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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Dec 29. 2018

2. 사람으로 숲을 이루는 꿈_헬싱키, 핀란드

사람으로 인한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할 것

헬싱키, 핀란드


우스펜스키 대성당, 헬싱키, 핀란드




내 생애에 처음 맞이하는 묘연한 여름 날씨가 세상을 덮쳤다. 햇볕이 내리쬐면 피부가 따갑다가 잠시 드리운 구름 아래로 바람이라도 불면 점퍼를 입어야 할 만큼 날씨가 쌀쌀해졌다. 그런 와중에 시야는 또 얼마나 깨끗한지 만물이 선명한 빛깔과 형상으로 일제히 기립하는 장면들에 감탄을 거듭했다. 외출을 할 때마다 가을용 점퍼를 챙겼고, 날씨가 재주를 부리기 시작하면 점퍼를 꺼내 입었다. 그러다가 태양이 다시 정수리를 뜨겁게 쪼아 대면 얼른 벗어 가방에 넣었다. 착용과 탈의를 반복하는 사이, 말끔하고 정갈한 북유럽의 풍광이 내 앞으로 쉴 새 없이 흘렀다. 인상적인 여름, 기록적인 장면들이었다.


지상 최고의 복지 국가라고 해 단정한 차림의 시민들이 가지런한 몸가짐으로 거리를 오가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내 눈이 가장 선명하게 포착한 것은 실로 파격적인 비주얼들이 도심 곳곳을 장악하고 있는 광경이었다. 라이딩 재킷을 입은 닭벼슬 머리 총각이 자전거로 거리를 가로질렀고, 안면 곳곳에 피어싱을 한 분홍 머리 처녀가 노천카페에서 감수성 만발한 표정으로 책을 읽었다. 대걸레보다 긴 턱수염 아래로 문신이 잔뜩인 장발 아저씨는 공원 그늘 아래에서 한가로이 낮잠을 잤다. 한국에서 난다 긴다 하는 비주얼을 일거에 키 작은 꼬마로 만들어 버리는 풍경들. 표현의 자유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널리 이루고, 그것을 다시 성숙하게 정착시킨 핀란드의 사회상이 놀라웠다. 개성 표현의 흔적이라고 해봐야 장발과 수염이 전부인 내 모습을 하루에도 몇 번씩 반성해야 했다.


인상적인 비주얼의 소유자에게 접근해 사진 촬영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멱살이라도 잡힐까 싶어 말을 걸 엄두를 내지 못했다. 시민 의식의 성숙한 단면을 보여주는 풍경인 만큼 대다수가 점잖게 반응하리라 생각했지만 적극적인 개성 표현은 곧 불량한 성품을 의미한다는 내 안의 낡은 도식이 매번 용기를 꺾었다. 붉은 외관과 푸른 지붕이 대비를 이루는 우스펜스키 대성당, 바위를 깎아 만들었다는 템펠리아우키오 교회, 자작나무 숲이 풍요롭게 우거진 시벨리우스 공원, 출렁거리는 발트해의 바로 곁에서 다채로운 소품과 길거리 음식이 운치를 돋우는 마켓 광장도 훌륭했지만 나를 가장 압도한 광경은 시가지 곳곳에서 쉴 새 없이 마주친 파격적인 비주얼의 물결이었다. 수백 명의 마릴린 맨슨과 뷔욕과 데이빗 보위와 레이디 가가와 이외수가 도처에서 아무렇지 않게 출몰하는 상황이 그저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그 무렵, 현지에 거주하는 카우치서핑 멤버들이 도심의 한 공원에서 펼쳐지는 야외 음악 축제로 소풍을 간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지미 이후 이렇다 할 만남이 없었다. 체류 중인 호스텔에서 몇몇 친구와 대화를 나눴고, 그중 캐나다 여행자 하나와 호의적인 관계를 만들었으나 그가 신용카드를 분실하면서 상황이 틀어졌다. 그동안 여행을 하면서 도난 사고를 여러 번 경험한 터라 그가 느낄 공황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해서 외출을 미루고 그를 돕고자 했다. 이전의 사고들에서 절실히 느낀 바, 혼자서 불안에 휩싸여 있는 것보다는 누가 옆에 있는 편이 한결 위로가 됐다. 도울 일이 있으면 돕고 도울 일이 없으면 조용히 그의 곁에 붙어 있으면서 불안을 덜어 줄 참이었다. 그러나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는 냉담한 태도로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도미토리에 함께 묵고 있던 이들 역시 사건의 발생과 동시에 모두 방을 빠져나갔다. 카드를 분실한 캐나다 여행자는 불쾌한 기분을 지우기 위해 방을 바꿨고, 나머지 두 명은 체크 아웃을 했다. 사태 발생 후 예민해진 숙소 측이 내가 머무는 방에 새로운 투숙객을 들이지 않으면서 널찍한 방에 덩그러니 홀로 남았다. 사고에 직면한 동료 여행자를 도우려 한 대가로 4인용 도미토리 단독 격리라는 결과가 돌아온 것이다. 불미스러운 일의 추가 발생을 막으려는 조치인 줄은 알았지만 텅 빈 방의 한복판에서 홀로 표류하는 기분이 유쾌할 리 없었다.


