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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Feb 22. 2019

44. 산토리니는 그런 곳이 아니다_산토리니, 그리스

미디어가 바라보지 않은 풍경을 주목하라

외곽 풍경, 산토리니, 그리스




혼란에 휩싸였다. 그럴 만한 사건은 없었다. 국경을 넘는 야간 버스를 타고 목적지인 아테네에 무사히 도착해 숙소 여주인과 그녀의 친구들이 벌이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함께하며 여행의 풍류를 만끽하는 중이었다. 숙박객 중에서는 유일하게 초대에 응한 터라 파티 참석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어느 각도에서 봐도 혼란 따위가 닥쳐 올 틈은 없었다. 심신의 상태도 괜찮았다. 


혼란은 파티가 절정에 이를 무렵 찾아왔다. 겉으로는 멀쩡한데 마음이 길을 잃고 헤매기 시작했다. 뭔가 큰 실수를 범할 듯한 느낌이 들어 집중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힘이 달렸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평소에는 하지 않던 실수를 낮부터 연발하고 있었다. 이튿날 산토리니에 갈 계획이었는데 출발 시간을 잘못 확인해 엉뚱한 항공권을 끊었다. 그동안의 여행을 통틀어 처음 범하는 항공권 예약 실수. 항공 일정을 변경하느라 20유로의 변경 수수료를 물어야 했다. 이후에도 실수를 계속 연발했다. 아직까지는 사소한 수준이었지만 마음이 혼돈으로 소용돌이치는 상황에 맞닥뜨리고 보니 일련의 흐름이 수상쩍게 느껴졌다. 내면 어딘가에서 신화 속의 상징들도 술렁댔다. 아무래도 공간의 작용인 듯했다. 신화의 발원지 그리스가 도처의 상징물들로 무의식을 자극한 게 아닐까 싶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혼란이라면 문제를 야기하는 상황을 피하면 그만인데 소리 없는 아우성이어서 오히려 더 괴로웠다. 흔들리는 감정 때문인지 이전의 여행지들과는 다르게 아테네가 비현실적인 시공간으로 느껴졌다. 쇄도하는 혼란을 진정시켜 나가고자 했으나 벅찼다. 정신을 더 바짝 차려야 할 듯했다. 또 한 번의 성장통일까? 아니면 불운의 암시일까? 정신이 흐릿했다.  


파티 참석자 중 한 명이 시리아 난민 캠프에서 일하는 심리 상담사라기에 그녀에게 대화를 청했다. 내 상태를 꽤 깊이 이해하고 공감해 주는 그녀 덕분에 약간의 안정을 되찾았지만 짧은 시간에 완벽한 해결책을 찾기에는 무리였다. 처음 만난 사이였고, 일 년에 한 번밖에 누릴 수 없는 크리스마스 파티 자리였다. 그동안 여행하면서 숱하게 경험한 바, 서양에서 크리스마스는 연중 최고의 명절이었다. 특별한 시간을 누리고 있는 그녀에게 무거운 사정을 정도 이상으로 들이미는 건 행복으로 끓어오르는 냄비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일 터였다. 집중이 필요한 심리 영역의 대화를 길게 끌고 가는 건 예의가 아닐 듯했다. 파티를 마무리하고 자리에 눕자마자 불안과 피로감이 동시에 몰려들었다. 


아탈로스의 스토아(고대 아고라 박물관), 아테네, 그리스


다행히도 산토리니로 향하는 동안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비행기도 연착되지 않았고, 심지어는 추락하지도 않았다. 비행기가 내려앉은 곳은 진짜 산토리니였다. 예약해 둔 숙소에서 픽업을 나온 시각 역시 제 시각이었다. 픽업 차량 밖으로 펼쳐지는 지역 풍경도 아스라니 아름다웠다. 숙소의 외양은 내 외모보다 훨씬 예뻤고, 직원들은 내가 자주 찾는 홍대 앞 서점의 직원보다 몇 배 더 친절했다. 모든 게 순조로운 기분이었다. 혼돈에서 허우적거렸던 전날의 느낌이 여전히 생생했지만 알고 보면 별 일 아닌데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선은 여행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러다 보면 불안한 기운도 서서히 가시지 않을까 싶었다. 


짐을 둘러 메고 들어선 숙소의 라운지에는 몇 명의 여행자들이 앉아 있었다. 일부는 체크 아웃을, 나머지는 체크 인을 위해 대기하고 있는 듯 보였다. 나 역시 체크 인부터 해야 해 자리를 잡고 앉아 차례를 기다렸다. 그 사이 숙소에서 웰컴 커피를 내주었다. 옆 좌석에 유순한 인상의 남녀 한 쌍이 앉아 있기에 인사를 건넸다. 체크 인을 기다리고 있던 그들의 이름은 크리스티나와 실바인. 각각 독일과 캐나다가 고향인 국제 커플이었다. 장기 여행자들인가 보다 생각했는데 연말을 이용해 짧게 여행한단다. 리셉션에서 아직 청소가 마무리되지 않았다며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기에 두 사람과 계속해서 잡담을 이어나갔다.  


섬이 비수기에 접어든 지 오래인 데다가 현지의 대중교통 체계 역시 단조로워 홀로 산토리니에 발을 들인 나로서는 섬을 돌아다닐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택시를 불러 움직이자니 비용이 만만치 않고, 버스를 이용하자니 일부 지역은 방문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 스쿠터를 렌탈하는 방법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국제운전면허증을 챙겨 오지 않아 렌탈이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이틀 일정으로 차를 렌트했단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물었다. “캔 아이 조인 유?” 그들이 유순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스, 유 캔.” 


