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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Feb 28. 2019

50. 너희가 인간의 이상을 기억하느냐_아테네, 그리스

자연 파괴를 서슴지 않는 인류의 행위에 분노한다

새해 첫날의 휴일을 기해 관광객의 출입이 통제된 아크로폴리스, 아테네, 그리스




아테네를 향한 사랑이 나날이 깊어졌다. 눈길을 사로잡는 풍경이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도시의 면면이 보면 볼수록 아름다웠다. 그리스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역사 유적 파르테논 신전은 한껏 웅장했고, 파르테논과 함께 에레크테이온 신전, 니케 신전 등을 나란히 어깨에 얹고 서 있는 아크로폴리스의 위용도 멋졌다. 그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도시의 풍모는 현대적이면서 또한 고풍스러웠다. 학문, 사상, 예술, 정치, 경제를 두루 포괄하며 복합적 시민 문화의 중심지로서 번성했다는 아고라의 모습도 근사했다. 민주주의가 탄생한 장소라는 이력에 걸맞은 공간의 모양새가 당대의 풍경을 짐작하게 했다.


아이킬로스, 소포클레스, 아리스토파네스, 에우리피데스 등 극예술의 효시격 작가들이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는 디오니소스 극장도 아크로폴리스의 바로 곁에서 존재감을 과시했다. 아크로폴리스를 조망하기 위해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아레이오스 파고스 언덕과 지금도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사용한다는 전통 음악당 헤로도스 아티쿠스 극장까지 그리스 문명의 귀중한 자산들이 한데 어우러진 유적 단지는 신화의 상징이자 고대 문명의 산실로서 손색이 없었다. 그로부터 몇 구역 건너에 자리한 하드리안의 도서관과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 그리고 이름 모를 수많은 유적들까지 마음을 건드려 오는 곳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내 눈에 비친 아테네는 한 나라의 수도를 넘어 인류가 함께 보살펴야 할 지구촌의 공동 자산이었다.


아레이오스 파고스 언덕에서 내려다본 도시 풍경, 아테네, 그리스


도시 곳곳에 포진한 수많은 광장들도 활기찬 기운으로 그리스의 건재를 알렸다. 최초의 헌법이 공포된 장소라는 아테네의 중심 신타그마 광장, 현대 아테네인들이 활발하게 경제 활동을 펼쳐나가는 오모니아 광장, 아크로폴리스가 굽어 보는 아래로 젊은 예술가들의 거리 공연이 이어지는 모나스티라키 광장 그리고 길모퉁이마다 불쑥불쑥 등장하는 도처의 크고 작은 광장들까지 수많은 현대 버전의 아고라가 그리스식의 역동성을 뽐냈다. 곳곳에서 마주친 모든 광경들이 그리스인들의 유쾌하고 낙천적인 품성을 저마다의 어투로 묘사했다. 공간과 음식과 문화와 역사와 사람에 이르기까지 마음에 드는 것 투성이인 아테네에서의 시간이 마지막 지점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었다. 이제 슬슬 떠날 준비를 시작해야 했다.


귀국을 코 앞에 두고 여행을 정리할 무렵, 내가 올림픽의 발원지에 와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가 ‘I am a forest’ 프로젝트였고, 그것을 촉발한 사건이 가리왕산 원시림을 파괴하고 있는 평창동계올림픽이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여행의 마지막 종착역이 다름 아닌 고대 올림픽의 기원 그리스였다. 올림픽 개막을 위해 지금도 성화를 채화하는 그 나라 말이다. 반도를 따라 내려오다 보니 발길이 닿았을 뿐 프로젝트의 의미를 염두에 두고 그리스까지 온 것은 아니었다. 진작부터 마지막 행선지 중 하나로 고려했으면서 참으로 엉뚱하게도 그리스가 올림픽의 성지라는 사실을 까닿게 잊은 채로 여기까지 왔다. 두 발을 그 땅 위에 깃대처럼 꽂아 두고도 그리스와 올림픽을 연결 짓지 못한 채 신화와 문명의 관점에서만 감탄을 거듭하고 있었다.


악기와 책과 음반으로 가득한 미미네 집, 아테네, 그리스


내가 올림픽의 기원이 된 곳에 와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 이는 호스텔의 스탭 중 한 명인 미미였다. 그의 본업은 음악. 콘트라베이스 주자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부업으로 클래식 기타도 가르쳤다. 토속 악기를 연주하는 다른 음악가들과 함께 전통 음악 기반의 밴드 활동을 펼치고 있기도 했다. 그리스가 극심한 경기 침체에 빠져들면서 기타 레슨에 호스텔 일까지 몇 가지 직업을 병행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안 그래도 예술가의 삶은 부침이 많은데 국가 전체가 경제 한파에 시달리다 보니 현지의 예술가들은 전보다 더 힘겹게 삶을 이어나가는 듯 보였다. 미미도 같은 상황에 처해 있었지만 그럼에도 예술을 향한 열정, 자유의지에 대한 갈망은 굳건하게 부여잡고 있었다. 그의 몸속 어딘가에서는 조르바의 피가 흐르고 있을 것이었다.


사진전을 개막하던 날, 미미는 친구 한 명을 대동해 전시장을 방문했다. 사진 이야기를 포함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미미는 ‘I am a forest’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공감을 표하며 숙소 인근의 숲 지대에서 촬영에 응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목소리가 차분하지만 단호한 음색으로 내 귀를 파고들었다.