그러던 중 카우치서핑 이벤트 소식을 접했다. 반갑기는 했지만 카우치서핑 요청을 연달아 거절당한 게 불과 며칠 전이라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과거의 언젠가 연이은 거절을 당하면서 생긴 트라우마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중이었다. 상호 나눔이 카우치서핑의 기본 정신이라지만 그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라 기껏 참석했다가 후회만 안고 돌아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기대감을 안고 참석한 여행자들의 모임에서 지루한 시간을 혼자 허우적거리다 돌아온 적이 없지 않았다. 


캐나다 여행자의 신용카드 분실로 숙소에서 관계망을 모두 차단당하면서 자존감도 낮아졌다. 낯선 곳에서 휘몰아친 고립감의 깊이는 지인들과 언제든 맞닿을 수 있는 한국에서보다 몇 배 더 깊었다. 여느 때 같았으면 주도적으로 관계를 만들 생각을 하며 성큼 나섰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와는 거리가 먼 상태였다. 참석 여부를 두고 얼마간 고민을 하다가 참석해 보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사람으로 인해 좌절했으니 사람으로 극복해 보자는 생각이었다. 어렵사리 발걸음을 뗐다. 시간에 맞춰 도착한 약속 장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다가 얼마 후 한 사람이 등장했다. 이벤트 주최자인 안드레아스였다. 이후 하나둘씩 참석자들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서머 뮤직 페스티벌, 헬싱키, 핀란드


축제장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낮은 비탈 아래에 돗자리를 깔았다. 저 밑에서는 도발적인 비주얼의 인디 밴드가 가설무대 위에서 개성 만점의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었다. 그들이 연주를 끝마친 후에도 후속 공연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인디’라는 이름에 걸맞게 다양한 색채로 무장한 밴드들이 순서대로 무대를 달궜다. 때로는 잔잔하게, 때로는 신나게, 밴드마다 고유의 개성을 앞세워 디오니소스의 피를 사방으로 뿌려댔다. 절정의 녹음이 그들을 지원 사격했다. 주말을 즐기러 나온 현지인들의 얼굴에도 산소 같은 미소가 떠돌아다녔다. 날씨도 분위기를 간파했는지 더없이 화창한 표정으로 축제의 분위기를 돋웠다.


이벤트 주최자인 안드레아스가 자신도 사진을 찍는다기에 한국에서 인화해 간 사진을 꺼내 보여 주었다. 그동안의 여행들에서 찍은 사진 일부를 휴대용 규격으로 인화해서 여행길에 올랐다. 개인적으로 뜻깊었던 여행의 순간들을 공유할 목적으로 안드레아스에게 사진을 보여 준 것인데 뜻밖으로 그의 반응이 진지했다. 일부 사진들에는 전문적인 해석을 덧붙이며 엄지를 추켜올렸다. 


곧이어 사진들은 이벤트 참석자들의 손을 타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취향에 맞는 사진이 나올 때마다 그들은 촬영 장소와 당시의 분위기를 물어 왔다. 꽤 반짝거리는 표정들. 사진을 감상하다가 여행심이 자극되었는지 평소 선망했던 여행지를 나열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아졌다. 하여 그들에게 가장 인상 깊은 사진을 하나씩 꼽아 보라고 얘기하고는 각자가 지목한 사진을 선물로 건넸다. 앞다퉈 고마움을 표해 오는 목소리는 물론 듣기에 좋았지만 나누는 기쁨이 그보다 더 훌륭했다. 나눔은 카우치서핑의 기본 정신이었다.


분위기가 괜찮으면 참석자들에게 ‘I am a forest’ 작업을 청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다만 지미 이후 두 번의 촬영을 더 하면서 새로이 깨달은 바가 있어서 관계의 흐름을 침착하게 관망했다. 지미를 포함한 모든 참여자들이 프로젝트의 의미에 공감하며 촬영에 임해 주었지만 관계가 숙성되기 전에 성급하게 촬영을 시도한 감이 있어서 내심 반성을 했더랬다. 의미 있는 성과를 만들기 위해서는 양보다 질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앞으로는 마음을 다해 소통한 후 자연스럽게 관계가 무르익었을 때 촬영을 제안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편이 사람의 관계망으로 숲의 형상을 만드는 프로젝트의 취지에도 부합할 듯했다. 모호했던 프로젝트의 방향성을 조금 더 가다듬은 상태로 현지 카우치서퍼들의 소풍에 참석한 상태였다. 축제를 즐기면서 소통의 결에 집중하는 사이 몇몇 참석자들과의 관계가 쾌속 항진했다. 


