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영진 Feb 15. 2019

37. 진정한 풍요는 풍요를 드러내지 않는다_마케도니아

화려한 랜드마크와 수많은 동상들 사이에서

알렉산더 더 그레이트, 스코페, 마케도니아




국경은 여행자들을 단합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과도한 검문이나 부정한 단속 행위에 적절히 대처하기 위해서는 다른 여행자들과의 연대가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의 대표적인 무법지대이자 사각지대인 국경에서는 장소와 국가를 불문하고 부조리가 웅성거렸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선진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선이 모이는 중앙과는 달리 이쪽 나라의 최후의 땅이면서 저쪽 나라에서는 치외법권 지역이다 보니 법보다는 주먹이 가까웠다.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은 그 어수선함이 몇 배 더 심했다. 검문관의 기분이나 주머니 사정이 곧 법이었다. 국경은 부조리가 쉽게 유폐되는 곳이었다. 


사정이 그러하니 국경에서는 다른 여행자들과 결속해야 하는 상황이 자주 벌어졌다. 원치 않아도 관계는 그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굳이 눈에 보이는 협력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여행 동지들의 존재만으로 위축감을 해소할 수 있는 순간들이 많았다. 국경을 넘기 직전까지는 남남이었다가 국경에서 친구가 되는 일도 흔했다. 네덜란드 여행자 브람, 스페인 여행자 이네스, 영국 여행자 잭으로 이루어진 서유럽 3인방과 관계가 맞닿은 곳도 거기였다. 


여권사진 속의 내 모습과 실제 모습이 많이 달라서 국경에서 자주 고생을 하고 있었다. 사진 속에는 짧은 머리에 순진해 빠진 눈동자를 한 10년 전의 내가 있었다. 명치까지 내려오는 장발에 수염까지 잔뜩 자란 10년 후의 나와는 많이 다른 모습. 헤어스타일의 차이만으로도 동일인임을 감별하기가 쉽지 않은데 여행을 시작하면서 그대로 둔 수염이 겨드랑이 털보다 길게 자랐다. 삼모작을 하는 지역에서는 진작에 베어내고 새로 모종을 했을 길이. 내가 봐도 사진과 실물의 차이가 컸다.  


불가리아발 버스에 몸을 싣고 마케도니아로 향하는 길. 두 나라가 옆구리를 맞댄 국경에서 버스가 멈춰 섰다. 이번에는 그냥 지나가려나 했지만 역시나 검문관이 나를 지목하며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인상착의를 빌미로 한 검문 앞에서 서유럽 3인방은 부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향해 일제히 시선을 모았다. 불공정한 검문 행위를 감시하겠다는 것. 같은 배낭여행자로서 응원의 마음을 표한 것이기도 했다. 남남이었던 관계가 우정의 교각 위로 첫발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국경에서 반복적으로 검문을 당하다 보니 대처하는 솜씨가 꽤 능숙해진 상태였다. 서유럽 3인방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고 검문관을 따라나섰다. 검문소 뒤편의 후미진 공간으로 나를 데려간 검문관이 위협적인 목소리로 신원을 물어왔지만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주민등록증과 그 밖의 소지품들을 꺼내 여권 속의 나와 여권 밖의 내가 동일인임을 확인시켰다. 모든 물음에 침착하게 답변한 후 버스로 돌아왔다.


번화가를 관통하는 바르다르강, 스코페, 마케도니아


국경을 넘어 두 시간 여를 더 달린 버스가 낯선 건물의 뒷마당에서 바퀴를 멈췄다. 스코페 터미널이었다. 서유럽 3인방과 국경 이민국에서 안면을 튼 후 버스 안에서 얼마간 대화를 나눴지만 그들은 팀으로 움직이는 상황이었고, 나는 단신으로 여행하는 중이었다. 국경에서 위기감을 공유하면서 친분을 맺었다지만 갈림길에 당도했으니 여기가 인연의 만료 지점일 것이었다. 버스 앞에서 세 사람에게 작별 인사를 건넨 후 숙소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앞으로 더 볼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덕분에 국경을 무사히 넘었다고 생각하며 홀쭉한 그림자를 앞세워 걸었다. 그런데 숙소의 프론트데스크에서 세 사람을 우연히 다시 마주쳤다. 여행 잘하라고 기원하며 헤어진 지 15분 만이었다.


늦은 시각에 도착한 터라 시장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그들도 같은 처지. 배낭을 일제히 침대맡에 던져두고 다 같이 숙소 인근의 식당으로 몰려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촌스러운 사이키 조명 아래에서 중년의 현지 가수가 마케도니아식 뽕짝을 부르는 이상야릇한 실내 분위기와는 달리 음식 맛은 꽤 괜찮았다. 식사를 하는 동안 여러 가지 화두가 식탁 위를 떠돌았는데 사진에 관심이 많은 브람과의 대화가 가장 흥미로웠다. 관심이 깊은 만큼 질문도 많았다. 구체적이면서 인문학적 해석을 요하는 물음이 많아 짧은 영어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궁금증을 해소하려는 태도가 보기 좋아 없는 단어까지 짜내 가며 꼼꼼히 대답했다. 질문의 섬세도나 시야의 각도로 보아 학술적 소양이 풍부한 친구인 듯했다. 그럼에도 그는 지적 허영심을 드러낸다거나 지식을 과시하는 행위는 하지 않았다.

