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왜 타인을 사랑하게 되는가

사랑에 관한 고찰 - 첫 번째: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가?

by 김영진

프롤로그를 통해 나는 당신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

1. 사랑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실존의 문제다.

2. 모든 인간은 ①무엇을 ②어떻게 ③얼마나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고찰해야 한다.


1. 우리는 왜 사랑을 하는가?


감히 말하건대, 이것은 진리다.

인생의 결말은 오직 두 가지뿐이다. 숨이 다할 때까지 멈추지 않고 사랑을 해내거나, 끝까지 해내지 못해 결국 자살하게 되거나. 사랑하거나, 자살하거나. 반드시 둘 중 하나다. 예외는 없다.


혹자는 이 선언이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인생이 얼마나 보잘것없길래 고작 사랑놀음이 삶의 전부라 말하는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정말 그렇다. 당신 또한 지금까지 사랑을 해낸 덕에 여태 살아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글을 읽을 수 없었다.


어째서 그런가?


당신은, 그리고 거의 모든 인간은 자기 처지를 인지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 만큼 똑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처지란 것이, 차라리 당장 죽음을 선택하는 편이 합리적일 만큼 비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실존 조건이라 부른다. 쉽게 말하면 처지 또는 신세고, 고상하게 표현하면 존재하기 때문에 감당해야 하는 불변의 조건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신이 짊어지고 있는 실존 조건 몇 가지를 꼽아 보겠다.


먼저 프롤로그에서도 서술되었던 내던져짐(Thrownness, 피투성)이다. 글자 그대로 당신이 세상에 강제로 내던져진 존재라는 뜻이다. 당신은 태어날 시대, 국가, 집안, 성별, 외모 심지어는 태어날지 여부까지, 그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었다. 당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이 세상에 내던져졌다.

원시 시대에 태어나 곰에게 잡아 먹히는 인생을 살았던 사람도, 세계 대전 시대에 태어나 강제로 총을 들어야 했던 사람도, 평화로운 시대임에도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나 고생만 했던 사람도 모두 이 실존 조건의 피해자다. 단지 내던져졌다는 이유만으로 당신은 강요당한 삶을 살아내야 한다.

다음은 육체성(Corporeality)이다. 당신이 오직 육체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육체란 것이 알다시피 하자가 많다. 노화와 질병이 그 예다.

운이 좋아 당신이 상대적으로 우수한 환경에 내던져졌다고 하자. 그럼에도 당신은 필연적으로 늙고 아프게 된다. 아무리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다 한들 한순간 빛날 뿐이며, 아무리 건강하다 해도 잠깐이다. 반드시 닥쳐올 노화와 질병은 당신의 일상을 지옥으로 바꿀 것이다. 육체를 가진 존재인 한 당신은 필연적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내야 한다.


마지막으로 죽음이다. 당신은 반드시 죽는다. 이 명제를 보고도 두려운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당신은 죽음의 문제, 인간의 가장 큰 실존 문제를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애써 모른 체하고 있거나, 윤회든 천국이든 증명할 수 없는 논리로 죽음 이후의 삶을 무작정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당신은 합리적 존재이므로, 죽으면 모든 게 끝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여전히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 분명히 알고 있다. 죽음이 삶을 얼마나 무의미하게 만드는지를 말이다.

우주적 관점에서 당신이 살아갈 100년은 찰나다. 1초에 비유하는 것조차 과분하다. 그럼에도 비유해 보자. 1초 뒤 무너뜨릴 탑을 쌓는 일은 의미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 차라리 안쌓고 만다.

죽음이라는 실존 조건 앞에서 삶이 그렇다. 잠깐 존재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설령 무엇이 남더라도, 그조차 반드시 썩어 없어진다. 당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이미 죽어 있거나, 곧 죽을 것이기 때문에, 당신의 삶은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요약하면, 그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고, 늙고 병들어 고통받게 될 것이 뻔하며, 죽어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는 게 삶이다. 삶에 치르는 비용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을 셈해 본다면, 당장 죽는 것이 명백히 합리적이다.


모든 인간이 합리적 판단을 할 수 있다 했다. 그런데 당신과 나는 왜 아직도 자살하지 않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잠정적 대답은 사랑이다. 우리는 사랑을 해낸 덕분에 자살하지 않고 여태 살아있다. 오직 사랑만이 비참한 실존 조건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살게 한다. 유일한 생존 방법인 셈이다.

Q. 인간은 왜 사랑을 하는가?
A. 자신의 처지를 깨닫게 하는 지성의 저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인간은 사랑을 한다.


비약이 있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실존 조건으로 인해 어쩌면 삶보다는 자살이 합리적일 수 있다는 주장은 이해했다. 그래서 자살하지 않으려면 그 원인, 실존 조건을 극복할 정도의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까지도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게 왜 하필 사랑이란 말인가?


