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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Feb 04. 2019

30. 통념을 부숴야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_티미쇼아라

우리 안의 엄숙주의에 균열 있으라 

아에테르나티브의 전시벽, 티미쇼아라, 루마니아




드디어 소문만 무성하던 드라큘라의 왕국에 발을 들였다. 첫 방문지는 세르비아와 맞닿은 국경 인근의 도시 티미쇼아라. 현지 카우치서퍼와도 연락이 닿아 숙박은 그의 집에서 하기로 했다. 호스트는 헝가리 혈통의 루마니아인 졸리. 첫 대면부터 기분 좋은 표정으로 나를 환대한 그는 내가 가방을 부려 놓기가 무섭게 적극적인 음식 나눔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쉴 틈도 주지 않고 나를 부엌으로 안내하더니만 냉장고며 싱크대며 부엌 곳곳에 놓인 음식을 보여 주고는 원하는 건 무엇이든 먹어도 좋다고 말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때에 맞춰 직접 음식을 권해 왔다. 어찌나 적극적으로 들이미는지 나에게 음식 대접을 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평생을 견뎌 온 사람 같았다. 먹거리는 스스로 해결할 계획이었지만 권해 오는 솜씨가 워낙 좋아 온종일 입에 음식을 물고 있었다. 졸리의 집에서 머무는 내내 식사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고마운 일이었다. 


최근 들어 졸리는 새로운 방향의 삶을 모색하고 있었다. 일상적인 수준을 뛰어넘는 본질적인 변화를 원하는 듯했다. 묘하게도 이번 여행에서는 삶의 변화를 꾀하고 있거나 그럴 필요성을 자각한 이들을 자주 만나고 있었다. 때로는 혼란을 겪고 있었고, 또 때로는 변화를 향해 걸음을 내딛길 주저하고 있었지만 냉정하게 자신의 상태를 짚어낼 수 있는 감각의 소유자들인 만큼 다들 남다른 면모가 있었다. 졸리 역시 개구쟁이 같은 언행 너머로 예리한 시선을 번득이곤 했다.


루마니아의 국토 면적이 꽤 큰 편이라 바삐 움직여야 했다. 때문에 졸리의 집에서는 1박만 하고 다른 도시로 이동하기로 했다. 역대 카우치서핑 중 최단기간.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짧아 형식적인 관계로 그칠 수도 있었으나 오히려 소통의 깊이는 상당했다. 발언의 핵심을 읽어내는 그의 솜씨가 워낙 뛰어난 때문이었다. 부연 설명을 생략하고 골자만 툭툭 던져도 얼마든지 소통이 가능했다. 덕분에 대화가 성큼성큼 나아갔다. 능숙한 행간 읽기의 비결이 궁금했는데 역시나 졸리는 심리학에 관심이 많았다. 손쉽게 발언의 요지를 간파하면서 내가 조금만 에두르면 그 지점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적당한 시각에 잠을 청하려던 계획을 무르고 늦은 새벽까지 목청을 높인 이유였다. 좀 더 길게 체류했다면 굉장한 깊이의 교감을 나눴을 듯했다. 우리 둘 모두 1박은 너무 짧다는 사실에 공감했다. 다음에 좀 더 긴 체류 일정으로 복귀하겠다는 이야기를 작별 인사로 남기고 졸리의 집을 나섰다. 


티미쇼아라에서도 전시를 시도해 볼 생각이었다. 마음에 드는 복합 문화 공간도 하나 봐 두었다. 현지의 힙스터들에게서 가장 호평받는 곳이라는 ‘아에테르나티브’. 이름에서 풍기는 인상으로 보아 독립 예술을 애정하는 공간인 듯했다. 컬처 익스체인지에 이은 또 한 번의 취향 저격. 소문에 이끌려 전날 저녁 방문한 아에테르나티브는 카페 공간, 갤러리 겸 공연 공간, 야외 탁자가 놓인 중앙 마당에 이르기까지 공간의 구성 상태가 아주 훌륭했다. 개성 만점의 동네 청년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시뻘겋게 달아오른 감정을 토해내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운영자와의 접촉을 시도했으나 이미 퇴근한 후였다. 보통 오전에 출근하니 만나고 싶으면 아침에 다시 한번 와 보라기에 알겠다고 대답하고 공간을 빠져나왔다. 그게 바로 전날 밤이었다. 


도시의 중심인 빅토리에리 광장, 티미쇼아라, 루마니아


졸리의 집을 나선 시각은 오전 9시경.  다음 도시로 향하는 버스가 출발하기 전까지 반나절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 전에 모든 일을 마무리지어야 했다. 아에테르나티브를 향해 분주히 걸음을 놀리기 시작했다. 전날 밤 직원에게서 예술 친화적인 공간의 특성과 운영자의 개방적 성향에 대해 전해 들었지만 아직은 아무것도 종잡을 수 없는 상황. 운영자가 나를 반긴다고 해도 공간 자체적으로 예술 프로그램의 가동 계획을 이미 잡아 놓은 상태라면 중간에 끼어들기는 쉽지 않을 것이었다. 전날 보니 한쪽 공간에서 이미 전시회가 진행 중인 듯했다. 


