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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Feb 17. 2019

39. 상상은 또다른 상상을 낳고_포드고리차,몬테네그로

상상의 나래를 힘차게 펼친 당신에게 건배

거리에서 마주친 벽화, 포드고리차, 몬테네그로




한국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참을 기뻐하고 있는데 그것이 시사하는 바를 가만히 돌아보자니 이게 과연 기뻐할 일인지 의문스러웠다. 우리 사회가 더 이상의 뒷걸음질이 불가능할 정도로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소식일 터였다. 이게 과연 사람 사는 세상인가 하는 생각을 몇 번을 했는지 모른다. 이게 나라냐 하고 혼잣말로 읊조린 적도 여러 번이었다. 우리 사회의 현실을 되짚다 보니 갑자기 어깨에 힘이 쭉 빠졌다. 그토록 염원하던 탄핵소추안도 가결되었으니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기쁨을 충분히 누려도 될 텐데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탄핵 정국 너머로 보이는 암담한 진실이 심리를 압박하고 있었다. 


기력이 오르지 않아 결국 온종일 휴식을 취했다.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그 현장에서 뜻 맞는 이들과 함께했더라면 기분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공안 정치의 압력으로 인해 수년 간 답답했던 숨통만큼은 한껏 틀 수 있었으리라. 현장에 함께할 수 없음은 못내 아쉬웠지만 각자가 자신의 소명을 성실하게 수행해 내는 것도 광장에서 촛불을 밝히는 것만큼이나 중요할 터였다. 광장에 나가지 못하는 대신 ‘I am a forest’ 프로젝트에 계속해서 매진하리라 다짐했다.  


사실 프로젝트를 이어오는 동안 날마다 막막한 감정과 맞닥뜨렸다.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처럼 느껴지곤 했다. 단순히 친구를 만드는 것이라면 모를까 낯선 땅에서 혈혈단신으로 긍정의 관계망을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다행히도 많은 이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고 있었지만 그만큼 적극적으로 몸을 던져 얻은 결과였다.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생각보다 많아 여행에도 자주 지장을 초래했다. 최장 4개월을 예상했던 여행이 그보다 길어지고 있는 이유였다. 


포드고리차, 몬테네그로


처음보다 능숙한 모습으로 프로젝트를 끌고 나가고 있었지만 앞은 여전히 깜깜했다. 오늘도 작업을 무사히 마무리했다며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노라면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했다. 오늘은 작업을 성사시켰지만 내일은 장담할 수 없는 상황. 한국에서 동료 예술가들이 격려와 성원을 보내며 그다음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데, 지금까지 참여한 이들도 앞으로 참여할 이들의 면면을 궁금해하며 지지를 보내오고 있는데 정작 내 앞에 닥친 현실은 ‘앞이 보이지 않음’. 그야말로 막막한 하루하루였다. 


무심하게 반응하는 이들이 예상보다 많은 데다가 그때그때의 내 형편과도 흐름이 맞아떨어져야 하기 때문에 프로젝트를 지지하는 이들을 더 만날 수 있을지, 만나더라도 그게 제때일지, 가능성을 품은 이를 앞에 두고 유연한 흐름을 만들어 촬영까지 연결할 수 있을지, 그 어떤 것도 자신할 수가 없었다. 정중하게 청한들 상대가 곧이곧대로 응하는 것도 아니고, 머리로는 공감하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는 이들도 의외로 많고, 진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 요건들이 충족되는 상황에서만 작업하겠다는 내 똥고집도 여전하니 진행이 더욱 까다로웠다.  


더욱이 프로젝트의 가늠좌는 평창동계올림픽에 맞춰져 있었다. 스키 슬로프 신설을 이유로 희귀 식물은 물론이고 500년 이상 된 거목들까지 무자비하게 잘려 나간 가리왕산은 국내에서 최장수 원시림으로 통했다. 또한 진귀한 생태계가 구축되어 있다는 점에서 학술적으로도 연구 가치가 상당하다고 평가받았다. 국정 농단 사태에 스포츠 사업이 엮여 있다는 소식도 들리니 끝까지 파헤쳐 보면 가리왕산 벌목의 이면에 국정 농단의 주역들이 연루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1년 10개월 만에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기는 했지만 평창동계올림픽 운영위원회의 초기 위원장은 땅콩 회항 사건으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대한항공의 수뇌 조양호 회장이었다. 세계인의 축제라는 화려한 수사 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종잡을 수 없었다. 