지금부터 나는 인간의 처지 때문에 야기되는 존재의 위기로부터 삶을 지켜내는 유일한 방법이 사랑이며, 이것이 생존본능에서 유래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메커니즘으로 이 능력을 키워나가게 되는지, 특히 그 과정에서 왜 타인을 사랑하게 되는지를 살펴본 다음, 결국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까지 고찰해보고자 한다.




2. 사랑이란 무엇인가?


이제 미뤄두었던 질문에 대답할 차례다. 이것은 이번 고찰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전제이자 결론이다.

Q. 사랑이란 무엇인가?
A. 사랑이란 자신의 세계를 긍정해 내는 능력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정의에 의문을 가질 것 같다. 일반적으로 사랑이란 다양한 대상에 관한 감정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자기애, 가족애, 이성애 등 사랑을 표현하는 단어들조차도 저마다의 대상을 나타내고 있는데, 어째서 사랑이 단지 세계만을 긍정해 내는 능력일 뿐이란 말인가?


프롤로그에서도 언급했듯, 사랑은 다차원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덕분에 이 어려운 개념을 다른 이에게 쉽게 전할 수 있다. 그러나 반작용으로 우리는 그 의미를 막연하게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사랑이 무엇인지 명확히 정의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실천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자살하지 않기 위해서, 실존 위협에 맞서 사랑을 해내기 위해서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명확히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다차원적 개념을 명확히 정의하는 것이 아주 어렵기 때문에, 나는 그 본질로 한정해 사랑을 재정의했다.

Q. 사랑의 본질은 무엇인가?
A. 사랑의 본질은 자신의 세계를 긍정해 내는 능력이다.


이제 당신에게는 다음의 질문이 이어지겠다. 어째서 자신의 세계를 긍정해 내는 능력이 사랑의 본질인가?


대답은 명료하다.

첫째, 우리는 오직 이 능력을 통해서, 가장 약하고 불완전했던 순간에도 존재의 위기로부터 삶을 지켜낼 수 있었다.

둘째, 우리는 이 능력을 발달시키는 과정에서 자기애, 가족애, 이성애 등 우리가 흔히 사랑이라 부르는 모든 행위를 경험하게 된다.




3. 탄생과 세계, 그리고 최초의 긍정에 관하여


사랑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 당신이 세계를 긍정해 낸 덕분에 생존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해 보자.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신이 세상에 태어나던 날로 시간을 되돌려야 한다.


지금 당신은 어머니와 육체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 공간은 당신을 보호하고 양육하며 모든 자원을 동원해 당신을 전적으로 지원한다. 당신은 꿈에도 모르겠지만, 이런 완벽한 공간에서 사는 경험은 앞으로 두 번 다시 해보지 못할 것이다.


이제 탄생의 순간이다. 당신은 본능적으로 어머니에게 어떤 신호를 주었고, 어머니는 온 힘을 다해 당신을 세상으로 내보낸다.

세상을 마주하는 순간 당신은 당황한다. 10개월 평생을 완벽한 공간에서 살아온 당신이다. 지금 마주한 세상은 도대체가 조도, 온도, 습도 무엇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그 어떤 것도 당신을 위하고 있지 않으며, 박테리아, 바이러스 등 당신을 죽이려 하는 것들로 득실댄다.
세상은 당신에게 험악한 세계다. 지금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뿐이다. 당황하는 것, 그리고 우는 것.

한참을 울던 당신은 깨닫는다.
울면 힘들다.

그리고 설령 당신이 지쳐 죽을 때까지 울더라도 세계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무의식 중에 결심한다.

“그래, 세계는 이런 곳이구나. 알겠다.”

당신은 이내 울음을 그친다.
완벽한 공간에서 살던 시절 들려온 심장박동처럼, 당신을 일정하게 도닥이는 손길을 느끼면서.




탄생의 순간, 그러니까 세상에 나온 당신이 불편함을 느끼고 울음을 터뜨렸던 그 순간, 객관적 세상은 당신에게 주관적 세계가 되었다. 여기서 세계는 자아를 의미한다.

추상적 개념의 설명은 가급적 지양하고 싶지만, 우리는 반드시 세계에 대해 먼저 얘기해야 한다.
평생에 걸쳐 긍정해 내야 하는 대상의 정체를 알아야만, 비로소 사랑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현상세계​)가 자아라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자아란 의식적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을 말한다. 즉, 당신이 뇌를 통해 자각하고 있는 '나'이다.


우리가 자아를 말할 때 분명히 해야 하는 점은, 자아가 육체적 실체와는 무관한 개념이라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떠올릴 때 자기 얼굴이나 몸과 같은 육체를 연상한다. 하지만, 당신의 자아는, 의식적 존재로서의 당신은 육체와 무관하다.

육체는 오히려 뇌로 자각하지 못하는 쪽이다. 자기 손과 발의 존재감, 코로 숨을 쉬고 눈을 깜빡이는 횟수와 같은 것들을 자각하며 사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육체란 그저 세상의 형상이 뇌에 도달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통로에 불과하다.