중력의 축을 향해 무겁게 내려앉는 짐 더미를 어르고 달래며 40여 분을 부지런히 걸어 도착한 아에테르나티브의 문은 닫혀 있었다. 중앙 마당에 놓인 탁자에 앉아서 운영자가 등장하길 기다렸다. 불청객 취급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잔뜩 긴장해 있는 내 모습과는 반대로 중앙 마당의 분위기는 상당히 아늑했다. 볕 좋은 봄날이나 바람이 선선한 여름밤에 책 한 권 들고 가서 커피를 홀짝이며 쪽 당 활자의 개수를 헤아리기에 아주 적당한 장소인 듯했다. 얼마 후 낯선 사내 하나가 도착해 공간의 문을 열었다. 운영자냐고 물어보니 직원이라는 대답. 운영자는 다른 날보다 조금 늦을 거라는 설명이었다. 마냥 기다릴 수도 없어서 연락을 부탁했다. 운영자에게 전화를 연결한 그가 나를 바꿔 주었다. 휴대전화에 대고 말했다. “나 한국에서 온 사진작가 아무개라고 하는데 널 만나고 싶다.” 운영자가 대답했다. “지금 바로 가마.” 잠시 후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후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아 용건을 설명했다. “공간이 마음에 들어서 전시를 하고 싶다. 사진은 준비해 왔다. 내 소신과 철학을 담은 작품들이다. 실험적인 방식을 좋아한다. 너만 괜찮다면 손바닥만한 사진들로 전시회를 열어 엄숙주의에 균열을 한 번 내 보자. 공간의 분위기로 보아 내 말을 충분히 이해하리라 생각한다. 여기 사진들부터 먼저 확인하라.” 실험성을 키운 전시일수록 더 만족스러운 결과를 안기곤 했다. 몸으로 감상하는 사진전을 열었을 때도 그랬고, 아름드리나무를 갤러리로 이용했을 때도 그랬다. 새로운 관점을 열기 위해서는 통념부터 파괴해야 했다. 그런 시도를 하다 보면 내 안의 고정관념부터 먼저 깨졌다. 그 여파가 다시 관객들에게로 퍼져 나갔다. 사진을 확인한 그가 말했다. “전시의 방향에 공감한다. 사진도 좋다. 하자.” 


그의 이름은 보그단. 부드럽고 유연한 태도 사이로 날카롭게 번뜩이는 눈매가 인상적이었는데 일종의 결기인 듯했다. 대안 공간을 뚝심 있게 운영할 수 있는 힘으로 보였다. 그동안 여행을 하면서 세계 각국의 독립 예술 구역을 많이 돌아다녔다. 애석하게도 순조롭게 운영되는 대안 공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겉은 화려했지만 저마다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럼에도 각국의 공간들은 뒤로 물러서지 않고 자신들의 터전을 꿋꿋이 꾸려나갔다. 주변에서는 실리 중심으로 태세를 전환하고 있는 데도 오히려 가치를 지키겠다며 소매를 바짝 걷어붙이곤 했다. 위태로운 선택을 하면서도 끝내 꽃을 피우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모습들이 멋져 보였다. 실패할 줄 알면서도 도전을 주저하지 않는 이들의 모습에는 늘 근사한 구석이 있었다. 껍질을 스스로 찢는 용기야말로 존재를 도약시킬 수 있는 최고의 원동력일 것이었다. 


손님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 중앙 마당, 아에테르나티브, 티미쇼아라, 루마니아


작품 설치를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단골손님으로 보이는 청년 하나가 등장했다. 수많은 테이블을 놔두고 나에게 다가와 합석을 해도 되냐고 물었는데 별다른 반문 없이 그러라고 했다. 접근한 이유는 잠시 후에 들었다. 그는 현지의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 중인 대학생 마이클. 등굣길에 커피를 마시려고 들렀다는데 전날 밤에도 나를 봤단다. 자신들의 자리로 나를 초대할까 친구들과 궁리하다가 내 인상이 무서워 보여서 청하지 못했다고 했다. 아침에 보니 그렇게까지 무서운 사람은 아닌 것 같아서 말을 걸었다는 설명이었다.


