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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Feb 27. 2019

49. 베풂으로써 행복을 누리는 여자_아테네, 그리스

호된 잔소리마저 음표의 물결처럼 다정하던 그녀

에레크테이온 신전, 아크로폴리스, 아테네, 그리스




전시 준비에 착수했다. 3주간의 방랑을 마치고 아테네로 돌아왔다는 얘기다. 전시 개막일까지 터키와 몰타를 전전하는 동안 뜻하지 않은 사건들에 시달려야 했지만 모든 일들을 지나친 이후라 마음이 가벼웠다. 더욱이 내 이름을 건 전시회가 고대 예술의 발원지인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리기 직전이었다. 긴 여정으로 인해 고갈되었던 열정이 다시금 솟구치기 시작했다. 타키가 남은 일들을 처리해 주겠다고 약속했으니 전시 개막일에 몸만 내밀어도 상관없었으나 준비 작업도 직접 했다. 다시 아테네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타키에게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하고 싶었다. 자립의 조건을 탐색하기 위해 선택한 여행이었고길 위에서의 깨달음을 하나씩 실천으로 옮겨 오고 있었다. 여행의 대미를 장식할 행사이니 남은 힘을 모두 쏟아부어야 할 터였다. 


준비 작업이라고 해 봐야 할 일은 별로 없었다. 터키로 떠나기 전, 전시에 어울리는 규격으로 사진을 인화한 후 액자를 구입해 표구 작업을 해 두었다. 내가 이스탄불과 몰타를 여행하는 동안 브라질리아나 측에서는 배너를 만들고 이벤트 페이지를 개설해 행사 홍보 작업을 벌였다. 남은 일이라고는 작품 설치가 전부. 그런데 작품을 설치하다가 액자 두 개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유리가 산산조각 나면서 사진에도 손상이 생겼다. 사실은 액자들이 스스로 낙하했다. 그중 한 점은 현지인과 여행자 들 사이에서 가장 압도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작품. 행사를 치를 때마다 늘 있는 일이라 별로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다른 때 같았으면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스탄불에서 푸닥거리를 한 직후여서 별스럽지 않은 일로 느껴졌다. 그러려니 하며 사진을 다시 인화하고 액자도 새로 구매해 이빨이 빠진 전시벽에 작품을 채워 넣었다. 이로써 모든 준비 작업을 마쳤다.  


작품을 설치하는 동안 현지 여성 한 명이 다가와 작품들이 멋지다면서 내 SNS 계정을 따갔다. 현지에서 활동하는 사진작가라는데 전문가가 긍정적으로 평해 주어 기분이 좋았다. 그닥 섹시하지 않을 나 자신이 일순간 섹시하게 느껴졌다. 작품 설치까지 마무리했으니 행사 개최 당일 정체를 드러내는 일만 남았다. 그러고 나서 한 이틀 쉬다가 귀국길에 오르면 된다. 한 달로 예정된 전시가 끝난 후 타키가 선박편으로 작품들을 한국까지 보내 주겠다고 했으니 신경 쓸 거리도 거의 남지 않은 상황. 고향을 향해 곧게 뻗은 활주로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9부 능선 위에서 호흡을 골랐다. 