약속 당일이 되어 미미를 만났다. 그의 안내로 숲 지대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우리가 찾은 곳은 필리파포스라는 이름의 큼지막한 언덕이었다. 뮤즈의 신전이 있었다고 해 뮤즈의 언덕으로도 불리고 있었다. 여행자들은 잘 모르는 곳이어서 조용하고 평화로울 거라고 했는데 역시 그의 말대로 풍요로운 녹음 사이로 고요가 한가득 흘렀다. 경치가 무척 수려하다는 전날의 설명도 사실이었다. 한쪽 편에서는 아크로폴리스 언덕 위에 우뚝 선 고대 유적들의 모습이 감탄을 자아냈고, 반대쪽 편에서는 아테네 앞바다에 부표처럼 떠 있는 작은 섬들이 햇살을 받아 보기 좋게 빛났다. 노을이 질 무렵에는 더욱 근사한 광경이 펼쳐졌다. 하루를 하얗게 태운 태양이 붉은 피를 토하며 수평선 위로 장엄하게 내려앉았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노을로서 손색이 없었다.  


필리파포스 언덕에서 내려다본 유적 단지, 아테네, 그리스


숲 지대를 거니는 동안 미미와 많은 얘기를 나눴다. 미미는 과도한 상업주의도 모자라 자연 파괴까지 일삼는 현대 올림픽의 운영 방식을 반대한다고 했다. 1960년대 히피 운동의 노선에도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총칼을 들이미는 권력의 하수인들에게 꽃 한 송이 건넨다고 그들이 감동에 겨워 총부리를 거두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겠느냐는 것이었다. 변화를 원한다면 그것을 현실화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는 의미로 읽혔다. 한국에서 새로운 화두로 부상하고 있는 실력 행사 방식의 시위와 맥락을 같이하는 이야기였다. 물리력의 사용 문제에 직면한 체 게바라가 깊은 고뇌 끝에 총을 들고 혁명에 나선 이유와도 맞닿았다. 그의 솔직한 의견들이 청량감을 선사했다.


숲 지대를 거닐면서 마음에 드는 장소마다 걸음을 멈추고 미미를 사진 찍었다. 마지막으로 사진을 촬영한 지점은 고대 유적들이 아크로폴리스 언덕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곳이었다. 촬영을 재개하면서 미미에게 미소를 주문했다. 부드러운 표정으로 촬영을 마친 미미가 말했다. “나는 성난 표정으로 촬영하길 원한다. 숱한 병폐로 얼룩진 현대의 올림픽과 끊임없이 자연 파괴를 일삼는 인류의 행위에 대한 내 감정은 성남 그 이상이니까.” 아크로폴리스 언덕 위에서 웅혼한 자태로 인간 세계를 굽어보는 파르테논 신전이 지혜를 관장하는 자신의 성신 아테나의 목소리를 빌려 이렇게 묻는 듯했다.


너희가 인간의 이상을 기억하느냐?


115번째 참여자인 미미를 마지막으로 ‘I am a forest’ 프로젝트는 막을 내릴 터였다. 내가 마지막 셔터로 길고 길었던 프로젝트에 종지부를 찍기 직전, 마지막 참여자이자 올림피아의 후예인 미미가 자필 메시지를 든 채로 말했다. 옹골찬 소신을 자신의 꼿꼿한 척추 위에 나란히 포갠 그의 목소리가 이글이글 불탔다.


“나는 현대 올림픽의 상업주의에 반대하며 사익을 위해 자연 파괴를 서슴지 않는 인류의 행위에 분노한다.”


석양을 내려다보다가 잠시 상념에 잠긴 미미, 필리파포스 언덕, 아테네, 그리스




# 글로벌 사진 프로젝트 <I am a forest> 

숲 보호와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주제로 한 사진 프로젝트. 레고랜드의 춘천 무인도 벌목 사태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는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3일짜리 스키점프 경기를 위해 강원도 가리왕산의 500년 된 원시림 5만 그루를 벌목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그 초점을 올림픽으로까지 넓혔다. 세계적인 축제의 이면에 숨은 진실을 세계인들에게 알림과 동시에 우리 안의 자연성 회복을 호소하며 나아갔다. 세계인들이 전하는 숲 보호의 염원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그들의 연대를 인간 숲의 이미지로 형상화해 나간 작업이다.


115th 퍼포머

: Mimis Sandalis


- 국적: 그리스

- 촬영지: 아테네, 그리스


다른 참여자들과 마찬가지로 미미도 뜻하지 않게 맺어진 인연이었다. 그런데 현대 올림픽의 사회적 문제를 겨냥한 'I am a forest' 프로젝트의 마지막 참여자인 그가 고대 올림피아의 후예일 줄이야. 게다가 누구보다 강력한 목소리로 프로젝트에 마지막 문장을 새겨줄 줄이야.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프로젝트를 오랫동안 끌고 온 나로서는 아주 뜻깊은 일이었다. 필리파포스 언덕 위로 울려 퍼지던 미미의 단호한 음성은 지금도 내 안에서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다. 귀중한 인연인 만큼 우정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며칠 전에도 그가 반가운 목소리를 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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