당신이 실제로 자각하고 있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두 눈으로 본 것, 귀로 들은 것, 손으로 만진 것, 머리로 생각한 것 등이다. 다시 말해, 당신의 관점, 생각, 감정, 신념, 역사와 같은 사상적 실체야말로 의식적 존재로서의 당신, 즉 자아다.

자아라 불리는 사상적 실체가 진짜 당신이다

육체는 타고나는 것이다. 모든 요소가 부모로부터 파생된다. 그러나 사상은 그렇지 않다.

사상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세상으로부터 파생된다. 당신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으로부터 당신의 사상은 파생된다. 당신은 육체를 통해 세상을 직접 경험하며 평생 뇌 속을 세상에서 온 것들로 가득 채운다. 그것이 세계다. 당신의 사상적 실체이며, 자아다.


갓 태어난 당신이 세상을 불편해하며 울음소리를 내뱉던 그 순간에 당신의 사상이 탄생했다. 험악한 세계라는 당신의 첫 번째 자아가 탄생했다.


그리고 당신은 최초의 긍정을 해냈다.

"알겠다."

당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세계 속의 그 무엇도 바꾸지 않고서, 당신은 자아 전체를 있는 그대로 긍정했다.




출생과 함께 자아(=현상세계​)가 탄생했고, 당신은 그것을 긍정했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긍정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세계가 변할 때까지 울어야 했을 것이고, 그럼에도 세계는 결코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은 결국 체력을 다 소진해 사망하고 말았으리라.


정의하기를, 사랑은 자아를 긍정해 내는 능력이라 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태어나자마자 사랑을 해낸 것일까?


아쉽게도 그렇지 않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갓 태어난 당신이 스스로 자아를 긍정해 낸 것처럼 묘사했지만, 당신은 본능이 이끄는 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긍정해 내는 능력을 직접 발휘한 것이 아니라, 마치 졸려서 잠에 빠지듯 무의식 중에 그렇게 했을 뿐이다. 사랑을 해냈다기보다는, 당한 것에 가깝다.


그럼에도 최초의 긍정은 중요하다. 당신은 가장 약하고 초라한 상태에서도 삶을 지켜내는 경험을 했다. 살아남는 방법을 배웠다. 배고프면 먹어야 하고, 졸리면 자야 하고, 목마르면 마셔야 하듯, 당신은 존재의 위기에 처했을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됐다.


앞으로 수명이 다해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순간을 제외한다면, 갓 태어나 헐벗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당신 역사상 가장 약하고 초라한 상태일 것이다. 따라서 갓난아기인 당신이 지금 마주한 세계는 역사상 가장 강대하고 험악한 세계가 된다. 세계란 오직 당신의 주관적 인식에 의해서 형성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실제의 세상은 험하지도 유하지도 않은 채,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당신은 언제나 지금보다 강대할 것이므로, 세계는 반드시 지금보다 유약하다. 말인즉, 당신이 사는 동안 그 어떤 일을 겪게 되더라도, 세계는 언제나 탄생 직후보다는 험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한 번 세계를 긍정해 낸 당신은 같은 방법을 통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 설령 실존 위기에 처할지라도 자살하지 않을 수 있다. 모든 유형의 삶에서 통할 단 하나의 생존 방법을 당신은 본능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잘 먹고, 잘 자고, 잘 마시는 능력을 발달시키는 것처럼, 당신은 이 능력을 자연스레 발달시키게 된다. 오직 생존하기 위해서.




4. 자기애: 최초의 사랑


당신은 탄생 직후 자아를 긍정당한(?) 덕분에 존재의 위기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제 이 능력을 발달시키는 과정에서 통념적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만 확인하면, 사랑의 본질이 자아를 긍정하는 능력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사랑하는 능력을 어떻게 발달시키게 되는가? 이것은 보다 구체적으로, ⓐ긍정해 내는 힘의 발달과 ⓑ긍정해 내는 범위의 발달을 의미한다.


먼저 ⓐ긍정해 내는 힘의 발달을 살펴보자. 긍정해 내는 힘은 긍정할 근거에 비례한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특정 대상을 긍정할 근거가 더 명확해질수록 더 강하게 긍정해 낼 수 있게 되는 식이다. 따라서 당신은 자아를 긍정할 근거를 누적함으로써 긍정해 내는 힘을 발달시키게 된다.


최초의 자아가 험악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당신의 세계는 곧 유쾌한 경험들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배고픔이 해소되는 기쁨을 느끼고, 숙면을 취한 다음 날의 상쾌함을 경험하며, 하찮은 몸뚱이로 보호자와 살결을 맞댄다. 가끔 불쾌한 순간들이 있어도 괜찮다. 당신이 울면 곧장 달려와 무엇이든 해결해 주는 보호자가 있다. 이들로부터 일방적인 보살핌을 받으며 당신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한다.


성장이 거듭되던 어느 날 당신은 문득 생각한다.

