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관한 고찰 - 두 번째: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쇼핑하듯 사랑하지 않겠다.
어느 날 눈 떠보니 내가 하필 나였던 것처럼,
어쩌다 내 눈앞에 던져진 당신들을 사랑해 내겠다.
당신 또한 연애는 가능한 많이 해보는 게 좋다는 주장을 심심찮게 들었을 것이다. 그 핵심 논리는 다음과 같다.
1. 연애시장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봐야만,
2. 어떤 타입이 자기와 잘 맞는지를 비교할 수 있고,
3. 그중 하나를 배우자로 잘 고를 수 있다.
그들은 아무래도 아쉬운 결혼생활이 충분히 좋은 상품을 쇼핑하지 못했던 탓이라 믿는 듯하다. 그들이 만약 마음껏 쇼핑하고서 결혼을 했더라면, 그때는 아마 그놈이 그놈이니 적당히 만나 결혼을 하라고 조언했으리라.
혹자는 자기 지인도 연애를 많이 한 덕에 배우자를 잘 골랐다며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가능한 일이다. 수많은 사람 중 누군가는 원하는 만큼 상품을 둘러보고서 마음에 꼭 드는 하나를 고르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운 좋은 사례가 있다 해서 그걸 보편적 방법으로 삼을 수는 없다. 삶이란 소수가 아닌 다수에 관한 일이기 때문이다.
여러 후보를 나열하고 그중 하나를 고른다는 것은 언제나 초과 공급 상태를 전제하므로, 경쟁 우위를 갖는 소수만 가능한 일이 된다. 따라서 한 사람 당 한 명의 배우자를 갖는 것이 보편적 삶이라면, 쇼핑하는 태도가 배우자를 찾는 적절한 방법이 될 수는 없겠다.
결혼은 결국 1:1 매칭이므로, 인구 구조적으로 모든 사람이 쇼핑을 할 수는 없다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인기 있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좋은 방법 아닌가? 배우자란 유일하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가족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쇼핑이든 뭐든 간에, 여러 후보를 비교해 신중히 고르는 태도는 여전히 합리적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렇지가 않다. 아무리 많은 후보가 주어지고, 아무리 치밀하게 비교한들, 배우자 쇼핑은 반드시 실패로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런 악담을 하는가?
우선, 명백히 시간이 부족하다. 예를 들어 당신이 25세에서 35세 사이에 배우자를 고르기로 정했다 하자. 당신은 10년 내에 쇼핑을 마쳐야 한다. 그런데 사람은 다른 상품과 달리 그 정보를 친절하게 표시하고 있지 않다.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간을 들여 직접 사귀어보아야 한다. 이때 상품당 얼마의 시간을 투자하면 적절할까? 당연히 상품마다 다르다. 어떤 경우엔 잠깐 만나도 불량여부를 쉽게 파악할 수 있는가 하면, 다른 경우엔 5년을 만나도 다 파악하기 어렵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만나는 동안에도 품질이 계속 바뀐다는 사실이다. 2년째까지는 분명 좋은 상품이었던 것 같은데, 5년째가 되자 엉터리로 판명되기도 한다. 이게 원래부터 있던 하자였는지, 만나는 도중에 발생한 하자인지 알 길은 없다. 상품 당 사계절 두 번을 보낸다 쳐도 겨우 5개 밖에는 비교할 수가 없는데, 품질마저 일관되지 않으니 쇼핑하기 참 곤란한 대상이라 하겠다. 더구나 병렬 탐색이 아니므로 다섯 번째가 꽝이라 해서 이미 포기해 버린 두 번째로 선택을 무를 수도 없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품을 어떻게 쇼핑하란 말인가.
그래서 똑똑한 소비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역시 자만추는 리스크가 너무 크다. 검증된 풀에서 소개를 받는 게 정답이다. 알맹이는 어차피 파악하기 어려우므로, 포장지라도 먼저 선별하는 게 안전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접근 또한 반드시 실패하게 된다. 포장지를 쇼핑하는 당신의 취향이 쉽게 바뀌기 때문이며, 그 자체가 효용을 보장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수년 전 마음에 들어 샀던 옷들을 살펴보라. 어떤가, 지금 봐도 만족스러운가? 트렌드는 이미 몇 번이나 바뀌었다. 여전히 쓸모는 있어 옷장 한켠을 내어주고 있지만, 그 만족감은 결코 구매한 날과 같지 않다. 시간이 더 흐른다면 그것들이 공간만 차지하는 꼴을 도저히 못 봐줄 순간이 올 것이며, 되팔든 버리든 옷장을 비우게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취향 변화가 문제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우리가 쇼핑을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취향이 바뀔 때마다 우리 눈에는 더 근사해 보이는 상품이 들어오게 되므로, 자각할 필요도 없이 옷장 속은 새 상품들로 차곡차곡 채워진다. 헌 옷은 버리고 새 옷을 사 입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쇼핑 대상이 배우자가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것은 되팔거나 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십수 년 전 유행했던 옷만 매일 입어야 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 알록달록한 색상의 스키니진 같은 것들 말이다. 최악이다.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데, 버리지도, 바꿔 입지도 못한다. 차마 벗고 다닐 순 없으니 꾸역꾸역 입는다. 한때 취향이었던 배우자란 그즈음 유행한 옷과 그리 다르지 않다.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그 시절 감각을 온 일상을 다해 감내해야 한다.
똑똑한 소비자들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육각형 프레임워크가 중요한 것이다. 사람도 아무거나 고르면 안 된다. 명품은 유행이 없지 않나. 집안, 학벌, 키 같은 것들은 시간이 지나도 잘 변하지 않는다. 사람도 명품을 골라 잡아야 후회할 일이 없다.
이는 중매의 핵심 논리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검증된 기준에 의존해 사람을 정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중매혼에 반대하여 자유연애혼 시대가 도래한 것인데, 자연스레 이 논리로 회귀했다는 점이 상당히 흥미롭다. 어찌 됐건 가장 우수한 상품을 고른다는 점에서는 명백히 효율이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연봉 1억과 2억 중 어느 쪽이 나은가? 논쟁의 여지가 없다. 서울대를 졸업했다거나, 의사라거나, 키가 183cm이라거나 하는 조건들은 누가 훔쳐가지도 못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매모호함이 없다. 명확히 측정되고 우열이 정리된다. 낭만이 없는 것 같아 약간 찝찝하기도 하나, 이 명확함에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든다. 적어도 실수는 없을 것이다. 이 기준이라면 가장 우수한 하나를 합리적이고 정확하게 고를 수 있을 것만 같다.
