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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Dec 31. 2018

4. 선순환하는 우정의 조건_탈린, 에스토니아

보헤미안들과 함께한 사나흘

탈린, 에스토니아




메릴린이 제초기의 연료 투입구를 열었다. 무성해진 마당의 잡초를 정리하려는 모양이었다. 나에게 숙박을 제공한 탈린 현지의 카우치서퍼 메릴린은 널찍한 마당이 딸린 이층짜리 목재 가옥에서 살고 있었다. 낡은 집이었지만 걸음마다 새어 나오는 거실 마루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포근한 질감으로 갈빗대를 자주 튕겨왔다. 거실의 한쪽 면에는 벽난로가 붙박이식으로 달려 있었는데 겨울마다 엄청난 화력을 뿜어낸다고 했다. 시원스럽게 펼쳐진 마당에는 잔디와 잡초가 뒤섞여 자라고 있었다. 메릴린이 제초기를 꺼낸 이유였다. 세월을 머금으면서 그 외관이 짙은 밤색으로 변한 원목 창고가 마당에 운치를 더했다.


제초기를 매만지는 메릴린에게 현지 문화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경제, 복지, 주거환경, 건강보험 등 에스토니아의 사회적 현안에 대한 현지인의 견해가 궁금하던 차였다. 메릴린도 한국의 사정이 궁금했는지 다양한 질문을 나에게 던졌다. 공산주의 시대에 태어나 사회가 격변하는 과정을 직접 체험한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에스토니아는 공산주의 시대를 마감하고 시장경제 체제에 돌입하면서 국가 전체에 많은 변화가 잇따랐다. 문호 개방으로 얻은 것도 많지만 그만큼 잃은 것도 많았다. 그중에서도 메릴린은 인간성 상실을 최악의 결과로 꼽았다. 시장 경제가 가속화되면서 주거비가 급격히 상승하고 있는 점도 큰 문제로 지적했다.


생계유지를 위해 여행사에서 일하는 메릴린은 자유로운 삶을 마음 깊이 갈망했다. 기복 없는 태도로 직장 생활에 임하는 것과는 별개로 마음이 늘 나라 밖을 떠돌았다. 보헤미안의 피가 혈관을 타고 흐르는 까닭에 집에서만큼은 늘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였다. 그녀가 선호하는 문화 역시 주류의 지배적 가치 질서와 궤를 달리하는 독립 문화 혹은 대안 문화였다. 공동체 실험, 장르 혁신, 성 혁명, 거리 예술, 복합 문화 공간 등의 장치를 앞세운 대안 문화의 특징을 통해 그녀의 감성적 취향을 읽을 수 있었다. 탈린에 도착한 당일 저녁, 메릴린을 만나 그녀의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함께 올랐을 때 그녀는 탈린에서 가장 구경하고 싶은 게 뭐냐고 나에게 물었었다. 탈린의 대안 문화가 궁금하다고 대답했더니 메릴린은 반색을 표하며 차창 밖으로 대안 문화 구역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그 이력을 조목조목 설명해 주었다. 


메릴린의 집, 탈린 외곽, 에스토니아


메릴린의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녀의 룸메이트가 우리를 반겼다. 그녀와 비슷한 성향의 모로코 출신 사진작가 타릭이었다. 초대형 수세미 뭉치를 연상시키는 지미 헨드릭스풍의 아프로 헤어와 다채로운 원색 조합의 에스닉한 옷차림으로 나를 맞이한 그는 인사를 나누기가 무섭게 자신이 하고 있던 일로 다시 관심을 옮겼다. 그럼에도 무례하거나 매정한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내가 곁에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인상이었다. 내가 질문이라도 할라 치면 그는 한창 할 일을 하는 와중에도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려 느긋한 목소리로 성실하게 답변을 했다.


메릴린에게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탈린에서는 대안 문화 탐방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젊은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의 캔버스로 변모한 공산주의 시절의 대형 구조물, 공포 정치의 부속 장치로 기능하다가 자유주의의 도래로 폐허로 변한 교도소, 예술가들이 주축이 되어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는 복합 문화 공간까지 메릴린의 추천 장소들을 하루에 두세 곳씩 탐방했다. 아직까지는 대안 문화의 변방에 자리한 탈린인지라 그 양상은 단출한 편이었지만 적극적으로 문화를 파급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들은 보기에 좋았다. 공산주의의 잔흔 위에 덧씌운 개성 있는 시도들이 탈린만의 색채를 빚어내고 있는 듯했다.


파타레이 교도소, 탈린, 에스토니아


일과를 마친 후에는 평온한 시간이 나를 맞이했다. 격의 없고 자유분방한 메릴린과 타릭 덕분이었다. 형식적인 예의는 배낭에 쳐 박아 둬도 상관없었다. 부지런히 도심을 구경하고 돌아온 저녁에는 몸이 노곤해지기 일쑤였는데 예의 차린답시고 옷매무새를 고치며 꼿꼿한 자세를 유지할 필요가 없었다. 이야기라도 나눌라 치면 메릴린이 잠자리로 내 준 소파 위에 몸을 누인 채 대화에 응했다. 내가 그러건 말건 그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보헤미안들 사이에서 예의에 대한 담론은 가장 촌스러운 주제에 속했다. 서로 편안하게 지내면서 상대에게 진심을 다하면 그걸로 족했다.