"이 세계는 완벽하다."

아기인 당신에게 세계는 완벽하다. 오직 자신으로만 세상을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당신 눈에 비친 남루한 공간이 완벽하고, 몸을 감싸고 있는 낡은 천의 촉감이 완벽하며, 걷지도 못하는 당신의 다리가 완벽하다.


갓 태어난 때와 달리, 지금 당신에게는 자신의 세계를 긍정해 낼 능력이 있다. 그동안 당신 뇌 속에 누적된 유쾌한 경험들 덕분이다. 앞으로 다른 존재와 자신을 비교할 수 있을 만큼 똑똑해지기 전까지, 당신은 이 유쾌한 경험들을 근거로 자신의 모든 것을 긍정해 낼 수 있다. 이는 당신이 해낸 최초의 사랑인데, 바로 자기애다.

Q. 자기애란 무엇인가?
A. 자기애란 뇌 속에 정의된 '자기'의 범위를 긍정해 내는 행위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을 잘 기억해야 한다. 스스로의 능력을 발휘해 자아 전체를 빠짐없이 긍정해 낸 이 찰나의 자기애는 당신이 평생에 걸쳐 추구해야 할 완전한 사랑에 가장 가까운 상태이기 때문이다.


표현하자면 무지의 축복이라 하겠다. '자기'애라는 표현이 무색하게도, 지금 당신에게는 자기와 자기가 아닌 것을 개념적으로 구분해 낼 지능이 없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모든 것들이 세계이며, 자아이고, 자신이다. 당신은 세계의 그 심오한 의미를 깨달을 필요도 없이, 당신이 인식한 모든 것들을 자연스레 자아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하잘것없는 쾌감만으로도 손쉽게 그 전체를 긍정해 낸다. 지금 이 순간 당신 뇌 속 세계에서 당신이 긍정해 내지 못하는 영역은 없다. 무지한 덕분에 가장 완전한 사랑을 해낸 것이다.


그러나 이 완벽한 상태는 곧 무너진다. 이번에는 지성의 저주라 할까, 당신이 점점 똑똑해지기 때문이다.


어느 날 당신은 희미하게 ‘나’라는 관찰자의 존재를 눈치챈다. 그리고는 뇌 속에 '자기'라는 가상의 경계를 만든다. 이제 당신은 자기와 자기가 아닌 것을 구분하기 시작한다. 똑똑해질수록 더 많은 것들을 인식하고 이해하고 저장할 수 있게 되므로, 당신의 뇌 속 세계는 지성의 발달에 비례하여 마치 우주처럼 팽창한다.


얼마지 않아 당신은 괴리감을 느낀다. 잠에 드는 매 순간마다 세계는 엄청난 속도로 커지는데, 당신이 생각하는 '자기'의 범위는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점차 세계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아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당신은 곧 불안을 느낀다. 세계 속에서 당신이 긍정해내지 못하는 영역이 점점 늘어나기 때문이다. 갓 태어난 때와 마찬가지로, 당신은 존재의 위기를 느끼며 본능에 따라 유일한 생존 방법을 추구하게 된다.


지금이야말로 사랑해 내는 능력을 최대로 발휘해야 하는 때다. 지금 당신이 해낼 수 있는 사랑은 오직 자기애뿐이므로, 당신은 자기애를 강화하는 현상들을 열렬히 갈망하게 된다.


당신은 보호자를 갈망한다. 그리고 그들을 근거로 자기애를 강화한다. 보호자는 당신이 유쾌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자들이기 때문이다(아직 당신은 그들이 보호자이기 때문에 응당 사랑해야 한다는 논리적 사고를 하지 못한다).

당신은 간식을 근거로 자기애를 강화한다. 그 달콤한 맛이 당신의 세계를 유쾌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당신은 같은 이유로 젖병을, 자장가를, 애착인형을 근거로 자기애를 강화한다.


이 대상들을 근거로 해내는 자기애는 불안을 잠재우는데 도움이 된다. 뇌 속 '자기'로 정의된 범위에 긍정할 근거들이 누적되기 때문이다. 더 많은 근거가 누적될수록 더 강하게 자기애를 해낼 수 있으므로, 당신은 커지는 존재의 위기에 맞설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불안을 야기하는 원인이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대한 세계 속에서, 당신이라는 작은 범위를 아무리 힘차게 긍정해 낸들 존재의 위기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잠깐이다. 시간이 갈수록 세계는 더욱 팽창하고 그 속에 정의된 '자기'의 범위는 계속해서 작아진다. 끊임없이 샘솟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짐승마냥 도착적 자기애를 이어갈 것이 아니라면, 당신은 반드시 그 원인을 해소해야만 한다.


