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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Dec 30. 2018

3. 축복받은 유년, 그늘 없는 품성_탈린, 에스토니아

이토록 극적으로 활기찬 생명체라니

카드리오루 공원, 탈린, 에스토니아




망망한 발트해를 가로질러 온 페리가 항구에 도착했다.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이었다. 지미가 내 카우치서핑 계정에 방명록을 적어 준 덕분에 탈린에서도 카우치서핑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호스트를 만나려면 퇴근 시각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배에서 내려 시계를 보니 정오. 약속 시간까지 반나절 이상이 남았기에 시가지를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여객선 터미널 한쪽에 마련된 짐 보관소에 배낭을 맡긴 후, 카메라 가방만 둘러 매고 여객선 터미널을 빠져나왔다.


몇 발짝 걷지도 않았는데 항구 주변으로 펼쳐지는 이국적인 풍경들이 눈길을 잡아끌기 시작했다. 마음이 꽤 술렁이기에 부둣가의 한쪽 어귀에 가만히 멈춰 섰다. 시야에 들어오는 장면들을 하나씩 음미하며 지역의 내력을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는데 갑자기 씩씩한 목소리 하나가 등 뒤에서 달려들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명랑함과 해맑음을 반반씩 섞은 인상의 청년이 기분 좋은 웃음을 입가에 띄운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관광 인력거 기사라고 소개하며 자신의 인력거로 도심을 구경하라고 권했다. 계획에 없던 일이라 그에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 그러고 나면 보통은 안면을 몰수하며 다른 표적을 향해 걸음을 옮기게 마련인데 그는 밝은 미소를 그대로 유지한 채 다시 내 신상을 물었다. 처음 다가올 때부터 표정과 말투에서 좋은 기운을 느꼈던지라 그의 물음에 친절히 대답했다. 


그로부터 대화가 반 시간 가량 이어졌다. 그도 나를 궁금해했지만 나도 그가 궁금했다. 지구촌의 최고 강대국 미국에서는 중산층이 몰락하고, 극지방에서는 빙하가 녹아내리는 이 엄혹한 21세기에 저렇게까지 싱글벙글거릴 수 있다는 사실이 여간 신기하지 않았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새로이 항구에 도착한 페리가 공사장의 덤프트럭처럼 승객들을 우르르 쏟아냈다. 여객선 터미널을 줄지어 빠져나오는 각양각색의 인파를 향해 그가 이따금 인력거 탑승을 권했지만 애석하게도 순순히 응하는 이는 없었다. 그 역시 영업보다는 나와의 대화에 훨씬 더 집중하는 듯 보였다.


그의 이름은 다닐. 러시아 혈통의 18세 에스토니아 청년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뭘 해야 할지 몰라서 막막해하다가 용돈벌이로 인력거 기사 일을 시작했다는 설명이었다. 본인으로서는 꽤나 답답한 상황일 텐데 그 사실을 전하는 목소리와 표정은 그늘 한 점 없이 맑았다. 영업 결과에는 괘념치 않는 눈치였다. 아직 어린 나이라서 돈벌이에 연연하기보다는 경험을 키우는 게 중요하단다. 그 목소리가 씩씩하고 우렁찼다. 


다닐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학창 시절에 마라톤 선수로 7년간 활동했다. 풀 코스 주자여서 42.195km를 일상적으로 소화하는 생활을 했다. 마라톤으로 단련한 신체가 인력거의 동력이 되어주는 셈이었다. 탈린 시내를 돌아다니는 수많은 관광용 인력거들 중 다닐의 인력거는 리무진에 해당했다. 여러 모로 마음에 드는 구석이 많은 친구였는데 마침 다음날은 일을 쉴 계획이라기에 만나서 같이 시간을 보내자고 제안했다. 다닐 역시 구미가 당겼는지 곧바로 승낙 의사를 밝혔다. 지금껏 여행하면서 관광 인력거 기사와 개인적으로 약속을 잡기는 처음이었다. 그와 나 사이에서 어떤 일이 펼쳐질지 궁금해졌다.


영업을 위해 선의를 가장하는 관광업 종사자를 적잖게 만나 왔다. 그중에는 가면을 완벽하게 숨긴 이도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바꾸기도 했다. 다닐에게서 좋은 인상을 받았지만 그가 약속 장소에 등장할 거라고 장담하기는 아직 일렀다. 더욱이 다닐은 럭비공처럼 튀어도 이상할 게 없는 시절을 살고 있었다. 다음날이 되어 약속 장소로 나갔다. 우려가 적중했는지 약속 시간이 되었음에도 다닐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낯선 관계 속에서도 얼마든지 신뢰의 풍경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 그와 약속을 잡은 것이었다. 약속 시간이 30분을 넘어갈 무렵, 저 발치에서부터 나를 향해 힘차게 달려오는 다닐의 모습이 보였다. 숨 가쁜 표정으로 내 앞에 당도한 그가 말했다. “에스토니아에는 에스토니안 타임이라는 게 있어. 30분 정도는 늦는 게 예의야.”


