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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Feb 23. 2019

45. 예술이 삶을 풍요케 하리라_아테네, 그리스

예술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금세 황폐해질 테니까

미적인 감각이 돋보이던 어느 카페 외벽의 연말 데코레이션, 아테네, 그리스




브라질리아나는 유적 단지에서 도보로 20여 분 거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인근에서 최초로 문을 연 복합 문화 공간으로, 아테네의 독립 예술 애호가들에게는 꽤 유명하다는 소문이었다. 고대 예술의 발흥지인 그리스, 거기에 더해 그 심장부인 아테네에 왔으니 다른 곳에서보다 더 적극적으로 전시회를 추진해 보기로 했다. 인류 문명사를 대표하는 곳인 만큼 전시회를 성사시킬 수만 있다면 개인적으로 뜻깊은 일이 될 듯했다. 그러나 세계가 한마음으로 경외하는 아테네이기에 문턱도 그만큼 높을 공산이 컸다. 부딪쳐 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리스 신화 하나만 해도 인류사에는 찬란한 금자탑이니 그것 외에도 수많은 미덕을 지닌 아테네가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발품으로 지역의 문화 지형을 파악할까 하다가 현지 사정을 잘 아는 이에게 적합한 공간을 추천받는 게 낫겠다 싶어서 호스텔의 주인에게 조언을 구했다. 대책 없이 여기저기 부딪치기보다는 탐색의 범위를 최대한 좁히는 편이 성사 가능성을 높일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었다. 예술의 역사가 면면한 도시이니 시민들 각자가 문화예술에 대한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공간을 감식하는 눈을 키워오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어딘가에서 그리스인들의 예술 사랑이 남다르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었다. 호스텔의 운영자가 적격의 공간을 추천해 주었으면 했는데 다행히도 그녀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공간들이 있다며 세 곳을 추천했다. 그중 하나가 브라질리아나였다. 


숙소 주인이 알려준 방향으로 분주하게 나아가던 발걸음이 목적지에 가까워졌다. 꽤 잘나가는 장소라는 소문 때문인지 부근에 다다르자 긴장감이 몰려들었다. 입구 앞에 멈춰 서서 숨을 고른 후 브라질리아나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실내의 분위기는 꽤 아늑했다. 가장자리에 놓인 빈티지한 가구들과 벽면에 걸린 예술 작품들에서 공간 특유의 개성도 물씬 느껴졌다. 직원에게 운영자가 누구인지 물었다. 곧이어 깊은 눈동자를 지닌 사내 하나가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세 명의 공동 운영자 중 하나인 크리스였다. 내 소개를 하자 그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방문 목적을 덧붙여 설명한 후 사진을 보여주며 전시회 개최가 가능한지 물었다. 사진을 확인한 그가 기대 이상으로 반색하며 긍정적인 대답을 꺼내 놓았다. 그러고는 나에게 커피를 내려 주면 마시겠냐고 물었다. 의미 있는 목적으로 자신의 공간을 찾아온 예술가에게 예우를 표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인자하게 미소 짓고 있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를 내리며 나를 향해 눈빛을 찡끗거리는 그에게서 고대 예술의 발흥지 출신다운 기품이 느껴졌다.  


동네 주민의 이야기를 차분히 경청하고 있는 타키, 아테네, 그리스


향긋한 커피 내음을 사이에 두고 20분쯤 이야기를 나눴을까. 크리스가 전시와 관련된 사항을 다른 운영자가 좀 더 소상히 안내해 줄 거라며 길 건너편에 있는 미니마켓으로 가 보라고 권했다. 브라질리아나에서 20여 미터 떨어진 미니마켓에는 인상 좋은 사내 하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브라질리아의 또 다른 운영자인 타키였다. 미니마켓은 브라질리아나의 운영진들이 함께 경영하는 곳이며, 크리스와 타키가 번갈아서 가게를 지킨다는 설명이었다. 국가 부도로 경제 위기가 도래하면서 브라질리나아의 운영 사정을 해결하기 위해 연 듯했다. 