존재의 위기를 야기하는 불안의 원인은 무엇인가? 당신이 뇌로 인식하고 있는 세계와 자신의 괴리다. ‘진짜 자아'와 '가짜 자아'의 괴리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긍정해 내는 범위를 발달시켜야 한다. 뇌로 인식하고 있는 '자기'의 범위를 세계만큼 키울 수 있어야만, 자아의 괴리는 완전히 해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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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가족애: '자기'의 확장


그렇다면 자아를 ⓑ긍정해 내는 범위는 어떻게 발달시킬 수 있는가?

이것은 본질적으로 '자기'의 확장이다. 자기애를 통해 이미 긍정해 내고 있는 범위에서 시작해, 이를 점차 확장하는 방식으로 당신은 그 범위를 발달시킬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당신은 범위를 확장시키는 것을 돕는 대상을 사랑하게 되는데, 일반적으로 가장 먼저 그 대상으로 삼게 되는 존재는 가족이다(특히 보호자).


이제 당신은 나와 너의 개념을 이해하고, 부모와 형제를 구별할 수 있을 만큼 똑똑해졌다. 지금의 당신에게는 세계가 거대하다는 사실과, 자신이 비할 바 없이 작은 존재라는 사실이 당연하다. 그러나 불안을 느끼지는 않는다. 멍청했던 과거와 달리, 당신은 보호자가 전능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유아기의 당신에게 보호자는 전능하다. 그들은 모르는 것이 없고 못하는 것이 없다. 당신이 생각하기에, 보호자는 세계만큼이나 강대한 존재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날 때부터 당신에게 소속되어 있었다. 보호자는 당신과 분리된 개인이 아니라, '당신의' 어머니이고 아버지다. 당신은 그들을 통해 손쉽게 자신을 확장할 수 있다. 만약 당신에게 형제가 있다면, 당신은 형제를 통해서도 자신을 확장할 수 있다. 당신에게 손위의 형제는 더 강해질 미래의 자신이며, 손아래의 형제는 당신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과거의 자신이다.

확장된 자신으로서, 당신은 뇌 속에 ‘가족'이라는 가상의 경계를 정의한다. 그리고 그 범위를 긍정해 낸다. 이것이 당신이 자기애 다음으로 경험하게 되는 사랑인데, 바로 가족애다.

Q. 가족애란 무엇인가?
A. 가족애란 뇌 속에 정의된 가족의 범위를 긍정해 내는 행위다.


가족애 덕분에 당신은 다시금 세계를 충만히 긍정해 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전능한 보호자로 확장된 당신은 세계만큼이나 강대하기 때문에 자아의 괴리를 경험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로 인한 불안도, 존재의 위기도 겪지 않는다.


그러나 이 또한 찰나의 균형에 불과하다. 지성의 저주는 당신을 계속 똑똑하게 만든다.

당신은 곧 알게 된다. 보호자가 사실은 전능하지 않다는 끔찍한 사실을 말이다. 세계만큼이나 거대했던 당신은 보호자의 무능을 깨닫는 정도에 비례하여 다시 작아진다. 자아의 괴리가 발생하고, 점점 불안해진다.


땅거미처럼 몰려오는 존재의 위기에 맞서기 위해, 당신은 다시금 사랑을 갈망하게 된다. 지금 당신이 해낼 수 있는 사랑은 자기애와 가족애다. 가족애를 통한다면 보다 넓은 범위를 긍정해 낼 수 있으므로, 당신은 자연스레 가족애를 강화하는 현상들을 우선하여 갈망하게 된다.


당신은 보호자의 우월함을 갈망한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가족애를 강화한다. 유아기에 갈망하게 되는 보호자의 우월함이란 다소 유치한 편이다. 아버지의 나이라거나 어머니의 미모가 그것을 대표하기도 한다. 아이들끼리 자기 아빠가 50살이니 100살이니 하며 겨루는 현상도 이와 관련되어 있다. 유치했던 근거는 지성의 발달과 함께 보호자의 직업이나 재산과 같은 객관적 근거들로 차츰 변하게 될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당신은 형제의 우월함으로 가족애를 강화하거나, 확장된 가족으로 간주할 수 있는 집단 또는 민족의 우월함으로 가족애를 강화하게 된다.


이러한 갈망 역시 불안을 잠재우는데 효과가 있다. 뇌 속 '가족'으로 정의된 범위에 긍정할 근거가 누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원인이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에 불안은 끊임없이 샘솟는다.


평생 자기애/가족애를 강화하는 현상들을 도착적으로 갈망하며 살아갈 것이 아니라면, 당신은 다시금 사랑하는 능력을 발달시키는 과정을 이어가야 한다. 삶을 끝내거나, 다시금 자아 전체를 빠짐없이 긍정해 낼 수 있을때까지.




6. 당신은 왜 타인을 사랑하게 되는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알랭 드 보통의 'Essays In Love'를 한국에서는 굳이 이렇게 번역했다. 그리곤 대박을 쳤다. 그만큼 많은 한국인들이 이 질문의 답을 찾고 있다는 방증이리라.

