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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Feb 21. 2019

43. 고독한 너의 이름은 선구자_쉬코드라, 알바니아

지평을 여는 자, 고독을 훈장처럼 끌어안을 것

로자파 요새에서 바라본 주변 풍경, 쉬코드라, 알바니아




경험의 지평은 생경한 장소들을 통해서도 넓어지고 있었다. 낯선 만큼 자극이 컸고, 자극의 크기만큼 시야가 넓어졌다. 이래저래 번다한 여정이어서 내면에서 일어나는 모든 작용을 낱낱이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무의식에서는 성장의 움직임이 꽤 활발하게 일고 있을 터였다. 생소한 풍경은 알바니아로 향하는 길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한참 동안 낯선 장면들을 훑던 버스가 번화한 교차로의 한쪽에 멈춰 섰다. 여행이 중반을 넘어설 때까지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곳. 알바니아 북부의 도시 쉬코드라였다.  


몬테네그로의 수도 포드고리차에서 두 시간도 안 되는 거리건만 내 눈 앞에 펼쳐진 쉬코드라의 풍경은 포드고리차의 그것과 많이 달랐다. 현지인들이 자신들의 사회 환경을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많이 낙후된 편이라고 설명했던 포드고리차는 쉬코드라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낡은 외투를 입고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이며, 디자인의 불모지임을 확신하게 해 주는 촌스러운 간판들이며, 외벽이 거칠게 쓸려 나간 낡은 건물들에 이르기까지 고개 돌리는 곳들마다 신산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슬람 문화가 만들어 내는 풍경들까지 그 위에 더해지니 흡사 시간 여행이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숙소가 보여주는 모습도 거리에서 본 광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겨울이 성큼 다가왔음에도 숙소는 노화된 난방 시설만으로 계절을 견디는 중이었다. 난방을 가동한다고 해도 열이 미치는 범위는 공용 거실 정도에 불과했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마당으로 연결되는 현관 쪽에 비닐하우스 형식의 돌출 공간을 만들어 찬바람의 유입을 어렵사리 차단하고 있었다. 싸늘한 객실 침대 위에는 두툼한 이불 여러 장이 포개진 채로 놓여 있었다. 그 정도는 덮어야 밤을 넘길 수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외투를 걸치고 잠자리에 들어야 할 듯했다. 미온의 이불 속과 호흡기 근처의 찬바람이 만들어 내는 대비를 느끼며 새벽을 견디는 내 모습이 눈에 선했다. 현지인들의 생활환경도 숙소와 크게 다르지 않을 듯했다. 


맑은 날씨를 그대로 두기 아까워 카메라를 메고 거리로 나섰다. 도시를 뒤덮고 있는 쇠락한 풍경들이 기분을 헛헛하게 만들었지만 그에 질세라 강렬한 햇살이 시가지에 열기를 불어넣었다. 무수한 발길에 마모된 길바닥이 제 몸통 위로 쏟아지는 햇볕의 힘을 빌려 거대한 거울로 변신하는 모습이 은근한 장관을 만들어냈다. 그 길 위로는 삶을 끈질기게 버텨온 듯 보이는 중장년들이 다부진 어깨를 굼실거리며 걸었다. 옷매무새에 제법 힘을 준 청년들도 그 길 위를 씩씩하게 누볐다. 그 사이로 자전거들이 지날 때마다 거리가 역동적인 풍경을 펼치고 접길 반복했다. 


중앙로의 풍경, 쉬코드라, 알바니아


한참 동안 중앙로를 구경하다가 뒷골목에 들어섰다. 눈길을 잡아 끄는 낡고 녹슨 건물들이 걸음을 자주 멈춰 세우고 있었다. 알바니아도 근래에 내전을 겪었다. 1990년대 말, 부패한 정부가 대대적인 금융 사기를 벌이면서 국가 전체가 혼란 정국에 휩싸였다. 정부군과 시위대 사이에 밤낮 없는 총격전이 벌어지던 당시, 거리에서는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총을 들고 다녔다. 그때의 흔적인지는 모르겠지만 벽면이 잔뜩 파손된 건물들의 모습은 당시의 장면을 상상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인상적인 골목이나 건물이 등장할 때마다 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기를 한참. 어느 길목 모서리에서 정신없이 셔터를 누르고 있는데 누군가가 불쑥 말을 붙여왔다. 뒤를 돌아보니 이름 모를 현지 청년 하나가 서 있었다. 직업적으로 사진을 찍냐고 묻기에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더니 그가 자신도 사진을 찍는다면서 휴대폰에 저장해 둔 자신의 작업물들을 나에게 내밀었다.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몇 곳의 볼거리를 더 들러야 해 저녁에 시간이 되면 보자는 얘기를 남기고 헤어졌다. 


이후 몇몇 장소를 더 돌아다니다가 석양이 도시 위로 내려앉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감상한 후 숙소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각광받는 여행지도 아닌 데다가 계절마저 겨울에 접어들어서인지 다른 여행자들의 모습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숙소에 도착해서 인터넷을 확인해 보니 아까 길에서 만났던 현지 청년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저녁 언제쯤 볼 수 있느냐는 물음. 수 시간 동안 추위에 시달린 터라 숙소에서 쉬고 싶었으나 그의 메시지에서 환대의 마음이 물씬 느껴져 피곤을 뒤로하고 약속을 잡았다.  