타키와의 대화 역시 순조로웠다. 전시회 개최를 완전하게 확정하기 위해서는 그의 의견도 중요했는데 타키 역시 내 사진들을 높이 평가하면서 즉석에서 사진전 개최가 가능하다는 입장을 전했다. 문제는 현재 진행 중인 전시회가 끝난 후라야 사진전 개최가 가능하다는 것. 계획대로라면 그 무렵 나는 터키에 있거나 귀국한 상태였다. 혹여 아테네로 돌아온다고 해도 3주가량 어딘가를 떠돌아야 하는 상황. 여행이 마침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터라 긴장이 많이 풀어져 있었다. 남은 힘도 거의 없는 상태라 3주를 버티기가 쉽지 않을 듯했다.  


타키에게 사정을 말했다. 그런데 내 얘기를 들은 타키의 반응이 시원시원했다. 그리스를 떠난다고 해도 전시회를 열어 주겠다는 것. 작품을 준비해 두면 지금 진행 중인 전시회가 끝난 후 자신이 직접 디스플레이를 하겠단다. 늘 하던 일이어서 번거롭지 않다는 설명이었다. 작품 구매를 원하는 이가 있으면 판매도 해 주겠다고 했다. 중계료 없이 판매액 전부를 전달해 주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전폭적인 후원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기에 갈등하던 마음을 접고 타키에게 말했다. “전시회 개최 시점에 맞춰 다시 그리스로 돌아오마.” 


이후에는 그리스 현지의 예술 환경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가 타키에게 물었다. “예술가를 돕는 이유가 뭐냐?” 타키가 대답했다. “예술이 좋으니까. 예술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금세 황폐해질 테니까.” 국적에 걸맞은 답변. 단순한 예술 애호가는 아닌 것 같아서 타키에게 예술적 재능이 어느 쪽인지 물었다. 자신은 예술적 소양이 부족한 사람이라며 그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지만 숨겨진 무언가가 있는 듯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타키는 타악주자였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면서 최근 몇 년 동안 연주를 중단한 상태일 뿐 꽤 재능 있는 음악가였다. 어느 날엔가 전통 피리 하나를 입수했다면서 잠시 연주해 보이기도 했는데 짧지만 감각적이었다. 숨겨둔 솜씨를 예측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한해의 마지막 날을 기해 도심 곳곳에서 일제히 벌어진 새해맞이 콘서트 중 한 장면, 아테네, 그리스


전시벽이 와이어를 이용해 디스플레이를 하는 구조여서 이번에는 사진을 액자에 넣어야 했다. 일이 커진 김에 사진의 규격도 좀 더 키우기로 했다. 전시작은 총 30점. 다수의 상점들이 문을 닫는 연말이 코앞인 데다가 타키의 적극적인 협력 의지가 가슴에 깊이 와 닿아 곧바로 숙소로 돌아와 액자를 구입할 수 있는 곳을 인터넷으로 검색하기 시작했다. 숙소 측의 도움을 받아 피레우스 항구 근처에 있는 상점 하나를 찾아냈고, 서둘러 달려가 액자를 구매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30개의 액자는 상상 이상으로 무거웠다. 용을 써도 한 번에 50미터 이상은 걸을 수가 없었다. 택시를 탈까 하다가 원래의 계획대로 메트로를 이용해 브라질리아나까지 운반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하고 싶었다. 


쇠뿔도 단 김에 빼자 싶어 브라질리아나 측에 액자를 잠시 보관해 달라고 부탁한 후 숙소로 가서 작업 도구를 챙겨 왔다. 홀 한쪽에 놓인 넓은 탁자 위에서 표구 작업에 집중하는 동안 브라질리아나 측은 커피와 음료와 다과를 제공해 주었다. 신중을 기해 표구에 임했지만 작업은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짜증이 치솟았다. 예상치 못한 난관의 등장은 행사를 준비할 때면 늘 있는 일이었지만 이따금 짜증이 치솟는 현상도 행사를 준비할 때면 늘 있는 일이었다. 작업을 마무리하고 나니 새벽 2시. 예상보다는 종료 시점이 늦었지만 마음은 한결 편안해졌다. 이로써 가장 중요한 과제를 해결했다. 