해서, 나도 비슷한 제목을 써봤다. 시선을 사로잡고자 굳이 '타인'이라는 인격적 대상을 명시한 것인데, 사실 이는 비단 사람에만 국한되는 질문은 아니다.


인간은 이성을 사랑하기도 하고, 동성을 사랑하기도 한다. 만화를 사랑하기도 하고, 학문을 사랑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돈을, 꿈을, 지위를, 종교를, 사회 체제를 사랑하기도 한다. 이 행위들의 공통점이자 자기애/가족애와의 차이점은, 기존의 자신과는 무관했던 대상을 사랑하게 되는 행위라는 사실이다.


청소년기에 이르기까지, 당신은 본능에 따라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능력을 발달시킨다. 그래서 능력이 닿는 한 가장 크고 힘차게 자기애와 가족애를 해낸다. 이를 위해 당신은 매 순간 자신의 범위를 확장하려 하고, 그곳에 긍정할 근거를 누적시키려 한다.

그렇게 탐욕스레 사랑하는 능력을 발달시키다 보면, 당신은 어느새 깨닫게 된다. 당신의 세계 속에는 더이상 자신으로 확장하고 싶은 대상도, 자신을 긍정할 근거도 남아있지 않다는 불행한 진실을 말이다.


이렇게 자신의 처지를 깨닫게 될 정도로 똑똑해지는 시기를 사춘기라 정의하는 것 같다. 지성의 저주는 실제의 세상을 엿보게 하는 객관화된 시선을 선물한다.


당신은 확장된 자신이 허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당신의 일부라고 생각했던 가족은 자신만의 욕구를 가진 개인이었고, 동일한 존재라 믿었던 단짝 친구들은 당신을 쉽게 배신한다. 하나로 이어져있다고 믿었던 집단은 이기적인 인간들의 집합에 불과했다.


당신은 확장된 자신을 긍정할 근거들마저 허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완벽한 줄 알았던 당신의 신체는 하자 투성이었고, 우월하다 믿었던 보호자는 다른 이의 보호자보다 열등했다. 손위의 형제도, 손아래의 형제도, 소속된 집단도 민족도 객관적으로 볼 때 그리 나을 것이 없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당신은 비참한 존재다. 여전히 그 일부라도 긍정해 내려 발버둥 치지만, 가늠할 수 없이 거대한 세계에 언제 잡아먹히게 될지 모른다. 밀려오는 존재의 위기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는 마치 호흡을 이어가듯 계속해서 자신을 긍정할 근거를 찾거나, 자신으로 확장할 대상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당신이 속한 세계에서는 더 이상 그것들을 찾을 수가 없다.


이제 당신은 자아를 긍정해 내기는커녕 혐오하기 시작한다. 지성의 저주는 점차 자기혐오를 야기한다.




7. 외계애: 흡수하거나, 흡수당하거나


외계애(外界愛)라 정의해야겠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세계의 바깥을 사랑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Q. 외계애란 무엇인가?
A. 외계애란 뇌 속에 정의된 세계의 범위 바깥을 긍정해 내는 행위다.

이 또한 긍정해 내는 범위의 확장이다. 당신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의 세계 속에는 더 이상 당신을 확장하고 싶은 대상이 없다. 따라서 당신은 세계의 바깥에서 그 대상을 찾게 된다.


무엇이든 새로운 확장 대상이 될 수 있다. 물리적 실체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이 대상은 기존의 세계에는 없었거나, 이미 있던 요소를 강화하는 우월함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당신으로 하여금 믿게 할 수 있다. 이 대상으로 자신을 확장시킬 수만 있다면, 다시금 세계만큼 거대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허황된 믿음을 말이다.

따라서, 당신에게 외계애의 대상은 일종의 우상(idol)이다. 그것이 사람이든 이념이든 간에, 당신은 세계 바깥의 대상을 우상으로서 사랑하게 된다.


우상이란 무엇인가. 숭배의 대상이다. 그 정도로 우월한 요소를 가진 존재다. 이때, 우월함은 대상의 완벽함에 근거하거나, 그것에 관한 당신의 무지에 근거한다.


완벽함에 근거하는 우상은 일반적으로 이념이다. 사람은 완벽할 수 없지만, 이념은 오직 사상 속에만 존재하므로 완벽할 수 있다. 돈, 꿈, 지위가 상징하거나 만화, 학문, 종교, 사회 체제가 그리는 세계관 같은 것들이 이것에 해당한다.


무지에 근거하는 우상은 일반적으로 사람이다. 당신은 낯선 사람에게서 우월함을 발견하고, 그들로 자신을 확장하려 한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당신이 발견한 우월함은 허상이다. 하지만 당신은 대상에 관해 무지하기 때문에, 망상을 통해 그 대상이 가진 요소를 우월함으로 과장한다. 그리곤 그것을 우상으로 삼는다.