시장 골목의 휴일, 아테네, 그리스


행사 당일 저녁, 현지에서 사귄 친구들 몇 명이 브라질리아나를 찾아왔다. 터키로 떠나기 전 연말연시를 함께 보냈던 안토니오가 친구들을 이끌고 온 것이었다. 안토니오는 사진에 대한 관심이 컸는데 그만큼 전시회에 대해서도 궁금증이 많았다. 맥주와 그리스식 먹거리들이 놓인 테이블 위로 유쾌한 목소리들이 뛰어다녔다. 작품들에 대한 안토니오의 호평에 이어 같은 직장에 근무한다는 소피도 기분 좋은 평가를 내놓았다. 색감이 풍부한 점이 마음에 들며, 같은 이유로 어느 유명 작가의 작품을 연상시킨단다. 색감이 풍부하다는 점만 유사할 뿐 여러 가지로 다른 부분이 많은데 그래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를 언급하기에 내심 흐뭇했다. 모델 일을 한다는 에피도 인상적인 작품들이 여럿이라고 나를 추켜세웠다. 접대용 멘트들인지 진심들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려웠지만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튿날 저녁에는 율리가 자신의 친구인 린다를 이끌고 전시장을 찾았다. 율리는 내가 아테네에서 묵고 있는 호스텔의 주인. 전시회를 성사시키고 준비 작업을 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준 친구였다. 아테네에 첫발을 디딘 날이 크리스마스였는데 특별한 날이라고 호스텔에서 파티가 저녁에 열렸었다. 운영자인 율리, 마리아 자매가 친구들을 초대해 호스텔 라운지에서 크리스마스 잔치를 벌인 것. 파티 참석자들의 권유로 자리에 합류하게 되었는데 모두가 친근하고 다정한 태도로 나를 맞아 주었다. 음식도 나눠 주어서 그리스의 전통 음식을 포함해 이것저것 많이 얻어먹었다. 그리스의 독주인 라키도 몇 잔 마셨다. 라키는 발칸 반도에서는 ‘라키아’라고 부르는 50도 전후의 전통주로, 반도 전체가 똑같은 양조 방식을 공유하면서도 나라마다 자신들의 것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파티 참석자들 대부분이 사진을 좋아한다기에 한국에서 인화해 간 사진들도 보여 주었다. 예상보다 좋은 반응들을 보이는 데다가 크리스마스 당일이기도 해서 각자가 마음에 들어하는 사진 한 장씩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건넸다. “크리스마스날 이런 선물은 아주 오랜만에 받아 본다”고 말하며 소녀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이는 율리의 모습이 나를 덩달아 행복하게 만들었다. 동생인 마리아도 자신이 점찍어 놓은 사진을 손에 넣으며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작은 선물이긴 하지만 나누는 마음이 흡족했다. 


율리와 그녀의 친구들이 벌인 송년 모임에 참석했다가 한 컷, 아테네, 그리스


크리스마스 파티 이후로 다른 숙박객들보다 더 후한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근무자 전원이 친절한 숙소였지만 나한테 쏟아붓는 친절은 다른 여행자들에 비해 몇 갑절이었다. 마치 절친이 운영하는 숙박 시설에 특별 손님으로 초대받아 묵는 느낌이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숙소가 붐비던 날에는 무료로 잠자리를 제공받았다. 한 번도 감개무량한데 두 번이나 그랬다. 


산토리니 여행을 마치고 복귀했을 때, 호스텔은 이미 만석이었다. 산토리니로 떠나기 전에는 그렇게까지 붐비지 않았기에 예약 없이 복귀했는데 남은 침대가 없다는 소식. 자정이 가까워진 시각이라 다른 숙소를 찾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낭패였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율리의 동생이자 호스텔의 스탭인 마리아가 외부에 있던 율리에게 유선으로 상황을 알렸다. 통화를 마무리한 마리아가 응접실에 놓인 소파에 잠자리를 깔기 시작했다. 뽀송뽀송하게 세탁한 이불과 베개도 꺼내 그 위에 얹었다. 응접실과 라운지를 가로지르는 여닫이문을 닫으면서 마리아가 말했다. “피곤할 텐데 푹 쉬어.” 숙박비는 받지 않았다. 터키와 몰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날에도 남은 침대는 없었다. 이번에는 다른 스탭이 라운지 소파에 잠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물론 율리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숙박비는 받지 않았다. 청결하게 세탁한 베개와 푹신푹신한 이불이 나를 금세 곯아떨어지게 만들었다. 그 밖에도 거의 모든 상황에서 최상의 호의를 경험했다. 