라는 생각이 든다면 당신은 함정에 빠진 것이다.
목적을 잊는 순간 모든 과정은 쇼핑을 위한 쇼핑으로 전락한다. 당신이 찝찝함을 무릅쓰고서까지 쇼핑을 하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다. 다른 이유로 배우자를 찾는 사람은 적어도 현대에는 없다. 그러나, 육각형이건 팔각형이건 간에, 이런 기준으로 쇼핑을 시작하는 순간 당신은 반드시 불행해진다. 측정 가능한 기준이 필연적으로 서열을 만들기 때문이다.
1억은 8천보다 낫고, 8천은 6천보다 낫다. 183은 180보다 낫고, 180은 175보다 낫다. 이 게임에서 승리하는 방법은 오직 1등을 고르는 것뿐이다. 1등은 최선이며, 나머지는 차선이다. 그리고 차선은 타협을 의미한다. 사실은 1등을 원했던 것이지만, 고를 능력이 부족했던 나머지 어쩔 수 없이 타협한 결과라는 것이다. 따라서 육각형 프레임워크로 고른 배우자는 영원한 차선이 된다. 그것이 1억이든 10억이든 간에, 100억이 존재하는 한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설령 100억이라 한들 1,000억이 평균인 집단에 속하는 순간 가난해지기 때문이다.
더 끔찍한 사실은 이 게임이 일방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당신이 배우자를 쇼핑했다면 상대도 당신을 쇼핑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럴 경우 당신 또한 배우자에게 차선이 된다. 당신이 "A를 골랐다면 더 좋았을까"하고 궁금해할 때, 상대는 "B를 골랐다면 더 좋았을 텐데"하고 생각한다. 서로가 마음속 서열표 어딘가에 배치되는 관계. 서로를 최선이 아닌 타협의 산물로 여기는 관계. 그것이 측정 가능한 기준으로 배우자를 쇼핑한 결과다.
그럼에도 1등을 고를 능력이 충분한, 아주 우수한 사람에게는 쇼핑이 유용하지 않을까? 한번 생각해 보자. 쇼핑의 목적은 행복해지는 것이다. 연봉 1억이 행복을 보장하는가? 모른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8천만보다는 낫지 않을까? 183cm나 서울대가 행복을 보장하는가? 모른다. 이왕이면 다홍치마 아닌가?
그뿐이다. 애초에 이 기준들은 행복을 측정하기 위한 용도로 설계되지 않았다. 경제적 가치가 있는 것들 중 사람을 쉽게 비교할 수 있다는 이유 하나로 채택되었을 뿐이다. 이런 기준으로 배우자를 고른다는 것은 열쇠를 찾는 사람이 가로등 아래만 뒤지는 꼴과 다르지 않다.
Q: 왜 가로등 아래에서만 열쇠를 찾으시나요?
A: 여기가 밝아서 잘 보이기 때문입니다.
찾아야 하는 열쇠는 어둠 속에 있는데, 우리는 가로등이 비추는 곳만 뒤지고 있다. 행복은 천편일률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게 아닌데, 측정 가능한 기준으로 그 가능성을 따진다. 기준조차 스스로 정한 게 아니다. 그냥 남들이 그렇다더라 하는 것들이다. 당신의 필요에 근거한 기준이 아니므로, 당신 삶에 무용한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이 조건들이 영원불멸한 것도 아니다. 사고로, 실패로, 사회 구조 변화로, 운이 조금만 따라주지 않아도 하루아침에 다 사라질 수 있는 것들이다. 강산이 대여섯 번 바뀌는 세월을 함께할 이를 고르는 기준으로는 턱없이 가볍다 하겠다.
요약하면, 배우자 쇼핑은 인구 구조적으로 가능하지도 않고, 설령 가능하다 해도 반드시 실패하게 된다. 우리가 행복을 지향하는 한, 쇼핑하는 태도는 틀렸다.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 배우자를 찾아야 한다.
그럼 뭐 어쩌자는 말인가. 고르지도 말고 그냥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아 결혼을 하란 말인가? 사랑하는 방법을 말하겠다더니, 연애결혼이 실패한다는 저주나 퍼붓고 앉아 있다.
그렇다. 사랑의 본질에 근거할 때, 우리는 누구라도 배우자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단지 그 시점의 내가 사랑하는 능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을 뿐이다.
생각해 보자. 자기를 사랑하고 있을 당신은 당신이기를 선택할 수 있었는가? 그렇지 않다. 눈 떠보니 하필 당신이었을 뿐이다. 가족은 어떤가. 부모나 자식을 선택할 수 있었는가? 역시 그렇지 않다. 하필 그런 부모였고, 그런 자식이었다.
사랑의 최소 단위를 이루는 자기애도, 그 확장인 가족애도 그 대상을 쇼핑할 수 없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근거로 성애의 대상은 쇼핑할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한단 말인가. 살펴보았듯 쇼핑은 우리를 최선과 차선의 함정에 빠뜨릴 뿐이다. 사랑은 그런 식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하필 그리 생겨먹은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듯 타인 또한 그런 방식으로 사랑하는 수밖에 없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아주 성인군자 납셨다. 입바른 소리는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지난 수천 년 동안 그런 일을 해낸 사람은 손에 꼽는다. 내가 그걸 해내는 순간 세계 4대 성인은 5대 성인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 답지는 이미 오래전부터 나와 있었다. 단지 어떻게 해야 그 대단한 걸 해낼 수 있는지, 그 방법론이 모호했을 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에리히 프롬이 그 방법을 종합해 냈는데, 이번 고찰은 프롬주의에 입각해 이 질문을 풀어내는 과정이라 하겠다.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
80세에 사망한 프롬이 76세에 펴낸 책인 만큼, 그의 사상이 집약된 위대한 저작이다. 워낙 유명한 탓에 담긴 생각의 가치는 오히려 저평가되어 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베스트셀러가 많았던 프롬은 생전에도 대중 교양서나 쓴다며 동료 학자들로부터 비아냥을 듣곤 했다.
