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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Feb 16. 2019

38. 내전의 땅에서 돋아나는 새싹_프리슈티나, 코소보

영원한 절망은 없다고 외쳐오던 풍경

사미 프라세리 김나지움, 프리슈티나, 코소보




그녀와의 만남에 딱 1시간이 주어졌다. 그마저도 눈코 뜰 새 없는 그녀가 어떻게든 나와 대면하려고 분투한 끝에 얻은 1시간이었다. 처음에 허락된 만남의 시간은 2시간, 그 직후 그녀가 메일함에서 새로운 업무 메일을 발견하면서 1시간 20분으로 단축, 약속 당일 그녀의 업무 미팅이 길어지면서 다시 45분으로 줄어들었다. 그녀가 다음 일정을 15분 지연한 덕분에 1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어렵게 맞닿았기에 만나자마자 서로 포옹부터 했다. 생전 처음 보는 사이임에도 포옹의 느낌이 편안했다. 메시지를 주고받으면서 그녀가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를 직감한 상태였다. 부드럽고 포근한 포옹의 느낌으로 미루어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했다. 풍부한 감정과 유연한 사고를 지닌 친구인 듯했다. 


누군지도 모르는 그녀에게 만남을 청한 이유는 앞선 도시에서 인연을 맺은 발렌티노라는 친구가 적극적으로 만남을 권했기 때문이다. 발렌티노 역시 협력적이면서 생기 넘쳤기에 그가 추천해 준 친구 역시 신뢰할 만한 인물일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발렌티노를 만난 인연이 닿은 시점은 바로 며칠 전이었다. 한국에서 청탁받은 원고를 급히 완성해서 보내줘야 해 숙소의 침대맡에 앉아 작업에 집중하고 있는데 낯선 사내 하나가 방으로 들어와 나에게 말을 걸었다. 같은 방에 묵고 있는 숙박객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잠시 후 숙소 라운지에서 다른 여행자들과 함께 와인 파티를 벌일 계획이니 생각이 있으면 오라는 말을 남기고 방을 빠져나갔다. 발렌티노였다. 


 대로변의 풍경, 크리슈티나, 코소보


다른 날 같았으면 같이 어울렸을 텐데 원고 작업이 급했다. 알코올이 들어가면 작업에 지장이 생길 가능성이 컸기에 오늘만큼은 한 방울의 술도 마시지 말아야겠다고 작심한 상태였다. 작업에 한참 동안 몰입해 있다가 물을 마시러 숙소 라운지로 나갔는데 뒤에서 누가 어깨를 툭툭 쳤다. 뭐지 싶어서 돌아봤더니 발렌티노가 와인을 가득 채운 술잔을 내 앞으로 내민 채 서 있었다. 거절하려고 했지만 호의로 가득 찬 그 표정이 발언을 가로막았다. 에이, 내가 차라리 고생을 하자 생각하며 와인을 받아서 마셨다. 또 한 잔 주기에 그것도 받아 마셨다. 예상했던 대로 작업은 고생스러웠다. 낱말들의 모서리에 부딪치고, 쉼표와 마침표에 걸려 넘어지기를 반복해야 했다.


그날 밤 발렌티노는 일을 하러 나갈 예정이었다. 여행 중이지만 간간이 일을 한다고 했다. 와인을 거나하게 들이켠 발렌티노는 침대로 돌아와 알람을 맞춰 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쌕쌕 거리는 그의 숨결을 타고 나온 와인 냄새가 방안 구석구석으로 흘러다녔다. 몇 시간 후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제 시각의 기상을 단단히 다짐하며 잠자리에 누웠던 그는 알람 소리가 온 방을 뒤흔들고 있음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저러다가 큰 일 나겠다 싶어서 원고를 잠시 밀쳐두고 발렌티노를 깨웠다. 깜짝 놀라 눈을 뜬 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샤워장으로 뛰어들어갔다. 부리나케 샤워를 마치고 나온 후에는 깨워줘서 고맙다는 말을 어수선하게 남기고 숙소를 급히 뛰쳐나갔다. 