소풍이 막바지로 치닫는 지점. 이 정도면 관계의 흐름이 괜찮다 싶어 참석자들에게 프로젝트를 설명하고 동참을 부탁했다. 촬영에 임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이는 세 명이었다. 사이프러스가 고향이라는 이벤트 주최자 안드레아스와 이탈리아에서 온 스테파노, 미국 출신의 제이슨. 셋 다 수년 전 핀란드에 와서 정착한 이민자들이었다. 이방인의 시절을 경험한 때문인지 그들은 핀란드 본토박이 참석자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를 챙기고 있었다.


자필 메시지 작성을 마무리한 그들이 카메라 앞에 섰다. 무슨 일인가 싶었는지 주변의 축제객들이 궁금증 어린 시선으로 우리의 사진 작업을 구경했다. 개인별로 촬영을 한 후 세 친구와 함께 단체 사진도 찍었다. 넷이서 나란히 서 있으니 정말로 숲을 이룬 기분이었다. 작지만 분명한 형상으로 인간 숲이 이루어지는 장면을 직접 확인하는 기분이 뿌듯했다. 어쩌면 의미 있는 프로젝트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 글로벌 사진 프로젝트 <I am a forest>


2nd 퍼포머

: Hien

- 국적: 베트남

- 촬영지: 헬싱키, 핀란드

 

히옌은 학업을 위해 헬싱키에서 거주 중인 베트남 출신의 대학생이다. 울창한 밀림이 장관이었던 베트남에서 왔다고 해 히옌과의 만남이 반가웠다. 깔끔하고 단정한 인상의 소유자인데 얼굴은 드러내기가 민망하다기에 자필 메시지로 얼굴을 가리고 촬영했다. 그 뒤에 히옌의 말간 얼굴이 숨어 있다.



3rd 퍼포머

: Marko


- 국적: 캐나다

- 촬영지: 헬싱키, 핀란드 


호스텔에서 같은 방을 썼던 마르코.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을 듣고는 주저 없이 카메라 앞에 섰던 그는 촬영을 마치고 방으로 복귀한 직후 지갑에서 신용카드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침대 위에 지갑을 그대로 둔 채로 촬영을 하러 나섰다고 했다. 사라진 시점이 언제인지는 분명치 않았지만 촬영 직후의 일이어서 내 입장도 난처해졌다. 다행히도 마르코는 신용카드 정지 등의 일련의 후속 조치를 빠른 시간 내에 해치웠다.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기는 했지만 숲 보호를 기원하는 마르코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풍요로운 숲이 지천인 록키산맥의 나라에서 온 여행자였으니까 말이다.



4th 퍼포머

: Andreas


- 국적: 사이프러스

- 촬영지: 헬싱키, 핀란드


카우치서핑 소풍 모임의 주최자였던 안드레아스는 핀란드에 정착한 이민자다. 핀란드로 건너온 지 7년이 되었다고 했다. 다정하고 온화한 모습으로 나를 반긴 그는 소풍이 끝날 때까지 아주 세심하게 나를 챙겼다. 주전부리를 각자 준비해 와야 한다는 사실을 몰라 빈손으로 등장한 나에게 자신의 몫으로 준비해 온 병맥주를 나눠 주기도 했다. 내가 소풍 모임에 원만하게 녹아들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안드레아스의 끊임없는 친절이 자리하고 있다. 후에 첫 번째 퍼포머였던 지미와 연락을 주고받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안드레아스는 지미와도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5th 퍼포머

: Stefano


- 국적: 이탈리아

- 촬영지: 헬싱키, 핀란드


소풍 모임 내내 스테파노가 베푼 친절도 기억난다. 스테파노 역시 핀란드에 정착한 상태라기에 현지에 대한 궁금증을 이따금 그에게 묻곤 했다. 유희적인 성향이 강한 이탈리아 출신인 데다가 인상마저 개구쟁이 같아서 싱거운 답변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모든 답변이 성실했다. 소풍 모임을 파한 후 그와 함께 공원을 빠져나오는 길에도 스테파노는 작별 인사를 건네고 돌아서는 나를 다시 불러 세워 시내로 되돌아가는 길을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한발 앞선 그의 친절에 가슴이 따뜻해졌던 것 같다. 다정함은 인간 공통의 미덕이라는 사실을 그를 통해 새삼 깨달았다.



6th 퍼포머

: Jason


- 국적: 미국

- 촬영지: 헬싱키, 핀란드


제이슨 역시 핀란드에 정착한 이민자다. 캘리포니아에서 온 사진작가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첫인사 이후 한참 동안 시크한 태도로 일관했다. 차가운 성격의 소유자인 줄 알았는데 <I am a forest> 촬영을 할 때 의외의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카메라를 겨누자 갑자기 수줍어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자신의 세계에 몰두하고 있던 바로 직전의 모습과 너무 상반되기에 속으로 웃음이 났다. 소풍 모임 참석도, 프로젝트 참여도 내면 어딘가에 따뜻한 본성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게다. 그를 촬영하는 동안 "잠들면 모두 착한 사람"이라는 호치민의 말이 머릿속에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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