모니 프로피토우 이리오우 전망 언덕에서 내려다본 풍경, 산토리니, 그리스


체크 인을 끝내고 짐을 방에 부려 놓은 뒤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이 렌터카 안에서 신호를 보내 오기에 차량에 올랐다. 등받이의 각도를 조정한 실바인이 차량에 열쇠를 꽂았다. 그가 가속 페달을 밟자 렌터카가 그르릉거리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만땅으로 채워진 연료 때문인지 금세 섬 끝에 닿을 기세였지만 우리 셋 다 시장한 상태여서 인근 식당부터 먼저 들렀다. 고생스럽게 섬을 돌아봐야 했을 나로서는 천리마 한 필을 얻은 셈이기에 점심값은 내가 계산했다.


뱃속에 음식물을 채웠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여행에 나설 시간. 혼자 여행했다면 가보지 못하는 곳이 많을 것이기에 여행 동선의 설계는 두 사람에게 맡겼다. 섬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아 아무 방향으로나 운전대를 돌려도 어지간한 곳은 모두 닿을 수 있을 듯했다. 그렇지만 그들도 딱히 목적하는 곳은 없었다. 첫 만남부터 차분하고 느긋한 모습을 보인 그들이었다. 함께 체크 인을 기다리던 당시에도 떠들썩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역시나 함께 돌아다녀 본 바, 그들은 온화한 면모의 소유자들이었다. 큰 소리를 내는 일이 일체 없었고, 오히려 대화를 할라 치면 언제나 다소곳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가곤 했다. 더러 농담을 주고받으며 다 같이 크게 웃곤 했지만 그런 순간들마저도 유유했다. 함께하는 시간이 평온했다. 


산토리니는 예상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보기 좋은 부분만 오려서 노출하는 미디어의 습성으로 미루어 실체가 적잖게 과장되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미디어가 반복해서 노출한 장면들보다 현실 속의 모습이 훨씬 멋졌다. 미디어가 앞다퉈 다루곤 했던 비탈진 언덕에 하얀 가옥들이 도열한 풍경이나 푸르른 지중해를 배경으로 한 파란 지붕의 종탑도 근사했지만 미디어가 다루지 않는 광경들은 그보다 몇 갑절 더 아름다웠다. 이보다 더 낭만적일 순 없는 지중해 복판의 미려한 섬에서 사랑의 밀어를 쉴 새 없이 속삭이는 연인 틈에 방자처럼 껴 있다는 점만이 옥에 티라면 옥에 티였다. 그들과 함께 섬의 구석구석을 누비는 사이 승용차로만 접근할 수 있는 장소들을 포함해 많은 곳들을 가슴에 담았다. 눈부신 햇살 아래에서 빼어난 풍광들이 저마다의 맵시를 앞다퉈 뽐내 오던 순간들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듯했다. 


두 사람과 함께하는 동안, 혼란스러웠던 내면세계도 점점 안정을 되찾아 갔다. 심연이 꽤 격동된 상태였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다. 다정하고 온화한 두 사람의 우정과 산토리니의 원초적 기운이 나를 번갈아 어루만지는 사이 심신이 평온을 향해 나아갔다.


비탈진 마을의 반대쪽 풍경, 이아마을, 산토리니, 그리스




# 글로벌 사진 프로젝트 <I am a forest> 

숲 보호와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주제로 한 사진 프로젝트. 레고랜드의 춘천 무인도 벌목 사태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는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3일짜리 스키점프 경기를 위해 강원도 가리왕산의 500년 된 원시림 5만 그루를 벌목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그 초점을 올림픽으로까지 넓혔다. 세계적인 축제의 이면에 숨은 진실을 세계인들에게 알림과 동시에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호소하며 나아갔다. 세계인들이 전하는 숲 보호의 염원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그들의 연대를 인간 숲의 이미지로 형상화해 나간 작업이다.


107th 퍼포머

: Christina Zierold


- 국적: 독일

- 촬영지: 산토리니, 그리스


산토리니를 누비는 차량 안에서 크리스티나는 프로젝트를 발전시킬 수 있는 아이디어를 계속 쏟아냈다. 독일의 경우 벌목이 예정된 나무에 순번 표식을 부착하는데 나중에 전시회를 열 때 사진을 나무에 전시하면서 참여자의 순번을 나무의 벌목 번호와 일치시키면 어떻겠냐는 제안도 했다. 강제적인 생명 단절이 얼마나 무자비한 일인지를 상기시킬 수 있을 거라는 설명이었다. 다음에는 플라스틱으로 인한 환경오염을 프로젝트화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해 오기도 했다. ‘숲’ 하나도 벅찬지라 플라스틱에 도전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신뢰의 마음이 느껴져서 무척 고마웠다. 



108th 퍼포머

Sylvain Guimond


- 국적: 캐나다

- 촬영지: 산토리니, 그리스


그리스를 여행하면서 가장 안타깝게 느껴졌던 부분은 국가 부도로 인한 사회 붕괴였다. 부도 이후 국가 전체가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풍경을 매일 마주쳤다. 현지인들 역시 참담한 경제 환경을 자주 언급했다. 짓다 만 건물들 역시 그리스가 겪는 고통을 증언했다. 세계적인 관광지인 만큼 산토리니는 괜찮을 줄 알았으나 그 사정은 본토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섬을 구경하는 동안 짓다 만 건물 여러 동을 발견했다. 하여 그리스에 생명력이 다시금 움트기를 바라는 마음을 사진에 담았다. 결과물을 본 크리스티나가 철근이 보기 흉하게 잘 튀어나왔다면서 무척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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