다음날 아침 숙소로 복귀한 발렌티노에게 일은 무사히 마쳤냐고 물었더니 다행히도 잘 마쳤단다. 함께 아침 식사를 들며 전날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페루에서 왔다는 그는 아르마딜로로 만든 자국의 희귀 전통 악기인 차랑고를 들고 전 세계를 돌며 여행하고 있었다. 전날 밤에 했다는 일도 뮤직 비디오 촬영이었다. 내가 다음 목적지로 예정하고 있는 프리슈티나를 이미 여행했다기에 현지에서 만난 친구들 중 소개해 줄 만한 이가 있는지 물었다. 그가 시원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멋진 친구가 하나 있지. 너랑도 잘 통할 거야.” 니옴자였다. 


약속 장소에서 니옴자를 기다리다가 찍은 사진, 중앙로, 프리슈티나, 코소보


니옴자와 만나는 데는 성공했지만 주어진 시간은 1시간. 그녀를 앞세워 도심을 구경할 생각이었으나 그러다가는 시간이 금세 지나가버릴 것 같아 당초의 계획을 바꾸기로 했다. 현지에 대해 궁금한 것도 물어보고 싶었고, 그녀와 같이 하려던 것도 있었다. 얘기를 나눠보니 니옴자의 실제 모습은 내가 예상했던 것과 비슷했다. 사회에 만연한 인습들을 변혁하고자 하는 진보 지식인의 모습에 가까웠다. 열망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프로젝트에 관여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했다. 관계자들과 함께 소셜 센터와 복합 문화 공간을 조성 중이면서 시각 예술 기반의 개인전도 준비하고 있었다. 자신의 인생에서 예술가로서 내딛는 공식적인 첫걸음이 될 거라고 했다. 


한국의 사회상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적폐 대통령의 탄핵과 국정 농단의 진실을 요구하는 촛불 집회가 한창인 시점이었다. 대략적인 설명만으로도 니옴자는 한국의 상황을 훤히 이해하는 눈치였다. 멀지 않은 과거에 공동체 간의 갈등으로 인해 내전의 참상을 겪은 코소보였다. 영토 내에 거주하던 소수의 세르비아인들이 코소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알바니아인들을 인종 정화라는 이름으로 학살한 시점이 불과 십몇 년 전이었다. 당시의 사태로 인해 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박탈당했고, 정치적으로 탄압당했으며, 심지어는 살해까지 당했다.  


코소보는 정치적으로도 복잡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1970년대 초반부터 자치가 허용되었던 코소보는 1990년대 초 공산주의의 몰락으로 대두된 민족주의의 흐름을 타고 독립을 주창했다. 그러나 세르비아 정부는 이에 반발하며 오히려 코소보의 자치권을 박탈했다. 2000년대 후반 코소보가 유엔 회원국들의 동의를 등에 업고 독립을 선포했지만 세르비아 정부는 코소보를 국가로 승인하지 않았다. 내가 코소보에 발을 들인 시점에서도 그런 상황은 계속되고 있었다. 여행자들 역시 그 여파를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세르비아가 코소보를 압박하기 위해 벌이는 가장 대표적인 일들 중 하나가 입출국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코소보를 통해 자국으로 넘어오는 이들의 입국을 불허하는 세르비아의 국경 관리 정책 때문에 여행의 동선을 짜는 데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다. 과거에 비해 그 수위는 낮아졌지만 정치적 탄압이 여전한 코소보였다. 그러한 내력의 나라에서 나고 자란 때문인지 니옴자는 한국에서 벌어지는 사태에 대해서도 깊은 공감을 아끼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모드로 변신한 중앙로, 프리슈티나, 코소보


과거는 그랬지만 오늘의 코소보가 보여 주는 모습은 예상보다 훨씬 활기찼다.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도 허허로운 풍경을 쉽게 마주칠 수 있었지만 그보다는 희망적인 장면이 더 많았다. 중앙 광장에서 성업 중인 트렌디한 푸드 트럭들이며, 크리스마스를 준비하고 있는 번화가의 들뜬 표정들이며,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빵들을 가게 앞에 잔뜩 진열한 길모퉁이 베이커리까지 생동감 넘치는 광경들이 도시 곳곳에서 술렁였다. 타국의 수도들에 비해 볼거리가 풍부하지는 않았지만 관광 명소 대신 현지의 삶을 체험의 목표로 삼았기에 코소보가 꽤 훌륭한 여행지로 다가왔다. 천편일률적인 도시 풍경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솔직한 광경들이 많아 여행지로서 경험의 가치가 아주 높았다. 