 

다리 난간을 빼곡히 채운 동상들, 스코페, 마케도니아


식사를 마친 후에는 다 같이 거리로 나가 스코페의 밤 풍경을 구경했다. 일렬로 나란히 서서 거리를 누비는 사이 도시의 풍경 속에서 수상한 점을 발견했다. 역사의 길이에 비해 시가지의 조성 상태가 지나치게 화려한 듯했다. 그리스나 로마 양식을 본 따 지었는지 주요 건축물들의 외양이 상당히 크고 화려했는데 기존 건물들의 건축 양식과 공통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 더해 랜드마크격의 신축 건물들이 좁은 공간에 너무 많이 서 있었다. 심하다 싶을 정도로 촘촘한 배치. 동상의 수는 그보다도 훨씬 많았다. 면적별 동상 밀도로는 세계 최고라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마케도니아는 고대 그리스와 자웅을 겨루던 화려한 과거를 근거로 내세우며 인류 최고의 정복자 중 하나인 알렉산더 대왕의 적통이 자신임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마케도니아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해체하면서 탄생한 신생 독립국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스가 자국의 동일 지명을 거론하며 마케도니아의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기도 했다. 아직까지는 변방의 약소국에 불과한 나라에서 동상으로 만들어 세울 만큼 대단한 업적을 구가한 인물이 과연 저렇게까지 많은지도 의문이었다. 


진정으로 풍요한 자는 그 풍요를 과시하지 않는 법. 누군가에게는 멋지고 화려하게 느껴졌을 스코페의 야경이 내 눈에는 민족적 열등감의 표출로 보였다. 도심에서 몇 발짝만 나가면 신산한 풍경 일색의 뒷골목이 잔뜩인 스코페였다. 역사를 앞세운 정통성의 과시보다 오늘의 사회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는 일이 시급할 듯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는데 곁에서 스코페의 현란한 야경에 감탄을 터뜨리고 있던 브람이 나에게 도시의 인상을 물었다. 느낀 점을 그대로 얘기하자 그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처음에는 동의하지 않는 듯했던 그는 자세한 내 설명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표정이었다.


도심의 뒷골목에서 마주친 서민 가옥, 스코페, 마케도니아


다음날은 그들은 그들대로 나는 나대로 일정을 소화했다. 그러고서 저녁에 다시 숙소에서 마주쳤는데 브람이 이튿날 집시 마을을 갈 계획이라며 동행할 의사가 있는지 물어왔다. 장소도 흥미로웠거니와 활기 넘치는 브람과도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어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이튿날 오전 그들과 함께 집시 마을로 향했다. 어떤 곳인지 궁금했는데 가서 보니 슬럼가였다. 도시 안에 자리하고 있지만 중심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 마을의 중앙을 관통하는 대로에는 마차가 지나다녔고, 그 좌우로 길게 도열한 재래 상점들에서는 흥정이 시끄럽게 오고 갔다. 시장 뒤 공터에서는 벼룩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낡은 물품 가득한 좌판 위로 주민들의 애환이 언뜻언뜻 비쳤지만 그 자체로 가감 없는 삶의 풍경이어서 내 눈에는 충분히 아름다워 보였다. 휘황찬란한 구조물들이 완력을 과시하는 도심보다 훨씬 진솔한 느낌이어서 더더욱 좋았다. 카메라에 두루 담고 싶었으나 경계심 어린 눈빛이 이따금 느껴져 카메라를 거뒀다. 


시내로 되돌아오는 차 안에서 토론이 벌어졌다. 여행지로서의 매력이나 공간에 대한 개인적인 인상을 두고 대화를 주고받아도 흥미로웠을 텐데 그보다 훨씬 첨예한 대화가 오고 갔다. 사진 촬영 시 초상권 보호의 적정한 범위는 어느 정도인지, 구걸하는 아이들에게 돈을 주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지 등의 문제에 대해 사뭇 진지하게 토론을 했다. 가장 적극적으로 토론에 임한 이는 물론 브람이었다. 민감한 사안이어서 명쾌한 합의를 이루기는 어려웠지만 브람의 의견 중 많은 부분에서 다시 생각해 봐야 할 화두를 얻었다. 민주적이면서 도전적이고, 지적이면서 겸손한 브람이었다. 내적으로 충분히 풍요함에도 그 풍요를 드러내지 않는 모습이 인격의 모양새를 보여 주는 듯했다. 


