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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Feb 20. 2019

42. 손님을 신처럼 대접하라_포드고리차, 몬테네그로

내 가슴팍에 살결을 문대 오는 이 남자

뒷골목 풍경, 포드고리차, 몬테네그로




"포드고리차는 2시간이면 관광을 끝낼 수 있을 정도로 볼거리가 없는 곳인데 3박 4일간 묵겠다는 네 계획 확실한 거니?" 알렉산더가 보내온 답장의 내용이 영 찜찜했다. 명색이 한 나라의 수도이니 최소 사나흘은 묵어야 하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후에도 현지인을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말을 반복했다. 유럽에서 가장 볼거리가 없는 수도, 갈 필요가 없는 곳 등의 표현이 줄을 이었다. 그런 포드고리차에서 10박 11일을 묵었다. 일정을 지체시킨 최고의 공신은 알렉산더였다. 아침마다 솔깃한 제안을 내놓으며 내 발목을 붙들었다. 체류 내내 알렉산더의 원룸을 거점으로 삼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몬테네그로에서 머문 12박 13일의 대부분을 그와 함께 생활한 셈이었다.  


러시아인 유학생 알렉산더는 포드고리차에서 버스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닉시치의 한 대학원에서 스포츠 매니지먼트를 전공하고 있었다. 사진전을 열었던 닉시치의 복합 문화 공간 프로파간다를 소개해 준 이도 알렉산더였다. 학교를 오가면서 종종 들르는 곳이라고 했는데 가서 보니 감각적인 내부의 꾸밈새와 좌석을 가득 메운 지역 청년들의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운영자인 라트코를 만나 전시회 개최를 타진했고, 프로파간다 측의 상당한 협조 속에서 사진전을 성황리에 마무리했다. 


사실 사진전은 나와 프로파간다만의 이벤트가 아니었다. 알렉산더의 것이기도 했다. 학업을 위해 포드고리차에 온 알렉산더는 어느 날엔가 현지에서 하고 싶은 일 목록을 쭉 적어 내려갔는데 그중 하나가 전시회 개최였다. 국민 여배우가 운영하는 공간을 알려 준 이도 알렉산더였는데 내가 마지막 담판을 짓고 귀가해 전시회 개최 논의가 결렬되었다는 소식을 전하자 알렉산더는 자신이 거절당한 것처럼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위시리스트 이야기를 꺼냈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포드고리차 정착 초기에 위시리스트를 작성했고, 그중의 하나가 전시회를 기획해 개최하는 것이었단다. 자력으로 작업물을 생산할 수 있는 예술가가 아니어서 뜬구름 같은 일로 그칠 수 있었는데 때마침 내가 등장해 성취 목록 하나를 성사시킬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했다. 


알렉산더는 “이제 전시회 개최는 너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이라며 자신도 힘껏 움직여 보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후 알렉산더는 상당한 애정과 관심으로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나를 자극했다. 국민 여배우에게 일격을 당하면서 의욕이 격감한 상태였으나 다시 힘을 내기로 했다. 전시 공간을 알아보기 위해 다시 거리로 나섰다. 알렉산더가 알려 준 또 하나의 공간인 포드고리차 문화센터에도 찾아가 보았고, 혼자서 다운타운을 돌며 복합 문화 공간으로 보이는 곳들에 찾아 들어가 전시가 가능한지 타진하기도 했다. 그는 나를 위해 뛰었고, 나는 그를 위해 뛰었다. 나 혼자만의 일이었다면 전시를 다음으로 미뤄도 그만이었지만 알렉산더가 자신의 일처럼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그의 위시리스트에 실패의 흔적이 남을 걸 생각하니 넋 놓고 있을 수가 없었다. 위시리스트에 완료 표시를 하며 미소를 지을 알렉산더의 모습을 상상하며 열심히 뛰어다녔다. 여러 곳의 문을 두드린 끝에 프로파간다를 만났고, 순조로운 분위기 속에서 전시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전시회 성사 소식에 알렉산더는 나만큼 기뻐했다. 