니옴자와의 만남이 어느새 끝을 향하고 있었다. 서로 맞닿을 구석이 많아 니옴자가 좀 더 한가했다면 현지에서 같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듯했다. 분명한 의견과 실천적인 태도가 신뢰감을 주는 데다가 소통의 결도 상당히 좋았다. 주어진 시간을 짧은 대화로만 마무리하기가 아쉬워 한국에서 인화해 간 사진들을 세트째로 니옴자에게 건넸다. 동료들과 함께 준비하고 있는 공간이 완성되면 거기에 내 사진들을 전시하고 싶다는 말을 니옴자가 했었다. 


아주 길고 아늑한 작별 포옹을 마지막으로 나누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불모의 땅에서 돋아나는 새로운 희망을 어렴풋이 본 듯했다. 불안한 사회 환경과 내전의 참상에서 비롯한 상처가 청년 세대에게도 깊이 각인되어 있으리라 예상했으나 내가 확인한 광경은 그와 달랐다. 니옴자의 열정적인 목소리 안에서, 거리를 왕래하는 청년 남녀의 역동적인 표정 속에서 새파란 싹 같은 게 언뜻언뜻 비쳤다. 불어오는 바람 사이로 늦은 오후의 햇살이 눈부시게 빛났다. 그 빛을 붉게 반사하고 있는 오래된 거리의 풍경이 화사하면서도 선명했다.


중앙로의 풍경, 크리슈티나, 코소보




# 글로벌 사진 프로젝트 <I am a forest> 

숲 보호와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주제로 한 사진 프로젝트. 레고랜드의 춘천 무인도 벌목 사태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는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3일짜리 스키점프 경기를 위해 강원도 가리왕산의 500년 된 원시림 5만 그루를 벌목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그 초점을 올림픽으로까지 넓혔다. 세계적인 축제의 이면에 숨은 진실을 세계인들에게 알림과 동시에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호소하며 나아갔다. 세계인들이 전하는 숲 보호의 염원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그들의 연대를 인간 숲의 이미지로 형상화해 나간 작업이다.


95th 퍼포머

: Valentino Mickle


- 국적: 페루

- 촬영지: 스코페, 마케도니아


페루의 전통 악기를 들고 여행하고 있던 발렌티노. 세계를 누비는 보헤미안답게 카메라 앞에서도 한껏 자유분방했다. 그 화통한 기운이 프로젝트에도 기분 좋게 스며들었다. 스코페에서의 뮤직 비디오 촬영 후 꾸준히 영상 작업을 이어간 그는 6개월쯤이 지나 자신의 첫 번째 뮤직 비디오를 완성했다는 소식을 알려 왔다. 유튜브에 올린 영상은 아주 흥겨웠지만 숙소에서 팬티 바람으로 허둥지둥하던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났다. 프로젝트 촬영 당시 막간을 이용해 포트레이트도 찍었는데 후에 보니 아르메니아에서 열린 콘서트의 포스터에 그 사진이 들어가 있었다.


96th 퍼포머

: Njomza Dragusha


- 국적: 코소보

- 촬영지: 프리슈티나, 코소보


니옴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만남과 이별의 순간 나눴던 두 번의 포옹이다. 이례적이다 싶을 정도로 부드럽고 포근한 포옹이었다. 때로는 몸에 새겨진 기억이 머리에 기록된 기억보다 오래가기도 하는 법. 니옴자가 어떤 유형의 사람이었는지를 포옹의 감촉으로 기억해 내곤 한다. 프리슈티나를 여행한 후에는 코소보 제2의 도시라는 프리즈렌에 갈 예정이었는데 그 얘기를 들은 니옴자가 현지에 문화 공간을 운영하는 친구가 있다며 연락을 취해 주었다. 독립 예술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인 친구이니 좋은 인연이 될 거라고 했는데 아쉽게도 다른 지역에 체류 중이라는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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