어떤 관점에서 보자면 이 책은 미완의 생각이다. 그가 이어 설명하겠다 약속했던 To Be의 방법론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프롬이 정돈하던 생각은 존재의 기술(The Art of Being)이라는 이름의 유고집으로 출간되는데 그쳤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을 읽으면 프롬의 생각이 절반만 이해되는 느낌이다. 그는 왜 To Have에 문제가 있는지는 명쾌하게 설명하지만, To Be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왜 하필 그것이어야 하는지는 충분히 설명하지 않는다. 스스로도 이를 의식했던지, 프롬은 속편에서 그것을 마저 설명하겠다 말하고는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를 묘사하고서 책을 맺는다. 물론 왜 그런 사회가 필연적으로 도래할 것인지를 변증법의 논리로 선언하는 마지막 문장은 탄성이 나올 만큼 위대한 마침표였다. 미완이라 해도 마땅히 마스터피스라 하겠다.
어쩌면 프롬은 자기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미 수년 전부터 심장이 좋지 않았고, 책이 출간된 이듬해부터는 아무것도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는 후인들에게 숙제를 남긴 것이리라. 이 정도 설명 했으면 대충 알아 들었을 테니, 시간이 부족한 나는 미래를 먼저 그려 두겠다. 정돈되지 않은 부분은 너희가 다듬어라.
프롬주의자를 자칭하고 싶을 만큼 그를 좋아하는 후인으로서, To Have or To Be에 관한 그의 생각을 나의 식대로 다듬어 보려 한다. 이는 나를 사랑하듯 당신을 사랑하는 방법의 대답이기도 한데, 프롬에게 채점을 받지는 못하겠으나, 아마 그리 틀린 해석은 아닐 것이다.
프롬에 따르면 사랑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는 소유하는 것(To Have)이다.
첫 번째 고찰을 통해 우리는 사랑의 본질이 자아를 긍정해 내는 능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따라서 어떻게 사랑할 것이냐는 질문은 보다 구체적으로, 1) 어떤 방법으로 자아를 인식할 것이냐, 2) 인식한 자아를 어떤 방법으로 긍정할 것이냐 하는 물음과 같다.
1) 어떤 방법으로 자아를 인식할 것이냐
자아를 인식한다는 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질문에 보통 소유한 것을 근거로 대답한다. 내가 가진 것들의 집합을 '자기'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직접 자기소개를 해보면 이 의아한 현상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당신을 소개했던 경험을 떠올려 보라. 당신은 ‘자기’를 상대에게 보여줄 방법이 없기 때문에 자기에게 달린 키워드의 조합으로 스스로를 설명해야 했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 XX이고요, 나이는 XX입니다. 지금은 XX회사에서 XX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키워드들은 당신이 소유하고 있는 개념이다. 이름은 나에게 할당된 글자이고, 나이는 내 육체가 살아온 시간이며, 직업은 내가 맡은 역할이다.
당신은 성격이나 취미, 신념과 같은 주관적인 키워드로도 자기를 표현했을 것이다.
저는 외향적이고 등산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신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이 또한 ‘나의’ 성격/취미/신념으로 표현되며, 당신이 소유하고 있는 개념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이름이나 직업은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니 소유했다 치더라도, 성격이나 신념까지 소유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외향적이라거나 신을 믿는다거나 하는 건 ‘가진(To Have)’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원래 그런(To Be)’ 게 아니겠냐는 말이다.
정확히 그렇다. 성격이나 신념과 같은 것들은(실은 나머지 요소들도) 소유한 개념이 아니라, 본래의 당신을 묘사하는 개념이어야 옳다. 그러나, 오늘날 그것들이 우리 자아에서 기능하는 방식을 살펴보면, 이를 소유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역설적으로 바로 그 점이, 우리가 자아를 To Have로 인식한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조금 더 살펴보자. 소유란 무엇인가. 이는 물리적 점유 상태와는 무관하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는 이름이나 직업은 물리적 실체가 없지 않나. 소유란 사상적 점유 상태를 의미한다. 머릿속에서 '자기'로 정의된 범위에 그 대상을 포섭해, 나의 일부로 붙잡는 행위인 것이다. 그 증거로 소유한 대상이 흔들리면 자아도 흔들린다. 마치 남의 직업이 사회적으로 무시당하면 그런가 보다 하지만, 내 직업이 무시당하면 모멸감을 참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직업이 자아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적 역할이 아니라, ‘나’를 구성하는 요소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현상을 자아와 성격이 맺는 관계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당신이 스스로를 외향적인 사람이라 정의했다 하자. 어느 날 당신은 사람이 많은 행사장에서 갑자기 위축되었다. 이때 당신은 "외향적인 내가 왜 이러지?" 하는 불안을 느끼게 된다. 만약 외향적이라는 성격이 당신을 묘사하는 표현에 지나지 않았다면 불안할 이유가 없다. 위축된 반응을 보이는 나도 여전히 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안을 느낀다면, 당신은 그 성격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외향적인 나'라는 개념을 자기 일부로 붙잡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념도 마찬가지다. 보수가(또는 진보가) 옳다고 믿는 당신 앞에서 누군가 보수의(진보의) 한계를 논증하면, 당신은 반발하게 된다. 심하면 분노하며 싸우기까지 한다. 왜 그렇게 될까? 신념이 틀렸다는 말이 곧 내가 틀렸다는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그 개념이 당신을 구성하는 일부이므로, 그것이 공격당하면 자기가 공격당한다고 착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추상적인 대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는 물건이나 사람마저도 소유한다. 예를 들어 집은 단순히 주거하는 건축물이 아니라, '이런 집에 사는 나'라는 개념으로 자아에 붙잡힌다. 사람 또한 '이런 사람과 어떤 관계인 나'라는 개념으로 붙잡힌다. 그 대상이 추상적이건 물리적이건 간에, 우리는 자기가 소유한 사상적 개념들의 집합으로 자아를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프롬은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내가 소유한 것들이 곧 나다(I am what I have).
2) 인식된 자아를 어떤 방법으로 긍정할 것이냐
자아를 To Have 방법으로 인식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했다면, 그렇게 인식된 자아를 긍정하는 방법을 살펴볼 차례다. 마찬가지로 두 가지가 있으며, 가장 쉬운 방법은 To Have로 긍정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직관적이다. 나는 곧 내가 소유한 것들이므로, 더 좋은 걸 더 많이 소유하면 된다. 세련된 이름, 젊은 나이, 좋은 직업, 좋은 성격, 좋은 취미, 좋은 신념, 좋은 집, 좋은 관계들. 내가 소유한 것들의 가치 합계가 자아를 긍정할 명확한 근거가 된다. 우리는 이 가치 총계에 비례하여 자아를 긍정할 수 있다.