알렉산더가 사랑한 와인, 비르파자르 와인 축제, 몬테네그로


우여곡절을 함께 겪은 만큼 알렉산더와의 사이는 아주 돈독했다. 몬테네그로에서 체류하는 내내 둘이서 자취방 룸메이트처럼 지냈다. 함께 생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알렉산더는 예비 열쇠 꾸러미도 통째로 내주었다. 하루에 한두 번씩 같이 장을 봤고, 시간이 맞으면 함께 시내를 돌아다녔다. 음식도 만들어 나눠 먹었고, 인근 식당에서 외식도 했다. 식사 시간이 임박할 때마다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첫마디는 “오늘 우리 뭐 먹지?”였다. 알렉산더가 겨우내 사용할 월동용 히터를 구입하기 위해 시내를 함께 뒤지기도 했고, 알렉산더가 하굣길에 사 들고 온 와인을 저녁 내 나눠 마시기도 했다. 평소 말수가 적고 점잖은 알렉산더였지만 와인을 마실 때는 부산스러웠다. 자신의 음주 속도에 보폭을 맞춰 달라고 자주 칭얼거렸는데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속도를 그대로 유지했다. 물론 권주에 담긴 마음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워낙 격의 없이 지내다 보니 알렉산더와 함께 여행자들도 호스팅했다. 내 뒤를 이어 두 명의 대만 여행자들이 차례대로 묵었는데 그중 하나가 유웨이였다. 알렉산더가 학교에 간 날에는 예비 열쇠 꾸러미를 소지한 내가 게스트를 챙겼다. 게스트는 필요한 게 있으면 나에게 물었고, 나는 알렉산더의 방을 뒤져 게스트가 필요한 것을 찾아 주었다. 주방을 사용해도 되냐고 물어오면 내 공간인 것마냥 태연한 표정으로 승낙 의사를 표했다. 게스트 주제에 다른 게스트를 대접하고 안내하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지만 내 행동이 뻔뻔스러우면 뻔뻔스러울수록 알렉산더는 더욱 안심하고 외출을 했다.  


여느 러시안 사내들이 그렇듯 알렉산더도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 과묵한 언행 속에도 감정은 숨어 있었다.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나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저녁이면 알렉산더는 산책에 동행해 달라고 청해왔다. 나 역시 산책을 좋아해 대개는 군소리 없이 외투를 걸쳤지만 가끔은 쉬고 싶을 때도 있었다. 알렉산더의 산책은 무척 긴 편이어서 한 번 밖으로 나가면 최소 1시간은 돌아다녀야 했다. 내가 오늘은 곤란하다는 의사를 표시하면 알렉산더는 근엄한 표정으로 투정을 부렸다. 과묵한 모습 속에 숨어 있는 애교의 발산이었다. 몇 차례 거절을 하다가 러시아식 애교의 파괴력이 대단하구나 생각하며 신발을 신곤 했다. 


알렉산더와 산책하던 모라차 강변, 포드고리차, 몬테네그로


갈등 아닌 갈등도 있었다. 알렉산더는 나에게 여행이나 인생과 관련해 다양한 질문을 던져오곤 했는데 질문의 내용이 불분명하거나 너무 추상적이다 싶으면 대답 대신 질문의 요점을 반문했다. 이따금 고정관념을 바탕으로 한 물음을 내밀기도 했는데 그때는 대답 대신 질문이 안고 있는 맹점을 언급했다. 질문이 와 닿지 않았을 뿐 대화를 비틀 생각은 없었다. 다른 생각 주머니를 찬 채로 형식적인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 평화로운 분위기를 만들어 보겠답시고 상대에게 비위를 맞출수록 관계는 겉돌았다. 당시에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지만 되돌아보면 관계는 늘 주변만을 배회했다. 진솔한 소통을 위해서는 나 자신부터 있는 그대로 먼저 드러내야 했다. 모르면 모른다, 이해가 안 되면 이해가 안 된다, 못 들었으면 못 들었다,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서로에게 유익했다. 