곧 시작되는 수업에 출석할 예정이었던 마이클은 나와의 대화가 한창 무르익자 수업을 째기로 마음을 바꿨다. 자신의 인생에서 어떤 경험이 더 깊이 새겨질 것인가를 고려한 결정이라고 했다. 나와 시간을 함께 보내는 편이 더 의미 있으리라 판단했단다. 굳이 말리지 않았다. 상대가 내가 아니었더라도 대학 초년생인 그에게는 날마다 반복되는 수업보다 먼 나라에서 온 여행자와의 만남이 더욱 귀중한 경험으로 남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주 중요한 수업이 아니라면 나도 그랬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제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시간. 루마니아의 시외버스 체계가 다소 복잡한 데다가 티미쇼아라에는 터미널마저 여러 개라서 마이클에게 길 안내를 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마이클이 대답했다. “수업 째서 나 오늘 시간 많아.” 자신의 나라를 방문한 손님을 기꺼이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마이클이었다. 힘없고 약한 자들의 편에 서서 정의의 이정표를 바로 세우는 법조인이 되고 싶다는 각오를 내비친 직후이기도 했다.  


거리로 나와 눈부신 햇살을 가르며 걷기 시작했다. 40여 분을 부지런히 걸은 끝에 터미널을 무사히 찾아냈고, 예정했던 시각에 버스에 탑승했다. 헤어지기 직전 서로를 깊이 포옹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모든 새로운 시도가 그래 왔듯 티미쇼아라에서의 전시 타진도 용기가 꽤 필요한 일이었다. 스스로 위축돼 아에테르나티브의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면 전시회 개최도, 보그단과의 시원스러운 소통도, 마이클의 호의도 누리지 못했을 것이었다. 용기를 품고 덤벼든 덕분에 다시 한번 새로운 성취를 하고, 귀중한 인연을 만들었다. 찬란한 햇살이 반사되고 있는 직선 도로를 향해 버스가 힘차게 바퀴를 굴리기 시작했다.


빅토리에리 광장, 티미쇼아라, 루마니아




# 글로벌 사진 프로젝트 <I am a forest> 

숲 보호와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주제로 한 사진 프로젝트. 레고랜드의 춘천 무인도 벌목 사태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는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3일짜리 스키점프 경기를 위해 강원도 가리왕산의 500년 된 원시림 5만 그루를 벌목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그 초점을 올림픽으로까지 넓혔다. 세계적인 축제의 이면에 숨은 진실을 세계인들에게 알림과 동시에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호소하며 나아갔다. 세계인들이 전하는 숲 보호의 염원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그들의 연대를 인간 숲의 이미지로 형상화해 나간 작업이다.


76th 퍼포머

: Zolatan Haraszy


- 국적: 헝가리

- 촬영지: 티미쇼아라, 루마니아


헝가리 혈통인 졸리(애칭)의 실제 국적은 루마니아지만 정체성의 뿌리는 헝가리다. 본인 역시 몸만 루마니아에 있을 뿐, 실제로는 헝가리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서양에서 뿌리의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일인 듯 보였다. 유사 사례를 졸리 외에도 꽤 많이 경험했다. 음식 나눔의 정신이 투철한 졸리의 특징을 반영해 촬영을 진행했다. 풍성한 먹거리를 아낌없이 제공하는 졸리의 모습이 숲을 닮아 있었다. 숲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혜택을 가볍게 상기시키고 싶기도 했다. 짧은 시간만으로도 아주 깊은 교감을 나눌 수 있었던 졸리여서 촉박했던 일정이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았다.



77th 퍼포머

: Voican Rares


- 국적: 루마니아

- 촬영지: 티미쇼아라, 루마니아


실천하는 자들의 모습은 언제나 보기 좋았다. 현지 사정에 어두운 외국인을 돕겠다고 수업까지 재끼면서 나서기란 그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일. 무리한 상황을 감수하면서까지 남을 도울 필요는 없겠지만 여력이 있으면서 타인의 곤경을 나 몰라라 하는 이들이 적지 않기에 마이클의 실천적 태도가 깊은 인상을 남겼다. 법학을 전공하는 마이클의 장래 희망은 힘없고 약한 자들의 편에 서서 정의의 이정표를 바로 세우는 법조인이 되는 것. 법의 세계에서 최고의 위치에 올라 사법 농단을 저지르는 이들보다 오늘의 실천을 마다하지 않는 마이클이 백만 배 더 멋진 사람으로 느껴졌다.



78th 퍼포머

: Bogdan Danciu


- 국적: 루마니아

- 촬영지: 티미쇼아라, 루마니아


소형 사진들로 전시를 시도한 이유는 엄숙주의에 균열을 내고 싶어서였다. 전시회가 일반적으로 요구하는 반듯한 형식이 전시의 내용을 효과적으로 부각하기도 하지만 겉만 화려할 뿐 속은 텅 빈 전시도 꽤 많이 존재한다. 그동안의 경험 속에서 근접해서 바라보면 거북스럽고 발치에서 바라보면 우스꽝스러운 사례가 없지 않았다. 끊임없는 반문이 예술의 역할인 데다가 나 또한 엄숙주의의 쇠창살을 내적으로 완벽하게 부수지 못한 터라 전복적인 시도를 하고 싶었다. 내 의중을 단박에 알아차린 보그단이 반가웠던 이유다. 같은 이유로 그는 이 프로젝트도 강력하게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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