이때, 더 좋고 많다는 기준은 어떻게 정할까? 옆사람과 비교해서 정한다. 내가 1억을 번다고 하자. 만약 이 숫자가 홀로 존재한다면 많고 적음을 알 수 없다. 이 가치는 반드시 상대적으로 측정된다. 옆사람이 3천만을 번다면 당신은 더 많이 가진 것이다. 그러나, 그가 2억을 번다면 당신은 더 적게 가진 것이다. 전자의 경우 당신은 삶을 사랑할 수 있으나, 후자의 경우 어려워진다. 자아가 열등한 상태에 놓여 그것을 긍정할 근거가 약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방식으로 사랑하면 필연적으로 무한 경쟁 상태에 놓이게 된다. 죽는 순간까지 옆사람보다 많이, 아니 최소한 그가 가진 만큼은 가져 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삶은 100년 동안 하나라도 더 많이 가지려 발버둥 치는 게임으로 전락한다.
그래서 프롬은 우리가 불행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내 존재가 소외되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자아 외부의 기준에 의해 정의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상시 불안 상태에 놓인다. 생각해 보라. 내가 나태한 동안 옆사람이 더 많이 가져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옆사람보다 나은 나'라는 개념을 그에게 빼앗겨버리면 어쩌냔 말이다. 그러면 자아는 반드시 흔들리게 되며, 그것을 긍정해 내기가 어려워진다. 사랑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딜레마도 프롬은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내가 소유한 것들을 잃게 된다면, 나는 대체 누구인가(If what I have is lost, who then am I)?
앞서 사랑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했다. 프롬에 따르면, 나머지 하나는 존재하는 것(To Be) 소유하지 않는 것(Not To Have)이다.
우리는 To Have가 무엇인지, 왜 그것이 한계를 갖는지를 이해하게 됐다. '소유냐 존재냐'를 읽은 분들도 이 지점까지는 쉽게 따라갔을 것이다. 프롬도 언급했듯, 이는 우리가 이미 경험해 본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소유가 아닌 방식, To Be는 난해하다. 아마도 세계 4대 성인만 경험해 본 상태이기 때문이리라(실제로는 네 분보단 더 많이 계셨겠지만).
그렇기에 프롬은 유고집을 통해서까지 열심히 To Be를 설명하지만, 세간을 이해시키는 데는 결국 실패하게 된다. "소유가 나쁘니 무소유를 하라", "자본주의가 틀렸으니 사회주의를 하라"라고 곡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롬은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 아니, 한 건 맞는데, 결코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다. 두 번째 고찰이 갖는 의의 중 하나는 이 오해를 바로잡는 것에 있겠다.
소유는 나쁘다. 존재는 좋다. 이런 이분법적 인식을 야기한 원인은 프롬이 그 중간 과정을 생략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프롬은 명확히 말한다. 인간은 모두 To Have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To Be로 발전하지 않고, 평생 그 상태에 머무는 것에 있다.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달릴 수는 없는 법이지 않나. 일단 뒤집기에 성공해야 하고, 기는 법을 배워야 하며 걷는 법을 숙달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To Be 상태일 수는 없다. 최초의 의식은 '나의 육체'를 가진 상태이며, 지성은 '나'와 '너'를 구분하는 것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석가모니조차도, To Have 상태에서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마치 아기가 달릴 수 있게 되듯이 자연스레 To Be 상태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른이 되어서도 기는 상태와 다를 바가 없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To Be 상태에 이를 수 있는가? 프롬이 생략했던 사랑의 변증법적 발전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 전체 과정을 구조적으로 조망하기 위해, 사랑의 본질에 대한 정의와(인식/긍정) 그것을 해내는 방법(To Have/Not To Have)을 기준으로 2x2 매트릭스를 그려 보자. 이는 사랑의 4가지 상태를 표현한다.
먼저 뜬금없이 튀어나온 소유하지 않는 것(Not To Have)부터 시작해 보자. 만약 To Have로 사랑하는 방법에 문제가 생긴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프롬은 대안을 To Be라고 표현했지만, 이는 To Have의 여집합, 즉 Not To Have로 정정되어야 한다. To Be는 변증법적 결과이지 그 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후술 하겠지만, 모든 인간은 To Have 상태(正)에서 시작해, 본능에 따라 자연스레 중첩상태(反)를 경험하게 된다. 이 중첩상태를 이루는 핵심 방법이 Not To Have인데, 성인군자만 경험할 수 있는 To Be와 달리, 우리는 이것을 자기 경험에 근거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에 누구나 이 상태에서 Not To Have를 숙달할 수 있고, 따라서 To Be 상태(合)에도 이를 수 있다. 막연히 구분되었던 프롬의 To Have/To Be가 연속된 과정으로 명쾌하게 연결되는 것이다.
이 과정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매트릭스 상 정의된 사랑의 상태를 하나씩 살펴보자.
1. To Have 상태: 正
앞서 살펴본 경우로, 자아를 가진 것으로 인식하고 가진 것으로 긍정하는 가장 원초적인 상태다. 육체를 가진 모든 인간은 이 상태에서 사랑을 시작한다.
2. 성립 불가능 상태: X
이 상태는 성립할 수 없다. 가진 것이 없는데 가진 것으로 긍정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역으로 말하면 To Have로 자아를 긍정하는 상태에서는, Not To Have로 자아를 인식하는데 절대 성공할 수 없다. 이는 가진 것으로 긍정하는 사회에서 무소유를 설법해 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사실의 증명이다.
3. 중첩 상태: 反
이 상태가 프롬이 서술을 생략했던 중간 과정이다. 여전히 가진 것으로 자아를 인식하지만, 역설적으로 가지지 않는 것으로 그것을 긍정한다. 여기서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내가 이미 갖고 있던 것을 내어놓는 것이고(To Give), 다른 하나는 내가 아직 갖지 못한 것임에도, 더 이상 가지려 하지 않는 것이다(No Need To Have). 모든 인간은 그 본능에 따라 타인에게 자기 것을 내어 놓는 것(To Give)을 경험하게 되는데, 우리는 이를 계기로 중첩상태를 시작해 No Need To Have까지 훈련할 수 있다.