굳이 정치적, 사회적 이유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예술 본연의 치유력을 자주 경험하고 있었다. 대자연을 주제로 한 프로젝트여서 그 효과를 선명하게 느낄 때가 많았다. 직접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입장에서, 그리고 창작을 하는 사람으로서 의미 있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적지 않았다. 광장에 나가지 못하는 대신 이거라도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또 했다. 쉽지는 않지만 마지막까지 안간힘을 써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최소한 하던 대로만이라도 계속 하자고 다짐했다. 

 

민족 갈등이 만들어 낸 저항 마크와 그 위에 덧칠된 빨간 엑스자, 포드고리차, 몬테네그로


그런 생각을 할 무렵, 세계를 여행 중인 젊은 포토그래퍼 유웨이가 인연의 문을 두드려 왔다. 몬테네그로의 수도인 포드고리차에서 나를 호스팅하고 있던 알렉산더에게 카우치서핑 요청 메시지를 보내온 것이었다. 내가 빠져나간 후 그 뒤를 이어 유웨이가 묵기로 했으나 내 체류 일정이 길어지면서 셋이서 같이 지내게 되었다. 내가 그동안 만났던 대만인들은 밝고 온화했다. 여행길에서 만난 대만 여행자들 대다수가 그랬고, 대만 현지를 여행하던 당시에도 그러한 이들을 수없이 마주쳤다. 유웨이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처음에는 예의 바르고 친절한 모습 일색이었던 유웨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익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재치와 상상력이 점점 더 빛을 발했다. 천상 창작자구나 싶을 정도로 유쾌한 언변을 수도 없이 쏟아냈다. 그러면서도 밝고 온화한 성향은 변함없었다. 겸손한 모습도 한결같았다. 대개의 경우, 말수가 많아지거나 장난기를 드러내기 시작하면 태도를 느슨히 하기 마련인데 유웨이는 고유의 장점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 위에 재치와 상상력만을 더했다. 그와 대화를 나누면 언제나 유쾌했고, 또 평화로웠다.  


같은 직업을 가진지라 사진과 관련한 대화를 나눌 상대로도 유웨이는 제격이었다. 여행 전 잡지사에서 포토그래퍼로 활동했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현장 경험도 풍부해 보였다. 날카로운 눈썰미와 합리적인 태도 등 포토그래퍼로서 다양한 장점을 지니고 있어 유웨이와의 대화가 즐거웠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숨가쁜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아무리 힘들어도 ‘I am a forest’ 프로젝트를 꿋꿋이 밀어붙이리라 다짐하던 시점이어서 그러한 속사정도 유웨이에게 이야기했다. 프로젝트에 대해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평한 유웨이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내 카메라 앞에 섰다. 


민족 시인 푸쉬킨과 그의 아내 나탈리아의 동상, 포드고리차, 몬테네그로


다음날에는 유웨이의 카메라가 나를 겨눴다. 남들 사진은 숱하게 찍으면서 나 자신에 대한 사진 기록은 거의 남기지 않는 편이라서 마침 전업 포토그래퍼인 유웨이를 만난 김에 포트레이트 사진을 부탁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해서 유웨이에게 그런 얘기를 했더니 오히려 자신이 나에게 퍼포머 역할을 부탁하려던 참이었단다. 갑자기 창작욕이 올라왔다는 것이었다. ‘I am a forest’ 프로젝트가 자극을 줬다는 설명. 전날 촬영에 임한 후 자신도 사진으로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진지한 고민 끝에 포트레이트 작업을 프로젝트화하기로 결심했단다. 그리하여 유웨이는 나를 새 프로젝트의 첫 번째 퍼포머로 삼아 작업을 벌였다. 포트레이트 촬영을 마무리한 후, 언제고 기회가 되면 공동 작업도 해 보자고 서로 약속했다. 이튿날, 유웨이는 자신의 SNS 계정에 밤새 보정 작업을 한 내 포트레이트 사진과 함께 이런 글을 올렸다. 