구시가, 탈린, 에스토니아


신시가, 탈린, 에스토니아


지역 사정이 훤한 다닐이 지역의 볼거리들을 향해 나를 이끌기 시작했다. 현지인을 앞세워 도시를 누비다 보니 탈린의 인상이 전날과는 또 다르게 느껴졌다. 한층 더 친숙해진 느낌이랄까. 현지의 생활상도 어렴풋이 보이는 듯했다. 소비에트풍의 낡은 경관을 떠올리며 탈린에 발을 내디뎠더랬다. 그러나 탈린의 발전상은 예상보다 눈부셨다. 새로 지은 서구식 대형 건물들이 도심의 중앙에 꽤 많이 솟아 있었다. 헬싱키에 비하자면 다소 소박한 양상이었지만 현대 도시로서의 풍모를 과시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개발주의 광풍이 불어닥쳤음을 알려 주는 광경이었지만 역사와 문화를 보존하려는 당국의 의지도 곳곳에서 보였다. 은빛으로 번쩍이는 상업 빌딩들 사이사이에서 낮은 음성으로 역사를 증언하는 오래된 벽돌 건물들이 마음을 푸근하게 했다. 그 주변을 지나다니는 시민들의 소박한 차림에서도 지역색이 물씬 풍겼다. 다닐과 같이 시내를 누비는 동안 일상적인 풍경들이 전날보다 더 선명하게 시야로 스며들었다. 


전날에도 씩씩하고 명랑하기 이를 데 없었던 다닐은 이날도 같은 모습으로 도심을 누볐다. 낯선 이들에게 덥석덥석 말도 잘 걸었다. 어찌나 거침없이 말을 걸어 대는지 곁에서 지켜보는 마음이 조마조마할 정도였다. 내가 종이 몇 장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전했을 때도 다닐은 햄버거 전문점의 주문 카운터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서 종이를 얻어다 주었다. 필요하거나 궁금한 게 있으면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모습이 역동적이다 못해 신비롭기까지 했다. 그의 사전에 망설임은 없었다. 쉴 새 없이 뿜어내는 생동감이 놀라웠다. 참으로 오랜만에 만나는 극적으로 활기찬 생명체였다.  


약동하는 태도의 근원은 그의 이력에서 찾을 수 있었다. 다닐은 에스토니아의 시골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풍요로운 자연을 간직한 에스토니아에 살고 있어서 자신은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인위적인 정서가 담겨 있지 않았다. 현란한 물질문명 아래로 독성을 숨긴 도시와 달리 자연의 기운으로 가득한 전원 지대에서 나고 자란 덕분에 윤택한 성품을 유지할 수 있는 듯했다. 솔직하면서도 활기차고 도전적인 그 모습에서 일정한 균형감이 느껴졌다. 남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다닐의 내면에는 이렇다 할 컴플렉스도 없는 듯했다. 성장기에 흔히 발생하는 억압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풍요로운 자연이 성장기에 미치는 영향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다닐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많은 생각을 했다. 축복받은 유년기를 보냈다고 설명하는 다닐의 모습이 싱그러운 한 그루 나무를 닮았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이제 막 성인의 세계로 들어선 다닐은 그만큼 세상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다. 아시아를 장기 여행하고 싶다기에 그동안의 여행 경험과 정보를 공유해 주었더니 덕분에 많은 영감을 받았다면서 함께한 시간에 감사를 표했다. 그 목소리가 담백하면서도 겸손했다. 물론 나에게도 다닐과의 시간은 특별했다. 영감도 많이 받았다. 모든 것에 신기해하고 사소한 일에도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다닐의 모습이 쉴 새 없이 나를 자극해 왔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푸른 나무 한 그루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싱글벙글 걸음을 옮기는 내 이마 위로 완충 신호가 깜빡였다.




# 글로벌 사진 프로젝트 <I am a forest>


7th 퍼포머

: Elina Holley


- 국적: 핀란드

- 촬영지: 헬싱키, 핀란드


거리에서 만난 핀란드 디자이너 엘리나. 길모퉁이에 앉아서 벽화를 그리고 있기에 불쑥 다가가 현지 서브컬처의 동향을 물어보다가 대화가 길어졌다. 사회 참여의 일환으로 휴일마다 동료 디자이너들과 함께 구역을 나눠 벽화 작업을 한다고 했다. 핀란드에서는 흔한 일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사회 전반에 문화 생태계가 안정적으로 구축되었기에 가능한 일인 듯했다. 살아남기가 문화예술인들의 지상 과제인 대한민국과는 그 현실이 많이 달라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대화의 마지막 지점. 벽화 작업에 사용하고 있던 붓과 물감으로 메시지를 적은 엘리나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 앞에 섰다.



8th 퍼포머

: Changwon Lee(이창원)


- 국적: 대한민국

- 촬영지: 헬싱키, 핀란드


북을 치고 대금을 연주하는 국악인 이창원은 멋지게 생긴 대금 하나를 들고 1년 예정으로 세계 여행을 하는 중이었다. 직업인으로서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두고 있었으나 과도한 스케줄에 잔뜩 지쳐버린 그는 고심 끝에 주변을 정리한 후 대금을 배낭에 꽂고 여행길에 올랐다. 핀란드로 넘어오기 전에는 러시아를 여행했다는데 현지인들에게서 수많은 호의를 입었다고 했다. 실력 있는 국악인답게 러시아 현지에서 거리 공연도 몇 차례 펼쳤다는 것 같다. 양팔을 걷어붙이고 촬영에 응해 준 그에게 아름드리 숲처럼 울창한 모습으로 귀국하길 바란다는 말을 전했다.



9th 퍼포머

: Daniil Andrianov

- 국적: 에스토니아

- 촬영지: 탈린, 에스토니아


용돈벌이인 관광용 인력거 기사 일 외에 다닐은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담은 액세서리를 만들어 인터넷에서 판다. 현지 음악인들과 함께 밴드 활동도 펼치고 있다고 했다. 역동성과 창의성을 조화롭게 발현하는 그 모습 뒤에는 풍요로운 자연과 함께한 유년 시절이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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