4. To Be 상태: 合
중첩 상태에서의 숙달 과정을 통해, 마침내 No Need To Have 방법으로 자아를 긍정하는 데 성공하면, 비로소 같은 방법으로 자아를 인식하는 데까지도 성공하게 된다. 가지지 않고도 긍정할 수 있다면, 굳이 가질 필요를 못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갖고 있던 것을 모두 내어놓더라도 더 이상 가질 필요를 느끼지 않으며 긍정하는 상태가 된다. 이는 Not To Have-Not To Have 구조로 원초적 사랑의 상태(To Have)와는 정반대라 하겠는데, 바로 사랑의 변증법적 발전의 결과요, 프롬이 말했던 To Be 상태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하는 사실은, 가진 것을 모두 내어놓는다는 것이 '설령 그럴지라도'의 의미지 '반드시 그래야만 성립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프롬은 소유가 나쁘다고 말한 게 아니라, 때가 되었음에도 '소유 상태'에 머무는 것이 나쁘다고 말했다. 프롬주의는 무소유론이 아니다.
정리하면, 소유냐 존재냐는 나쁜 것과 좋은 것을 이분법적으로 나눈 이론이 아니다. 출발지와 도착지를 정의한 지도다. 모든 인간은 이 지도를 따라가면 누구나 To Be 상태에 이를 수 있다. 이는 기는 상태에서 벗어나 자기 두 다리로 마음껏 달릴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인간 존재의 완전한 실현에 관한 총론이다.
이제 우리는 To Be가 무엇인지까지 이해하게 되었다. 이는 성인군자들이 이르렀던, 인간의 최종 발현 상태다. 소유와 무관하게 스스로를 정의하고 긍정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가늠하자면 매 순간 충만한 사랑을 느끼는 상태이리라.
Q. 나는 누구인가?
A. 나는 나이다(I am what I am).
만약 여기서 설명을 마친다면 프롬의 실수를 답습하는 것과 다르지 않겠다. To Be가 무엇인지까지는 설명이 되었더라도, 왜 하필 To Be여야 하는지가 설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아마 거의 모든 현대인들이 To Have에 문제가 있다는 데까지는 동의할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행복하고, 그 외에는 불안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행복하긴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To Have에 한계가 있을지언정 이 상태에 머무는 것이 틀렸다는 주장에는 납득하기가 어렵다. 왜냐면 때때로 행복하니까! 그런 게 인생 아니겠는가. 고된 삶을 살다가 가끔 행복한 것. 그렇게 살다 죽으면 되는 게 아니겠냔 말이다. 꼭 거창하게 저 성인군자들처럼 To Be인지 뭔지 하는 상태에 이르러야만 하냔 말이다.
이것이 지난 수천 년간 답지가 나와 있었음에도 그것을 외면하게 만들었던 생각의 핵심 논리다. '진리'를 '입바른 소리'로 끌어내린 거대한 힘이다. 반드시 이 논리를 부러뜨려야만 프롬의 주장은 완성된다.
그런데, 사실 이것을 파훼하는 건 너무나 쉽다. 모든 인간이 하나같이, 도무지 피할 수 없는 치명적인 조건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Q. 왜 To Have에 머물면 안 되는가. 백번 양보해 그렇다 쳐도 왜 하필 To Be여야 하는가?
A. 당신이 살아 숨 쉬는 동안에도, 죽음에게 당신의 모든 것들을 하나 둘 빼앗기고 있기 때문이다.
대전제: 사람은 죽는다.
소전제: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결론: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유명한 삼단논법이다. 교육과정에 따라 '소크라테스' 자리에 다양한 이름이 들어간다. '철인'이 들어가기도 하고, '네로'가 들어가기도 한다. 하지만 결론은 모두 같다. 누가 되었건, 우리는 모두 죽는다.
그런데 이 비참한 사실을 두고서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대개는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다. 죽음이 실감 나지 않기 때문이다. 먼 얘기로 생각하거나, 생각해 봐야 소용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아무렇지 않은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아직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진 것들로 자아를 긍정할 수 있어, 때때로 행복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이 간과하고 있을 사실은, 죽음이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죽음은 평생에 걸친 과정이다. 자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세포분열이 멈춘 이래 매일 조금씩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진 것들을 하나 둘 빼앗기고 있다.
젊음을 빼앗긴다. '젊은 나'라는 개념이 사라진다. 건강을 빼앗긴다. '건강한 나'가 사라진다. 직업을 빼앗긴다. 어머니/아버지를 빼앗긴다. 외모를 빼앗긴다. 기억을 빼앗긴다. 나와 관련된 이들을 하나 둘 빼앗긴다. 가진 것들의 집합으로 정의되던 내가, 한때 소유했던 것들을 죽음에게 하나씩 빼앗기며 쪼그라든다. 그리고 마지막 숨을 내뱉는 순간, 내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때, To Have로 긍정하는 방법 밖에 모르는 내가 사랑하며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겠는가?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할 것인데, 만약 사랑조차 해내지 못하며 떠난다면, 나는 대체 100년 동안 무엇을 살아낸 것인가?
이것이 이유다. 왜 하필 To Be여야 하는가? 우리가 죽음에게 가진 모든 것들을 반드시 빼앗기게 될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두 빼앗긴 순간에조차 긍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만 사랑하며 삶을 마칠 수 있기 때문이다. 밀물이 닥칠 것이 뻔한데, "그냥 이대로 살다 죽지 뭐" 하며 우악스레 앉아 있다 잠겨 죽는 것은 대충 살다 수틀리면 자살하겠다는 태도와 그리 다르지 않다. 자살하지 않으려면 사랑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반드시 To Be 상태에 이르러야만 한다.
만약 여기까지 납득이 되었다면, 남은 질문은 하나다. 만약 To Have에서 To Be로 나아가는 것이 인간이라는 종에게 마땅한 일이라면, 그 중간 과정을 누가 가르쳐주지 않더라도 자연스레 익힐 수 있어야 옳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어떻게 그 학습 과정을 거치게 될까?
앞서 To Have가 아닌 방법, Not To Have로 자아를 긍정하는 것은 자기가 갖고 있던 것을 내어놓는(To Give) 경험으로 시작하게 된다 했다. 만약 이게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면, 나에게도 분명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기억을 되짚어 보자. 나는 언제 처음으로 내 것을 타인에게 내어놓으면서도 그걸 긍정할 수 있었던가?