여행에서는 당신을 따뜻하게 대해 주는 사람들보다 당신에게 영감을 주는 이를 만날 기회가 더욱 드뭅니다. 그는 글을 쓰고, 편집하며, 여행 사진을 길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나누는 사진작가입니다. 저는 그의 프로젝트 <I am a forest>에 참여했고, 그를 대상으로 해 사진을 찍었습니다. 저는 그의 흡연 시간을 정말로 즐깁니다. 그는 담배를 피우며 사진 촬영과 여행의 목적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비록 그는 자신의 영혼을 찾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의 눈은 항상 확고합니다. 그는 이미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점차 실천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몬테네그로 여행을 마친 유웨이는 이탈리아로 넘어갔다. 거기서 두 번째 포트레이트 작업을 완료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카우치서핑으로 묵었던 현지 게이 커플의 집에서 두 사람을 상대로 세미 누드 작업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약진하는 유웨이의 모습을 구경하는 기분이 아주 쏠쏠했다. 


유웨이가 포트레이트 작업의 촬영지로 선택한 폐감옥, 포드고리차, 몬테네그로




# 글로벌 사진 프로젝트 <I am a forest> 

숲 보호와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주제로 한 사진 프로젝트. 레고랜드의 춘천 무인도 벌목 사태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는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3일짜리 스키점프 경기를 위해 강원도 가리왕산의 500년 된 원시림 5만 그루를 벌목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그 초점을 올림픽으로까지 넓혔다. 세계적인 축제의 이면에 숨은 진실을 세계인들에게 알림과 동시에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호소하며 나아갔다. 세계인들이 전하는 숲 보호의 염원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그들의 연대를 인간 숲의 이미지로 형상화해 나간 작업이다.


98th 퍼포머

: Oli-Bear Davila


- 국적: 페루

- 촬영지: 포드고리차, 몬테네그로


절벽에 매달려 있다는 몬테네그로의 자랑 오스트로그 수도원을 찾아 나선 길에서 페루에서 여행 온 올리버(애칭)를 만났다. 해발 2500미터의 안데스 고지에서 나고 자란 그는 수도원을 향해 길게 이어진 오르막길을 다람쥐처럼 뛰어다녔다. 대자연의 품에서 자란 이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자연인으로서의 위엄. 그가 달릴 때마다 미동 없이 적요하기만 했던 숲 속 풍경이 한 폭의 살아 있는 그림으로 변하곤 했다. 하행길에도 올리버의 활약은 대단했다. 이미 출발한 열차를 숨가쁜 쇄도로 막아선 올리버. 그가 지연 작전을 벌이는 사이 숨이 턱까지 차오른 내가 차량 안으로 몸을 던졌다.


99th 퍼포머

: Lin Yu Wei


- 국적: 대만

- 촬영지: 포드고리차, 몬테네그로


"여행의 남은 기간 동안 포트레이트를 찍을 거야. 네 프로젝트에서 영감을 얻었어. 새 프로젝트의 첫 작업으로 널 사진 찍고 싶어." 프로젝트 촬영을 하고 얼마 후 유웨이가 건네 온 이야기다. 'I am a forest' 프로젝트는 많은 참여자들에게 대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있었다. 또한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이 얼마나 절실한 문제인지도 자각시켜 오고 있었다. 이따금은 예술적 영감을 주기도 했다. 그중 하나가 이 프로젝트를 통해 새로운 작업을 구상하게 된 유웨이다. 흔하디 흔한 길 위의 인연에서 동반 성장하는 벗으로 관계를 업그레이드하는 기분이 아주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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