스토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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