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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점직원 Sep 27. 2021

용서가 불가능한 구조

관료제 하의 관계 회복, 용서, 그리고 우울

용서라.


이게 가능한 구조가 있고 그렇지 않은 구조가 있다. 특히 관료제 하에선 관계회복이니 용서니 하는 말이 도무지 틈입할 수 없다. 전부 사무 관계로 엮이어 있어서다. 사무 관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공무적 지시와 수행으로 이루어지므로.


이 관계에서는 피해자도 가해자도 발생하지 않으므로 용서가 게재되지 않는다. 가해의 사과도, 용서의 배품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사무 관계에서 상처 줌이나 상처 받음이 없을 리가 없지만, 가해와 피해에 상응하는 지시나 수행이 발생하지만 용서를 통한 회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관료제가 이 용서의 메커니즘을 일부러 없앤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관료제가 사과함으로 발행할 수 있는 비효율을 하이어라키에 의한 적절한 지시로 대체해버린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시스템 하에서 가해와 피해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심리적, 신체적 가해는 시스템의 위계를 통해 공적 지시라는 위장된다. 비교적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 가해를 자주 일삼을 수 있다. 관료제가 요구하는 리더들이란 시스템 안에서 가해를 공적으로 할 수 있는 사람들이고, 대체로 그런 사람들이 성공하고 있고. 결국은 해소되지 않는 피해만 남아서 누적된다.


어쩌면 관료제의 가장 큰 폐해는 이것일 수도.


오늘 아침 예배설교는 주기도문의 용서에 관한 것이었다.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 물론 설교 자체는 늘 훌륭하다. 개신교의 사회에 대한 이해는 늘 부족하고 피상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나치게 개인에게 책임을 덧 씌운며 용서를 개인기에 의존하고 있고.


개신교의 설교, 이 정교하게 구성되어 발화된 교리해석과 영성지도는 과연 현대 사회의 곳곳에 제대로 적용될 수 있는가? 나는 도무지 관료주의 하에서 사과나 용서를 기대할 수 없는데? 성경의 문제인지 해석의 문제인지, 그것도 아니면 해석자의 문제인지.


우울증을 가지고는 신앙을 지켜가는 일이 점점 더 어렵다고 느껴진다. 이젠 신앙이 해법은 커녕 위로도, 즉 당의정의 역할도 못 해낸다. 인민의 아편도 되지 못 하는 신앙을 지켜서 나는 무엇을 하려는 걸까?


나 자신이 용서되지 않는 주일 아침.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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