수고스럽게 숙소까지 찾아와 준 그의 안내로 시내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한 시간쯤 함께 돌아다니다가 이 정도면 됐다 싶어서 그에게 술이나 한잔하자고 제안했다. 날씨가 꽤 추워진 상태라 따뜻한 실내 공간으로 찾아들어 가 몸을 녹일 참이었다. 그런데 지역 명소를 훤히 꿰고 있는 그가 나에게 제안한 곳은 실내 펍이 아니라 노천 바였다. 이 추운 날씨에 노천 바가 웬 말인가 싶었지만 현지 문화인가 싶어서 잠자코 그의 뒤를 따랐다. 다행히도 노천 바 앞에는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다. 그 주변으로 서민적인 차림의 사내들이 둘러 모여 불을 쬈다. 불길은 꽤 거셌지만 찬 바람의 기세도 만만치 않아 어깨가 자주 시렸다.


중앙로에 자리한 노천 바, 쉬코드라, 알바니아


나를 노천 바까지 이끈 친구의 이름은 에리. 감각적인 패션으로 무장한 청춘치고는 태도가 꽤 진지했는데 무엇보다 사진에 대한 애착이 상당했다. 특히 순수 예술 사진에 대한 집념이 강렬했다. 삶의 애환이 담긴 장면을 선호하며 주로 흑백으로 작업을 한다고 했다. 현지에는 상업 사진에 대한 수요만 존재하고, 지역의 포토그래퍼들 역시 예술 사진을 찍고자 하는 의지는 없다며 정체된 현지 예술의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거리에서 처음 만났을 당시 에리가 보여 준 작업물 중에는 누드 사진도 있었다. 인터넷에도 공개했다는데 지역에서 누드 사진을 찍어 외부에 공개한 사례는 자신이 처음이라고 했다. 현지의 풍토가 상당히 보수적인 데다가 엄연한 예술 작품인 누드를 예술로 보지 않고 선정적인 성인물처럼 취급한단다. 에리가 보여준 누드 작품은 흑백이었는데 무척 감각적이고 아름다웠다. 지역 최초로 대중에게 공개한 누드 사진이라는 영예를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노천 바에서 맥주를 마시는 동안 여러 명의 현지인들이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일부는 에리와 아는 사이인 듯했다. 대부분 인간미가 넘쳤지만 인습에 단단히 장악당한 모습도 적지 않게 눈에 띄었다. 여성을 소비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며, 국가주의의 강력한 흔적들까지 불편한 장면들이 자주 끼쳐왔다. 에리에게 보수적인 지역 문화의 압력은 생각보다 거셀 듯했다. 그러한 환경을 거스르며 누드 사진이라는 지평을 새로이 열었지만 그만큼 고독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었다. 선구자는 언제나 그런 법이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에리가 내딛은 첫걸음은 그 자체로 지역 문화계에 새로운 자극일 듯했다. 에리의 뒤를 따를 이들이 낡은 문화를 계속해서 혁파해 나갈 모습을 상상하며 맥주를 홀짝였다. 


술값은 내가 냈다. 엉덩이를 긁적거리는 에리의 모습에서 술값이 없다는 사실을 직감하기도 했지만 자청해서 지역을 구경시켜 준 데 대해 보답을 하고 싶기도 했다. 무엇보다 예술을 향한 그의 집념을 약소하게나마 응원하고 싶었다. 


중앙로의 풍경, 쉬코드라, 알바니아




# 글로벌 사진 프로젝트 <I am a forest> 

숲 보호와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주제로 한 사진 프로젝트. 레고랜드의 춘천 무인도 벌목 사태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는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3일짜리 스키점프 경기를 위해 강원도 가리왕산의 500년 된 원시림 5만 그루를 벌목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그 초점을 올림픽으로까지 넓혔다. 세계적인 축제의 이면에 숨은 진실을 세계인들에게 알림과 동시에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호소하며 나아갔다. 세계인들이 전하는 숲 보호의 염원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그들의 연대를 인간 숲의 이미지로 형상화해 나간 작업이다.


106th 퍼포머

: Eri Erjon Lumaj


- 국적: 알바니아

- 촬영지: 쉬코드라, 알바니아


낮에 거리에서 처음 만나 이야기를 나눴을 당시 에리가 내 SNS 계정을 묻기에 주소를 알려 주었는데  이후 에리가 내 타임라인을 구경했던 모양이다. 저녁에 다시 만나 도심을 구경하고 다니는데 에리가 내 SNS 계정을 언급하며 'I am a forest'라는 타이틀로 찍힌 사진들이 뭐냐고 물었다. 내용을 설명해 주었더니 의미 있는 프로젝트라고 평한 에리. 노천 바에서 맥주를 마신 직후, 근처의 보행자 전용 도로에서 그를 촬영했다. 무표정을 선호한다기에 그러라고 했다. 가로등을 이용한 야간 촬영이다 보니 모노톤의 사진이 나왔다. 흑백 사진을 좋아하는 애리에게 잘 어울리는 결과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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