하루 일정을 마무리한 내가 집으로 들어서면 타릭은 기다렸다는 듯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자신이 마시려고 사 둔 맥주였으나 현지 맥주값이 싸다며 아낌없는 배려를 퍼부었다. 저녁마다 맥주를 사이에 두고 타릭이 찍은 사진과 내가 찍은 사진을 서로 구경했다. 타릭의 사진은 색감이 깊고 풍부했다. 느긋하고 여유로운 평소의 모습과는 달리 치열한 감성이 은근하게 배어 있었다. 내 사진과는 스타일이 달라 많은 영감을 얻었다. 


두 사람의 호의에 힘입어 걱정 없는 나날을 보냈지만 그래도 남의 집이었다. 소탈하고 격의 없는 그들의 태도와는 별개로 신세를 지고 있다는 자각에서 오는 부담감을 떨치기가 어려웠다. 카우치서핑은 배낭 여행자들 사이에서 숙박비 절감을 위한 용도로도 자주 시도되고 있었다. 나 역시 숙박비 절감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카우치서핑을 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막상 일방적인 수혜만 누리면서 머물고 있자니 마음이 불편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은근히 눈치를 보고 있는 내 모습을 날마다 맞닥뜨렸다.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입장에서 당당하게 행동하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고심 끝에 카우치서핑에 임하는 방법을 조정하기로 했다. 카우치서핑 덕분에 아낀 숙박비를 호스트에게 쓰기로 말이다. 공평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내가 호스트여도 푼돈에 연연하며 눈치 보기에 바쁜 게스트보다는 당당하게 행동하면서 호의에도 아낌없이 보답하는 게스트가 더 반가울 듯했다. 예민한 내 상태가 상대마저 예민하게 만든 일이 그동안 없지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내가 거리낌 없이 행동하면 상대가 편안한 마음으로 나를 대했다. 그러면서 관계가 선순환했다. 두 사람과 기분 좋게 소통하려면 스스로 위축되지 않을 환경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 편이 우리 셋 모두에게 이로웠다.


일과를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슈퍼마켓에 들렀다. 첫날 저녁에 메릴린이 현지 가정식을 만들어 주었으니 이번에는 내 차례였다. 할 줄 아는 요리는 별로 없었지만 뭐라도 만들어 대접하기로 했다. 기왕이면 한식이어야 할 텐데 요리 경험이 일천한 데다가 한식 재료를 찾기도 쉽지 않아 진열대에 줄줄이 늘어선 식재료들 앞에서 저녁 메뉴 선정에 골머리를 싸매야 했다. 그렇지만 행복한 마음이 훨씬 더 컸다. 발바닥이 아파올 정도로 열심히 매장을 돌아다니며 저녁 메뉴를 고민했다. 최종적으로 정한 메뉴는 영양 수제비. 조갯살이며, 맛살이며, 밀가루며, 각종 야채에 이르기까지 필요해 보이는 재료는 돈을 아끼지 않고 모두 거둬들였다. 


긴 시간을 들여 완성한 수제비의 모양새는 제법 그럴싸했다. 몸에 좋은 재료를 잔뜩 집어넣은 내 나름의 특선 요리. 한국에서 먹던 수제비에 비해 때깔도 훨씬 좋았고, 맛도 그만하면 나쁘지 않았다. 메릴린도 흡족해하는 눈치였다. 서툰 솜씨로 반죽을 빚고, 칼질을 하고, 재료를 버무리느라 고생스러웠지만 그 덕분에 소박한 한국 밥상을 메릴린에게 대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음식을 대접하고 나자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그들의 배려에 적극적으로 보답하고자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여 나갔다. 그럴수록 관계는 점점 더 윤택해졌다. 잠자리를 내주고, 현지 정보를 꼼꼼히 알려 주고, 음식도 나눠 주고,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호의를 베풀어 준 두 사람에 대해 감사의 마음도 더욱 깊어졌다. 낡은 목재 가옥 안에서 우정이 날마다 활기차게 순환했다.




# 글로벌 사진 프로젝트 <I am a forest>


10th 퍼포머

: Tarik


- 국적: 모로코

- 촬영지: 탈린, 에스토니아


타릭은 탈린에 거주하는 모로코 출신의 사진작가다. 그의 사진들을 구경했는데 멋진 작품들이 많았다. 특히 색감이 깊고 풍부했다. 느긋하고 여유로운 성향의 타릭은 게더링 문화를 즐기는 보헤미안이기도 하다. 자연성의 회복을 추구하는 이답게 주변의 모든 요청에 적극적으로 응하면서도 서두르는 일이 없었다. 신경이 날카로워지거나 불안해하는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타릭을 바라볼 때마다 제주도에 거주하고 있는 몇몇 동료 예술가들의 모습이 떠오르곤 했다. 그들 역시 평화로운 삶을 즐겼다.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타릭에게서 친밀감을 느꼈던 이유다.



11th 퍼포머

: Merilin Sepp


- 국적: 에스토니아

- 촬영지: 탈린, 에스토니아


카우치서퍼인 메릴린의 집에서 여러 날을 묵었다. 강력한 화력의 벽난로가 설치된, 낡았지만 아늑한 그녀의 집에서 현지 음식과 한국 음식을 번갈아 요리해 서로에게 대접했다. 맛있는 음식을 나누고 나면 마음도 더불어 풍족해졌다. 식사를 마친 저녁 그녀를 사진 찍었다. 셔터를 누르기 직전 메릴린에게 물었다. "Who are you?" 메릴린이 대답했다. "I am a forest." 사람과 자연은 다르지 않음을 일깨워주는 목소리. 프로젝트의 취지에 걸맞게 메릴린은 예쁜 꽃들이 잔뜩 프린팅 된 원피스를 촬영 의상으로 골랐다. 내가 셔터를 누르는 동안 그녀의 눈동자에서 나비가 날고 새들이 노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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