이러한 우상들로 자신의 범위를 확장한다는 것은 사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자신의 뇌 속을, 기존의 자아를 그 경계 바깥으로 넓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흡수하거나, 흡수당하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먼저 외부 세계를 흡수하는 메커니즘을 살펴보자. 이것은 외계를 자신의 세계에 복속시키는 과정이다. 이 방식으로 세계를 확장하는 것은 흡수할 대상이 상징체를 통해 획득되는 이념이거나, 당신에게 흡수당할 자발적 의사를 가진 경우에만 가능하다. 돈을 예로 들어 전자의 경우를 설명할 수 있겠다.


당신이 한국인이라면, 아마도 돈을 사랑하고 있거나 사랑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경험을 떠올려 보라. 당신이 사랑한 대상이 정확히 무엇이었나? 종이 또는 금속으로 가공된 물질이었는가, 아니면 그 물질이 상징하는 이념이었는가? 당신이 사랑한 것은 명백히 이념이다. 부라고 표현되는, 세계의 무엇이든 살 수 있을 만큼 강대한 이념을 당신은 사랑한 것이다.


당신은 돈을 더 많이 획득해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범위를 외계의 이념으로 확장시킨다. 이때, 확장의 정도는 부의 상대적 크기에 비례한다. 돈이라는 상징체를 남들보다 많이 복속시킴으로써(우습게도 옆사람보다 적게 복속시키면 이것이 불가능해진다), 당신은 자신을 외계로 확장시킬 수 있다. 그래서 다시금 거대한 세계에 맞서 자신을 긍정해 낼 수 있게 된다.


한편, 외계애의 대상이 자발적으로 흡수당할 의사를 가진 경우를 살펴보자. 이는 갑의 연애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사랑하는 능력을 충분히 발달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경험하는 연애에서는 반드시 갑과 을이 존재한다(을이 갑을 더 갈망하는 관계). 이런 관계에서 갑은 자신의 세계에 을을 복속시킴으로써 범위를 확장한다.

유의해야 하는 점은, 이런 경우일지라도 갑은 을을 여전히 우상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을에게 우상으로 삼을 정도의 우월함이 없다면, 적어도 갑에게 이 행위는 외계애가 아니다. 이 경우 을에게 갑은 외계애의 대상이지만, 갑에게 을은 자기애나 가족애를 강화하는 현상에 불과한 존재다. 즉, 확장하고 싶은 유일한 외계가 아니라, 자신의 세계 내부의 무엇으로든 대체할 수 있든 존재라는 의미다.


을의 세계를 흡수하는 과정에서, 갑은 반드시 을의 세계를 파괴하게 된다. 갑과 을이 서로 다른 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두 세계가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므로, 하나로 합쳐지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연적이다. 그리고 이 경우 더 큰 변화를 겪어야 쪽은 항상 을이다.


갑은 자신이 속한 세계의 법칙에 따라 을의 세계를 재단하며, 부정하고, 파괴한다. 그리고 을의 세계를 자신의 세계에 맞추어 재구성한 뒤 복속시킨다. 그 결과 갑은 을이라는 외계를 흡수함으로써, 자신의 범위를 우상으로 확장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이번에는 외부 세계에 흡수당하는 메커니즘을 살펴볼 차례다. 이것은 반대로 당신이 외계에 복속되는 과정이다.

외계를 흡수할 때와는 다르게, 이것은 당신에게 아주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자아가 철저히 파괴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연애 관계에서, 을이 경험하게 되는 외계애를 살펴보자. 을은 갑을 이상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 을의 관점에서 갑의 세계는 비참한 자신의 세계와 달리, 우월하고 완전하다. 따라서 을은 단순히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갑의 세계에 속하고 싶다는 열망을 갖게 된다. 그 결과, 을은 자신의 세계를 파괴하는 행위에 오히려 가담한다.


갑이라는 법칙에 따라, 을은 자신의 세계를 재단하며, 부정하고, 파괴한다. 그리고 갑의 세계에 맞추어 자신의 세계를 재구성한다. 이 과정에서 을은 고통을 겪는다. 자아를 파괴하는 행위는 그동안 처절하게 사랑해 온 자신을 완전히 부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을은 평생 확장하고 긍정해 온 자신을 자기 손으로 죽인다. 그리고 갑에 의해 다시 태어난다. 갑을 사랑하기 이전의 자신은 뇌 속 어딘가에 파묻고서, 새로 태어난 자아로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


종교나 사회 체제와 같은 이념을 사랑하게 될 때도 마찬가지다. 당신은 이념이 그리는 완전한 세계에 흡수되기 위해 자신의 세계를 파괴한다. 당신은 이념의 기준에 맞춰 자아를 조각내고 자신의 세계를 새로이 재구성한다. 기존의 자아는 당신에 의해 살해당하고, 새로운 자아가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된다.




지성의 저주로 인해, 당신은 기존 세계에서 더 이상 사랑하는 능력을 발달시킬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세계 바깥의 대상을 사랑하게 되었다.


외계의 대상을 사랑하는 방식은 두 가지다.