시내에 도착해 현지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한 후, 다시 거리 구경을 시작했다. 한 시간 가량을 함께 돌아다녔을까. 갈림길 하나가 우리 앞을 막아섰다. 아쉽지만 헤어질 시간. 길모퉁이에서 서서 무사 안녕을 빌며 포옹을 나눈 뒤 발걸음을 돌렸다. 넷이다가 다시 혼자가 된 걸음이 적적했지만 그냥 걸었다. 옹골찬 여정을 만들려면 주어진 상황이 어떻든 묵묵히 나아가야 할 것이었다. 


스톤 브리지, 스코페, 마케도니아




# 글로벌 사진 프로젝트 <I am a forest> 

숲 보호와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주제로 한 사진 프로젝트. 레고랜드의 춘천 무인도 벌목 사태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는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3일짜리 스키점프 경기를 위해 강원도 가리왕산의 500년 된 원시림 5만 그루를 벌목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그 초점을 올림픽으로까지 넓혔다. 세계적인 축제의 이면에 숨은 진실을 세계인들에게 알림과 동시에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호소하며 나아갔다. 세계인들이 전하는 숲 보호의 염원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그들의 연대를 인간 숲의 이미지로 형상화해 나간 작업이다.


91st 퍼포머

Bram Vts


- 국적: 네덜란드

- 촬영지: 스코페, 마케도니아


국경에서 별도의 검문을 위해 불려 갈 당시, 버스 동승자들 중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연대감을 표출해 준 친구가 브람이다. 검문의 의도가 미심쩍어 보인다는 제스처를 취하며 검문관을 따라나서는 나에게 응원의 눈길을 보내왔다. 덕분에 위축감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검문을 마치고 다시 탑승한 버스 안에서도 브람은 활기찬 태도로 말을 걸어왔다. 그 씩씩한 목소리에서 얼마간의 자극을 받았다.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흘러나왔다. 다른 순간들과 마찬가지로 브람은 단단한 목소리로 촬영에 응하겠노라는 의사를 밝혀 왔다. 또렷또렷하고 시원스러운 말투였다.



92nd 퍼포머

: Ines Fernandez


- 국적: 스페인

- 촬영지: 스코페, 마케도니아


서유럽 3인방 중 한 명인 스무살 여대생 이네스. 스페인 발렌시아 출신인 그녀는 영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학업 활동 중 얼마간의 짬을 내 여행을 하고 있다고 했다. 외양을 맵씨 있게 꾸밀 줄 아는 그녀였지만 며칠간 생활을 섞다 보니 정제되지 않은 모습을 자주 구경할 수 있었다. 아침마다 부시시한 얼굴로 조식을 들었고, 집시마을에서 돌아오는 차량 안에서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나로서는 그러한 면면들이 인간적으로 느껴져서 좋았다. 배낭을 메고 오른 길이기 때문인지 그녀 역시 자신의 모습에 괘념치 않는 듯했다. 허물없는 상황이 우정을 돈독하게 해 준 건 물론이다.



93rd 퍼포머

Jack O'Grady


- 국적: 영국

- 촬영지: 스코페, 마케도니아


서유럽 3인방의 마지막 멤버인 잭. 서로 잘 지내긴 했지만 브람과의 소통이 심화되는 바람에 속 깊은 대화를 할 새가 없었다. 마지막날까지도 그랬다. 당연히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지 못했다. 집시 마을을 구경하고 시내로 돌아와 현지 식당에서 함께 점심을 드는데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가 식탁 위로 흘러나왔다. 촬영을 마친 브람이 운을 띄웠을 게다. 자세한 설명을 들은 이네스와 잭 역시 적극적인 공감을 표하며 참여 의사를 밝혔다. 식사를 마친 후 시내를 구경하다가 여유 시간을 이용해 이네스와 잭을 촬영했다. 두 사람 모두 기대 이상으로 성실하게 촬영에 임해 주었다. 



94th 퍼포머

: Teodora Mihajlovska


- 국적: 마케도니아

- 촬영지: 스코페, 마케도니아


테오도라는 스코페에서 묵었던 숙소의 스탭. 처음 마주쳤을 당시 그녀는 한가한 틈을 타서 드로잉을 하고 있었다. 지나치면서 보니 수준급의 실력. 대학생이라기에 전공을 물었더니 건축학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드로잉은 건축학도의 필수 소양이었다. 늘 친절한 테오도라였지만 말수는 적은 편이었다.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숲의 파괴를 염려한다는 말을 전할 때의 목소리도 나지막했다. 참여 의사를 밝히기에 곧바로 촬영을 했으나 광량이 부족한 밤이어서 다음날 점심에 추가 촬영을 했다. 역시나 프로젝트와 관련된 대화를 한 직후인 전날 밤의 표정이 더 좋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 발칸 반도 북부의 가 볼 만한 숲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