에로스란 성애의 표상이다. 여기서 성애를 굳이 에로스라고 표기하는 이유는, 그 신비로움에 주목하고 싶기 때문이다. 신기하지 않은가? 우리는 그 대상이 무엇이건,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에로스를 경험한다. 비록 쌍방의 관계로 발전하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이는 에로스가 인간 본능의 영역에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혹자는 에로스를 두고 번식 본능에 기인한다 말하기도 한다. 보통 2차 성징과 함께 시작되는 사건이니 어쩌면 그럴지도 모를 일이지만, 마냥 납득하기는 어렵다. 만약 에로스가 단지 번식욕에 불과하다면, 그 기막힌 비효율성을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에로스를 경험하는 모든 인간은 상대에게 진심을 전하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 상태에 놓인다. 그 사람은 자기 마음을 심장에서 꺼내 상대에게 직접 보여줄 방도가 없으므로, 온갖 행위예술로 그 사실을 표현하려 든다. 표정으로, 말로, 행동으로. 재능 있는 이들은 노래로, 춤으로, 글과 그림으로. 에로스를 통해 탄생한 걸작들이 적지 않다.
이 위대한 현상을 단지 번식욕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입증도 반증도 어렵다. 다만 인간이 지구를 정복하기 이전부터 에로스가 존재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다. 만약 이것이 번식욕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리도 난해하게 번식하는 종에게 밀려난 경쟁종들은 대체 얼마나 무능했던 걸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에로스의 정체를 프로이트주의마냥 성욕으로 보든, 프롬주의에 따라 실존적 욕구로 보든 간에, 모든 인간은 본능에 의해 마땅히 그것을 경험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때 처음으로 타인에게 자기를 내어놓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나의 시간을 내어준다. 수명이 정해져 있으므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값비싼 것이다. 나의 자존감을 내어준다. 이전까지 어떤 것도 자기보다 우선했던 바가 없으나, 기꺼이 그를 나보다 우선하는 존재로 맞이한다. 나의 재산을 내어준다. 그것이 남보다 적게 되면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을 알고 있음에도, 가능한 많이 끌어모아 남김없이 전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이 온전히 전해지면 기쁨과 충만함을 느끼고, 전해지지 않으면 좌절과 초라함을 경험한다. To Have-To Have(正) 문법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기이한 현상이라 하겠다.
프롬은 우리가 자기 것을 내어놓는 순간, 자기에게 내재된 힘을 경험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힘을 가졌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소유한 상태로는 그것을 경험할 수 없지만, 내어줄 때는 그 역동적인 힘을 실감할 수 있다. 연인이 요구하지 않았음에도 그를 위해 특별한 것을 준비하고, 그것에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느꼈던 충만함을 떠올려 보라. 우리는 내어주기에 갖는 역설적인 힘으로써 자아를 긍정할 수 있었다. 프롬은 이를 창조적인 힘이라 이름하며, To Be에 근거한 현상이라 설명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To Be(= Not To Have-Not To Have)로 말하면 잘못이다. 에로스 상태에서는, Not To Have(To Give)의 결과가 To Have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경험을 떠올려보자. 당신이 에로스 상대에게 내어줬던 의도는 순수했다. 오직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기쁘게 하겠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했다. 그러나 내어주고서 얻은 기쁨은 어떻게 되었던가. 한없이 기쁘고 끝났던가, 아니면 그를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소유욕으로 변질되었던가. 장담컨대 후자였으리라.
에로스는 자기를 상대에게 내어놓게 만든다. 이것은 그가 나를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극복하는 일이기도 한데, 그렇기에 에로스는 더욱 신비롭고 위대하다. 하지만 그 결과로 상대를 갖게 되면 기뻐하고 그렇지 못하면 고통스럽게 된다. To Give의 기쁨이 To Have의 소유욕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결국 큰 것을 얻기 위해 자기를 베팅하는 일이 되어버리므로, 에로스는 어쩌면 소유를 위한 도박이라 불려야 할지도 모른다.
상태 매트릭스로 이를 설명하자면 To Have-To Give의 중첩상태라 하겠다. 소유하지 않는 힘으로 자아를 긍정하지만, 여전히 '나의 상대'를 자아에 붙잡으려 한다. 주면서도 가지려는 모순된 상태가 되는데, 그렇기에 에로스는 그토록 불안정하고 고통스럽다. 내어놓는 기쁨과 소유하려는 집착이 끊임없이 충돌하기 때문이다. 상대에게 헌신하면서도 분노하고, 열망하면서도 미워한다. 그리고 끝내 내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배신감을 느끼며 이별하게 된다.
To Have-To Give 상태에 머무는 한, 그 대상만 바뀔 뿐 이 과정은 무한히 반복된다. 그래서 에로스는 신비롭기도 하지만 진부하기도 하다. 나의 치열한 에로스가 저 사람의 뻔한 에로스와 다르지 않고, 그놈은 결국 그놈이다. 에로스의 정체를 실감할수록 그 과정은 귀찮아진다. 당신은 점점 에로스를 피하게 되고, 전심으로 빠지기보다는 흉내 내는 정도에 그치게 된다. 사랑을 믿던 당신은 온데간데없고, 쇼핑이나 한때의 놀이로 치부하는 냉소적인 당신만 남게 된다.
그러나, 반드시 이 염세적인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미 몇 번의 시도로 지쳐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에로스는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오직 에로스만이 당신에게 그 창조적인 힘을 경험하게 하기 때문이며, 그것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것만이 To Be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에로스만 To Give를 경험시킨다는 주장이 비약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에로스가 아니더라도 가족이나 친구, 이웃에게 자기 것을 내어주며 보람을 느끼기도 하니 말이다. 그러나, 첫 번째 고찰에서도 살펴보았듯, 그들은 타인이 아니라 확장된 '자기'다. 이는 자기 것을 자기에게 재분배하는 일에 지나지 않으며, 완전한 타인에게 자기 세계를 내어놓는 경험은 에로스에서만 비롯된다. 오직 에로스만이 당신을 타인에게 베팅하게 만들며, 기꺼이 그것을 반복하게 만든다. 내어놓는 존재로서 당신을 훈련시키는 것이다.