흡수하거나, 흡수당하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외계의 대상으로 자신을 확장하는 데 성공하면, 당신은 다시 충만한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자기애나 가족애를 최초로 해냈을 때처럼 말이다.


확장된 당신은 또다시 세계만큼이나 거대하다. 최근에도 겪어보았을,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이 행복감을 당신은 선명히 기억할 수 있다. 이상형의 연인과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고 느낀 순간이나, 신이 당신의 몸에 임한 것 같았던 순간들을 말이다.


그러나, 예상하듯 이 또한 찰나의 행복에 불과하다. 보다 똑똑해진 당신은 곧 알게 된다. 어렵게 찾아낸 외계의 대상조차 결국 허상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당신은 우상의 불완전함을 깨닫게 된다. 사람은 애초부터 불완전했으며, 이념은 실존하는 당신에게 신기루와 같다. 세계는 다시 팽창하고 당신은 작아진다. 자아의 괴리가 시작되고 존재의 위기가 몰려온다.


저주스러운 쳇바퀴가 다시 시작된다. 커지는 존재의 위기에 맞서기 위해, 당신은 다시 도착적 사랑의 행위를 이어가거나, 사랑하는 능력을 발달시키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




8. 결국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가?


"저 사람은 왜 동성을 사랑할까?"
"저들은 왜 만화를, 학문을 사랑할까?"
"도대체 왜 저 사람들은 돈에, 꿈에, 지위에, 종교에, 사회 체제에 미쳐있을까?“
"아무래도 다들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그렇게 볼 것 없다. 저들도 당신과 똑같은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무언가를 사랑하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자아를 긍정해 내는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없다면 뇌 속에 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세계를 도저히 긍정해 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집어삼켜질 것만 같은 존재의 위기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인간은 무엇이든 사랑해야만 한다.


당신도 똑같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랑하고 있을 그것을 통해야만, 당신도 겨우 존재의 위기에 맞설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그것을 열렬히 갈망하는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 과거의 대상도, 앞으로 필요해질 미래의 대상도 당신은 같은 이유로 사랑했고, 사랑하게 된다.


지금 우리가 사랑하고 있는 대상은 서로 다르지만, 결국 사랑해야 할 대상은 같다.


세계이며, 자아이고, 당신이다.


'우리는 왜 사랑을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첫 번째 고찰을 시작했다. 나는 지성의 저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사랑을 한다고 대답했으며, 그 사실을 긴 글을 통해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사랑이 자아를 긍정해 내는 능력이라 정의했고, 두 가지 근거로 이를 논증했다.

1. 인간은 오직 이 능력을 통해서만 존재의 위기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다.
2. 이 능력을 발달시키는 과정에서 흔히 사랑이라 불리는 행위들을 경험하게 된다.

가급적 쉽고 자세하게 두 근거를 설명해 보려 노력했는데, 잘 되었을지 모르겠다. 만약 의도한 대로 전달이 됐다면, 당신도 이제 사랑이 자아를 긍정해 내는 능력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리라.


첫 번째 고찰의 결론으로, 결국 우리가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를 선언하며 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당신의 뇌 속에는 주관적 세계(=자아)가 펼쳐져 있다. 본능에 따라, 당신은 세계의 일부라도 긍정해 내기 위해 사랑하는 능력을 발달시키게 되며, 그 과정에서 자기애, 가족애, 외계애 같은 사랑의 행위를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대체 언제까지 이 능력을 발달시켜야 할까? 이 고통스러운 쳇바퀴를 언제까지 돌려야 할까? 이제 당신도 정답을 유추할 수 있다.


바로 뇌 속에 펼쳐진 세계를 빠짐없이 긍정해 낼 수 있을 때까지다. 마치 자기애를 최초로 해냈던 순간처럼, 스스로의 능력을 발휘해 자아 전체를 빠짐없이 긍정해 낼 수 있게 될 때까지 말이다.


그래야만 지성의 저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 있다. 존재의 위기를 이겨내지 못해 자살하게 되거나, 도착적으로 사랑을 갈망하며 살아가야 하는 불쌍한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당신이 경험했던, 그리고 앞으로 경험할 모든 사랑의 행위는 결국 이것을 해내기 위한 과정이라 하겠다.

Q. 인간은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가?
A. 뇌 속에 펼쳐진 세계의 전부다.




발렌타인데이에 프롤로그를 쓰고서 거의 5개월 만에 첫 번째 고찰을 완성했다.

이제 ②어떻게 ③얼마나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해 차례로 써야 하는데,

잘하면 내년에나 완성하게 될 수도 있겠다.


해서 혹시 다음 글이 궁금한 분이 계신다면,

그 사이에 에리히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읽어보시라 말씀드리고 싶다.


그의 주장을 반복해서 강조할 생각은 없지만,

다음 글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까지 논리를 펴는 데에는 프롬의 생각에 많이 의지하게 될 것 같다.


많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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