내가 그런 식으로 반응할 때마다 알렉산더는 왜 한 번도 고분고분 대답하는 적이 없냐며 칭얼거렸다. 단순한 마음으로 질문을 했을 뿐인데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매번 예기치 않은 생각거리를 떠안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알렉산더는 내 반응을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잠시 군시렁거린 후 먼 곳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그 이튿날 내 대답과 관련해 새로이 생각한 점들을 전해왔다. 그런 식의 대화를 날마다 반복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들로만 보면 자취방 룸메이트처럼 지냈던 게 사실이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알렉산더와의 관계에서는 준 것보다 받은 것이 많았다. 몬테네그로에서 머무는 동안 알렉산더는 내 쉼터이자 피난처, 지지대이자 버팀목이었다. 그의 배려와 도움 덕분에 따뜻하고 평온한 나날들을 누릴 수 있었다. 어느 날 알렉산더에게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 주느냐?"고 물었다. 러시아 정교회 신도인 알렉산더가 대답했다. "성경이 이르길 손님을 신처럼 대하라고 그랬거든." 알렉산더는 나뿐만 아니라 자신의 집을 거쳐간 모든 게스트에게 최선의 호의를 베풀었다. 나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꾸준한 배려와 보살핌이었다. 


몬테네그로 자취방 체험의 마지막 순간. 길 위에서 숱하게 포옹을 해 왔지만 시종일관 과묵했던 알렉산더였기에 포옹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였다. 열흘 이상을 함께 지내면서 알렉산더가 진중한 모습 안에 깊은 감정을 숨겨 두고 있다는 사실은 진작에 알아차린 상태였다. 그렇지만 내 눈 앞에 서 있는 알렉산더의 실사 버전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근엄했다. 아무래도 포옹은 생략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할 찰나, 그가 갑자기 내 품을 파고들었다. 그냥 파고든 것이 아니라 내 겨드랑이를 뱀장어처럼 꾸물꾸물 파고들며 나를 꼬옥 끌어안았다. 지난 십 수 일 간 경험한 바로 알렉산더는 그런 행동이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었다. 다른 여행자들에게도 그런 식의 작별 인사는 하지 않았다. 물컹한 그의 가슴살이 내 가슴살 위에서 출렁거렸다. 젖꼭지 주변을 문대 오는 그의 살결이 멀미를 유발했지만 헤어지는 아쉬움도 그만큼 컸다. 


알렉산더와의 카페 타임, 포드고리차, 몬테네그로




# 글로벌 사진 프로젝트 <I am a forest> 

숲 보호와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주제로 한 사진 프로젝트. 레고랜드의 춘천 무인도 벌목 사태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는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3일짜리 스키점프 경기를 위해 강원도 가리왕산의 500년 된 원시림 5만 그루를 벌목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그 초점을 올림픽으로까지 넓혔다. 세계적인 축제의 이면에 숨은 진실을 세계인들에게 알림과 동시에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호소하며 나아갔다. 세계인들이 전하는 숲 보호의 염원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그들의 연대를 인간 숲의 이미지로 형상화해 나간 작업이다.


97th 퍼포머

: Alexander Darkovich


- 국적: 러시아

- 촬영지: 포드고리차, 몬테네그로


프로젝트의 자필 문구 작성을 두고도 대립이 있었다. 러시아 정교회 신도인 알렉산더는 프로젝트의 방향성에는 동의하지만 신이 우리에게 준 이름은 '인간'이라며 '숲'이라는 낱말을 '사람'으로 바꿔 적길 원했다. 은유의 의미와 기능을 열심히 설명했지만 알렉산더의 고집 역시 만만치 않았다. 결국 그가 원하는 대로 적기로 했다. 대신 '숲을 보호하는(to save a forest)'이라는 수식어를 덧붙이겠다기에 그러라고 했다. 논쟁은 팽팽했지만 줏대 있는 그 모습이 내심 좋았다. 얼마 전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몬테네그로에서 학업을 마친 후 모스크바로 복귀해 일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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