당신은 끊임없이 내어놓아야 한다. 여가 시간을 내어야 하고, 이기심을 포기해야 하며, 특별한 준비를 요구받는다. 일반적 관계에서는 '내가 왜?' 하겠으나, 에로스 상태에서는 그렇지 않다. 당신은 기뻐하며 매일 내어 놓는다. 그리고 이것이 반복되면서 점차 자각하게 된다. 내어줄 때 실감하는 역동적인 힘이, 가질 때 느껴지는 안도감보다 더 깊은 차원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자각은 전환으로 이어진다. 내어주는 행위 속에서 자기 존재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To Have가 아닌 방법으로 자아를 인식하는 데 성공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에서 프롬은 사랑이 받는 게 아니라, 주는 것에 관한 일이라 설명한다. 주는 행위로써 자기를 인식하고 주는 행위로써 그것을 긍정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상태 매트릭스에 근거해 이를 해석하면 To Give-To Give의 중첩상태라 하겠다. 이 상태의 당신은 내어놓는 기쁨을 더 이상 소유욕으로 환원시키지 않는다. 창조적인 힘을 온전히 누리며, 자기를 내어주는 존재로 정의한다. 그리고 그런 당신의 To Give는 더 이상 에로스에 국한되지 않는다. 당신은 연인에게 기뻐하며 내어놓듯,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할 수 있게 된다. 이는 프롬이 "한 사람을 참으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과 세계를 사랑할 수 있다"라고 말한 사실과 같은데, 에로스를 통해 사랑하는 능력을 한 단계 발전시켜낸 것이다.
이는 Not To Have(To Give)-Not To Have(To Give) 구조로 To Be이기도 한데, 여전히 중첩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이것은 지속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모두 줘버려 더 이상 내어놓을 것이 없게 되는 상황이 오기 때문이며(자의), 상대가 내 것을 더 이상 원하지 않는 사건이 발생하기 때문이다(타의).
나에게 사랑의 신 에로스를 다시 정의해보라 한다면 탄생과 죽음의 신이라 말하겠다. 우리가 오직 에로스를 통해서만 탄생과 죽음을 직접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아마도 이 주장이 의아하게 들리리라. 에로스와 그것들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남녀가 결합해야 생명이 잉태되는 법이니 탄생과 무관하지는 않겠으나, 그건 원인이지 결과가 아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우리는 자기의 탄생을 경험할 수 있을까? 앞으로 죽음은 경험할 수 있을까? 경험이 지식의 영역인 한, 절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단지 그런 사건이 있었고 앞으로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머리로만 알 뿐이다. 탄생의 기억은 사라졌을 것이고, 죽는 순간엔 뇌 기능이 멈추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종류의 탄생과 죽음은 경험할 수 있다. 자아의 사상적 탄생과 죽음이 그것이다. 최초의 자아야 육체와 같은 논리로 경험할 수 없겠으나, 그 자아의 죽음과 새로운 자아의 탄생은 생생하게, 그리고 몇 번이고 경험할 수 있다. 바로 에로스를 통해서 말이다.
에로스가 성립되면(심지어 쌍방이 아닐지라도) 당신 뇌 속에는 '우리'라는 새로운 자아가 탄생한다. 반복하지만 가족, 친구, 이웃은 '우리'가 될 수 없다. 그들은 이미 당신 세계에 속해 있던 확장된 자기이기 때문이다. 오직 에로스 대상만이 기존 세계에 속하지 않았던 외계의 존재이자, 당신과 결합해 새로운 세계를 탄생시킬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다.
그렇게 탄생한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자아다. 기존 자아를 이뤘던 모든 법칙과 개념은 상대라는 우주와 결합해 새롭게 정의된다. 어제까지 A가 틀렸다 믿던 당신이지만 오늘부터 그것은 진리가 되고, 어제 걸었던 똑같은 길도 오늘부터는 꽃길이 된다. '우리'가 당신을 지배하고, 기존 자아는 뇌 속 어딘가에 파묻혀 영영 나오지 못한다. 당신은 새로운 자아로 새로운 인간이 되어 새로운 역사를 쌓아간다.
무척 낭만적인 얘기다. 에로스의 상대와 결합해 새로운 세계를 탄생시킨다니 말이다. 꼭 서로의 에덴동산을 창조하는 일 같다. 그러나 반대로 상대와 분리되면 어떻게 될까? 새로 태어난 자아는 즉시 죽음을 맞이한다.
앞서 To Give-To Give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했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관계가 반드시 끝나기 때문이다.
관계는 자의로 끝난다. To Give-To Give 상태에서 당신은 내어주는 존재로서 사랑했다. 그런데 당신이 아무리 많이 가진 사람이라 한들 무한히 내어줄 수는 없는 법이다. 호르몬의 고갈 때문이든, 재산의 고갈 때문이든, 당신은 필연적으로 상대에게 더 이상 내어주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러면 내어주는 존재로서 내어주며 긍정하던 당신은 무력감과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 그런 자신을 스스로 견디지 못하게 되며, 그래서 자발적으로 그 관계를 포기하게 된다.
관계는 타의로도 끝난다. 상대가 일방적으로 당신을 거절하는 것이다. 당신은 그에게 온 세계를 내어주려 하나, 상대는 그것을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 줄 곳을 잃은 당신은 창조적인 힘을 경험할 수 없게 되고, 마찬가지로 무력감과 좌절감을 경험하게 된다. 상대에 의해 '우리'가 끝나버린다.
경험을 떠올려 보라. 무엇에 의해서였든 분명 끔찍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어제까지 온 세상을 채웠던 '우리'는 온데간데없고, 그와 함께 창조한 세계는 폐허가 된다. 아쉬운 마음으로 재회해 본들 더 이상 그때의 서로가 없다는 사실만 실감한다. 죽은 자아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단지 기억될 뿐이다. 그리고 그 기억조차 점차 흩어져 한때 존재했다는 사실마저 지워지게 된다. 이 허망한 죽음 앞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그저 홀로 남아, 썩어가는 '우리'의 시체를 남김없이 뜯어먹는 처절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재밌게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를 '애도기간'이라 표현한다. 어느 날 시작된 존재가 어느 날 소멸하는 이것은 한 사람의 죽음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함께 걷던 거리, 함께 보던 드라마, 함께 웃던 농담. 당신 혼자 일상 곳곳에 남겨진 시체조각들을 모조리 수습해야 한다. 죽은 자아의 영원한 부재를 온몸으로 녹여내야 한다.
그것이 3일장이든 3년상이든 간에, 장례를 모두 마치고 나면 당신은 새로운 자아를 얻는다. 아마 원래의 자기로 '돌아왔다' 착각하겠지만, 이것은 명백히 다시 태어난 자아다. 한번 죽어본 자아로, 그 무상함과 허망함을 두려워하고 있는 자아다. 그래서 당신은 처음과 같은 에로스를 더 이상 해낼 수 없다. 이미 죽음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몰랐을 때야 전심으로 내어줄 수 있었으나, 두 번째부터는 주저하게 되고, 세 번째엔 의심하게 된다. 얼마지 않아 또 죽게 될 것이다. 죽고 나면 슬플 것이고, 별로 오래 기억되지도 못할 것이다. 빈털터리가 된 채 홀로 남겨져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탄생을 거듭할수록 기쁨은 옅어지고 무상함만 선명해진다.