전시회를 개최할 장소로 브라질리아나를 권해 준 이도 율리였다. 전시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퍼부었다. 사진전과 관련해 최고의 조력자는 율리와 마리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날마다 진행 경과를 물어보는가 하면, 홍보를 열심히 안 한다고 잔소리도 했다. 그랬던 율리가 바쁜 일정을 쪼개 전시장에 찾아왔다. 나름 대접한답시고 사진에 깃든 사연을 율리와 그녀의 동행자인 린다에게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이후 탁자에 둘러앉아 한담을 나눴다. 호스텔에서 다른 숙박객들보다 더 극진한 대접을 받는 느낌이라고 했더니 사실이라는 대답. 사실 숙소 운영자와 숙박객의 관계를 넘어선 지 오래였다. 이미 숙소를 친구네 집 드나들 듯 드나들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파티에 이어 그녀의 절친들이 한데 모인 연말 모임에 그녀의 친구 자격으로 참석해 시끌벅적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여행은 때때로 졸립고 피곤한 것, 아크로폴리스, 아테네, 그리스


율리는 헤르메스라는 이름의 반려견을 키웠다. 헤르메스는 올림포스 12 신 중 여행과 상업을 담당하는 신이자 소통을 매개하는 전령의 신. 신화의 왕국에서 나고 자란 이 다운 작명이었다. 헤르메스를 키운 지는 10년쯤 되었다는데 거의 자식 키우듯이 애정을 쏟았다. 누군가가 헤르메스를 해코지한다면 그를 죽일 수도 있다고 말할 정도로 사랑이 깊었다. 타인의 시선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나라에서 평생을 살아온 나에게는 놀랍도록 솔직한 발언이었다.  


율리는 늘 그런 모습이었다. 상대가 어떻게 자신을 평가할지 신경 쓰지 않고 마음이 가는 대로 말하고 행동했다. 복잡한 상황에 직면하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편이어서 호스텔 운영 정도가 자신이 감당할 수 사업의 최대 규모라고 설명하던 율리였다. 억만금을 벌 수 있다고 해도 그 이상으로는 사업을 키우지 않을 듯 보였다. 욕망에 충실한 삶의 태도가 그녀를 더욱 그녀답게 만들어 주는 듯했다. 자신이 마음을 연 대상에게 전적인 애정을 쏟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한 방식을 스스로도 만족스러워했다. 조건 없는 호의를 아낌없이 베풀어 준 율리와 마리아 그리고 호스텔의 식구들로 인해 그리스가 자주 그리워질 듯했다.


하루에도 수없이 마주쳤던 숙소 앞 풍경, 아테네, 그리스




# 글로벌 사진 프로젝트 <I am a forest> 

숲 보호와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주제로 한 사진 프로젝트. 레고랜드의 춘천 무인도 벌목 사태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는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3일짜리 스키점프 경기를 위해 강원도 가리왕산의 500년 된 원시림 5만 그루를 벌목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그 초점을 올림픽으로까지 넓혔다. 세계적인 축제의 이면에 숨은 진실을 세계인들에게 알림과 동시에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호소하며 나아갔다. 세계인들이 전하는 숲 보호의 염원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그들의 연대를 인간 숲의 이미지로 형상화해 나간 작업이다.


114th 퍼포머

: July


- 국적: 그리스

- 촬영지: 아테네, 그리스


율리는 지금도 나에게 전폭적인 우정을 보내오고 있다. 그녀의 호의가 어디에서 기인했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그녀의 인간미가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프로젝트 촬영에는 율리의 반려견인 헤르메스도 참여했다. 율리가 함께 촬영하고 싶다기에 그러자고 했다. 촬영 도중 헤르메스는 직립을 했다. 함께 삶을 꾸려온 둘이 깊은 애정으로 서로를 보듬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후에 이야기를 듣기로 헤르메스가 많이 늙은 데다가 뒷다리에도 이상이 있어서 직립을 하는 일은 아주 드물단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타이밍이 너무 절묘하다는 율리의 설명이었다. 어쨌거나 훈훈한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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