이후에도 브라질리아나와 미니마켓에 자주 드나들었다. 이벤트 페이지 개설, 오프라인 포스터 제작, 작품 설치와 판매까지 행사와 관련된 일련의 사항들을 추가로 의논해야 했기 때문이다. 숙소에서 브라질리아나까지 이어지는 거리의 풍경이 무척 아름다운 데다가 하나둘씩 윤곽을 드러내는 전시회의 양상을 확인하는 기쁨도 커서 오고 가는 길은 항상 즐거웠다. 전시와 관련된 대부분의 사항은 타키와 의논했다. 예술 이벤트 개최 경험이 풍부하다 보니 브라질리아나의 운영자들 중 그가 행사를 전담하고 있었다. 의사소통을 할 때마다 깔끔하고 정확하면서 시원한 느낌을 받았다. 또한 다정하면서 정중한 대접도 받았다.  


고대 예술의 대표적 발흥지인 그리스에서, 그것도 그 중심 아테네에서 전시회를 열게 돼 기분이 좋았다. 여행을 시작할 당시에는 전혀 상상치도 못한 일이어서 더더욱 흐뭇했다. 그때는 한국에서 개최되는 예술 축제에 작업물을 하나라도 더 보내 주기 위해 ‘I am a forest’ 작업에 아등바등 매달리기에도 바빴다. 완연한 겨울임에도 지중해에 면한 남쪽 나라의 수도 아테네는 따뜻했다. 알바니아에서 매서운 북풍에 시달리며 쪼글쪼글해졌던 마음이 깨끗하게 다림질된 셔츠처럼 빳빳해졌다. 시야로 쏟아져 들어오는 풍경들 역시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따사로운 햇살로 가득한 이 도시와 어느새 사랑에 빠진 듯했다.


새해를 맞이한 시민들의 활기찬 모습, 아테네, 그리스




# 글로벌 사진 프로젝트 <I am a forest> 

숲 보호와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주제로 한 사진 프로젝트. 레고랜드의 춘천 무인도 벌목 사태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는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3일짜리 스키점프 경기를 위해 강원도 가리왕산의 500년 된 원시림 5만 그루를 벌목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그 초점을 올림픽으로까지 넓혔다. 세계적인 축제의 이면에 숨은 진실을 세계인들에게 알림과 동시에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호소하며 나아갔다. 세계인들이 전하는 숲 보호의 염원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그들의 연대를 인간 숲의 이미지로 형상화해 나간 작업이다.


109th 퍼포머

: Takis Kayal


- 국적: 그리스

- 촬영지: 아테네, 그리스


브라질리아나 측의 적극적인 호응 속에서 전시회를 준비했다. 이후에 연재할 글에서 좀 더 언급할 예정이지만 전시회는 무사히 개최되었다. 귀국 후 얼마가 지났을 무렵, 타키가 작품 판매 소식도 전해 왔다. 한 달 예정으로 시작된 전시회는 이후 상설 전시로 전환되었다. 행사의 제반 사항을 협의할 당시 타키가 추이를 봐서 전시 기간을 좀 더 연장해도 되느냐고 묻기에 그러라고 대답했었다. 전시가 최소 1년가량은 연장되었다는 것 같다.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어서 작품들을 한국으로 보내달라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사진의 배경은 브라질리아나가 운영하는 미니 마켓이다.


110th 퍼포머

: Antonio Caroli


- 국적: 이탈리아

- 촬영지: 그리스, 아테네


그리스에서 거주 중이던 이탈리아인 안토니오를 만난 곳은 길거리아고라를 찾아가는 중이었는데 그가 아고라의 위치를 안다면서 나를 그 앞까지 직접 데려다주었다. 이후 남은 하루를  안토니오와 함께 보냈다. 아고라 관람 후 그와 함께 브라질리아나에 가서 사진전 준비 작업을 했고, 다시 그의 집으로 이동해 저녁 식사를 들었다. 안토니오가 요리한 음식은 파스타였다. 밤에는 새해를 앞둔 아테네의 표정을 구경하기 위해 주요 광장들을 돌아다녔다. 신년맞이 콘서트도 감상했고, 불꽃놀이도 구경했다. 활기차고 호의적인 안토니오 덕분에 기분 좋고 훈훈한 연말을 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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