그렇게 To Give-To Give에 이르렀던 당신조차 다시 회귀한다. 본능에 따라 에로스를 경험했고, 내어줄 때의 그 놀라운 힘도 실감해 보았으나, 계속해서 그렇게 하기는 포기했다. 허무한 죽음을 몇 번이나 반복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대에게 내어놓은 것들이 죽음과 함께 하릴없이 흩어지고, 쥔 것과 받은 것들만 단단히 남는다는 지혜를 얻어버렸기 때문이다.
To Be의 문턱에 섰던 우리는, 다시 To Have로 회귀한다.
글로 읽는 것조차 이미 지쳐버렸을 것이다. 사랑하고 이별하고. 태어나면 다시 죽고. 이번에는 뭔가 다를 것 같다가도 결말은 모두 같다. 태어나면 반드시 죽듯, 사랑하면 반드시 이별한다. 설령 결혼하게 되어 육체적 이별은 하지 않더라도, 차마 이혼하지 못해 같이 사는 이별은 필연이다. 저주스러운 쳇바퀴라 하겠다.
당신은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반복되는 쳇바퀴 앞에서,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진다. 하나는 아주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사랑은 헛되다. 보라. To Give고 나발이고 헤어지면 끝이지 않나. 어차피 헤어질 거라면 손해보지 않겠다. 필요하면 취하고 입에 쓰면 버리겠다. 마음에 드는 것만 골라 소비하지 원하지 않는 건 받지도 않겠다. 쇼핑하듯 그렇게 하겠다.
쉽게 공감되는 선택지일 것이다. 어디서 많이 본 생각의 흐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삶에 대해서도 취하고 있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죽게 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난 이후로, 우리는 엄밀히 말해 살아가기를 포기한다. 어차피 헤어지게 될 것이므로 사랑하기를 포기하듯 말이다. 그때부터는 연명을 시작한다. 죽음이라는 단 한 번의 순간이 오기 전까지, 원하는 것만 취하는 인생을 시작한다. 어차피 죽을 인생 모든 게 헛된 것이다. 쾌감이나 즐기다 가자. 당장 쾌감을 소비할 여력이 없다면, 미래에 쾌감을 소비할 수 있는 삶을 살자. 누구에게나 한 번뿐인 인생이지 않은가.
이런 태도가 옳다 그르다 말하기는 어렵다. 누구도 두 종류의 삶을 동시에 살아낸 사실이 없기 때문이다. 실증적으로 비교할 수 없으므로, 이것은 다만 추론에 의존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추론에 근거한다면, 이는 틀릴 가능성이 높다. 연역적으로 볼 때, 죽음이 한 번의 사건이라는 전제가 틀렸기 때문이고, 귀납적으로 볼 때, 이런 태도로 말년에 행복한 결말을 맺은 사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태도로 행복한 결말에 이른 사례는 있다. 예수나 부처와 같은, 우리가 성인이라 부르는 인간이 실제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추종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죽음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는 순간에조차 긍정하며 삶을 마쳤다. 살아가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 유사한 구조라면, 우리는 이들이 실천한 삶의 태도에서 사랑하는 태도의 실마리를 얻어야 한다.
Q.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A.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마 22:39].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쇼핑하듯 배우자를 찾는 태도가 틀렸다는 것을 논증하며 두 번째 고찰을 시작했다. 낭만적으로 고르는 것도, 현실적으로 고르는 것도 모두 틀렸다. 프롬에 따르면, 우리는 무언가를 골라서는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 틀렸다는 주장이 불편하셨겠지만 결코 반박할 수는 없었으리라. 정론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공감도 어렵다. 고르지 않으면 뭐, 어느 사이비 종교에서 그리하듯 교주가 짝지어주는 사람하고 결혼을 하란 말인가. 아무나와 했다가 그 사람이 마약중독자면 어쩔 텐가. 아동학대자면 어쩔 텐가. 그것조차 나의 사랑하는 능력에 달린 일은 아니지 않냔 말이다.
당연히 그럴 수 없다. 우리가 성인군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단적인 몇 가지 사례로 올바른 방향을 포기하자는 태도에는 동의할 수 없다. 어차피 모두를 사랑할 수는 없을 테니 아무도 사랑하지 말자는 주장은, 어차피 죽을 것이니 지금 죽자는 주장과 같은 논리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만약 성인군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프롬은 진정으로 상대를 사랑한다면, 상대에게도 사랑이 피어나게 할 수 있다 말했다. 그리고 예수나 부처의 삶이 그 증거다. 그것이 옳고 그른지는 차치하더라도, 적어도 그 추종자들이 같은 방식으로 사랑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태도가, 프롬에 따르면 자기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태도가, 옳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으므로, 근거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그 방향은 어느 쪽인가? 프롬이 그 지도를 남겼다. 우리는 To Have에서 시작해 To Be로 나아가야 한다. 물론 앞서 살펴보았듯 험난한 여정이 될 것이다. 우리는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 To Give를 시도하겠지만 몇 번이고 죽어 To Have로 회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기하지 말자. 셀 수 없이 많은 삶을 회귀하더라도 기꺼이 다시 한번 시도하자. 어쩌면 결국 도달하지 못하고 삶을 마치게 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틀린 방법을 시도하다 맺는 결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까지 시도해야 할까? 얼마나 오래, 얼마나 많이 시도해야 할까?
프롬이 남긴 지도에 따르면, No Need To Have-No Need To Have 상태가 될 때까지다. 그리고 이것이 곧 세 번째 고찰의 주제가 되겠다.
1.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가?: 자아를
2.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To Be로
3. 얼마나 사랑해야 하는가?:
두 번째 고찰을 담아내기까지 9개월이 걸렸다. 프롬의 생일날, 그에게 헌사하는 선물처럼 글을 마무리하고 싶었는데 마음처럼 되지는 않았다(생일파티는 했다).
이제 남은 한걸음은 ③얼마나 사랑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인데, 가급적 올해 안에 마치는 것이 목표다.
혹시 다음 생각이 궁금하신 분들이 계신다면 영화 매트릭스 시리즈를 보시라 권하고 싶다. 이번에도 같은 주장을 반복하지는 않겠지만, 다음 고찰은 매트릭스에 담긴 이야기에 많이 의지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