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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맘가는대로 Jul 02. 2024

가치관이 드러나는 우선순위

지금 내가 먼저 하는 일이 내게 더 소중한 일입니다.

저는 순서달기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순서달기라는 것은 말 그대로 무엇을 먼저 하고, 어떤 것을 뒤로 미룰 것인가를 정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일이 동시에 몰려오면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고 하기도 하지만, 저는 선택의 문제보다는 순서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을 좋아하는 까닭은 순서를 제대로 정해야만 더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해 효율적으로 자원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더 중요한 것,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절대적인 순서가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만의 기본적인 우선순위는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가치관입니다.


과거 EBS에서 TV동화 행복한 세상이라는 짧은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그중 “인생에서 중요한 것”편에 나왔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나이 많은 철학교수님이 강의 시간에 강의 대신에 그릇을 책상에 올려놓으시고, 먼저 탁구공을 채우셨습니다. 그리고, 다 찼냐고 물어보십니다. 학생들이 다 찼다고 대답합니다. 그다음에 자갈을 넣으시고, 또 다 찼냐고 물어보십니다. 역시 다 찼다고 학생들이 대답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모래를 채우십니다. 드디어 학생들은 다 찼다고 이야기합니다. 대답을 듣고 나서 홍차 한잔을 그릇에 부으셨습니다. 홍차가 모래 사이로 다 들어가자 웃으시며 이야기하십니다. 그릇은 여러분의 인생이고, 탁구공은 가족, 건강, 친구, 자갈은 직업, 취미, 모래는 여러 가지 자질구래한 일이라고. 만일 모래를 먼저 채운다면 자갈도 탁구공도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부은 홍차 한잔은 여유라고 하십니다. 아무리 바빠도 차 한잔을 할 여유는 있다는 것입니다. 꼭 인생이라는 커다란 그릇이 아니어도, 저는 항상 탁구공을 먼저 채우고자 고민합니다.


위 이야기에서 가족이나 건강을 먼저 채워야 한다는 것으로 들을 수도 있지만, 무엇을 먼저 채우느냐에 따라 그릇에 채워진 것들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위 이야기에서는 가족, 건강 등을 탁구공에 비유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가족, 건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먼저 자신의 그릇에 채워야 합니다. 과거 퇴직 면담을 하면서, 자신은 가족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회사를 옮기면서 주말부부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족을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주말부부를 하는 것은 괜찮은지 물어보았더니, 애매한 변명을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 주말부부와 가장 중요한 가족 간의 관계를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았습니다. 비슷한 예로, 요즘은 그런 사람이 점점 줄고 있지만, 은퇴한 가장이 가족 안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제 아버지도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가족을 위해 지치고 힘든 몸을 이끌고, 부당한 대우를 버티고 살았지만,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법을 모르셨습니다. 과거에는 당신의 모든 것을 바쳤으니, 이제는 가족들이 당신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기를 기대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족이 중요한 것은 너무나 잘 아셨지만, 탁구공보다 자갈과 모래를 먼저 채우셨던 것입니다.


회사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사에서도 탁구공에 해당하는 것이 있습니다. 한번 잃어버리면 되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신뢰라고 생각합니다. 부서가 기본적으로 담당해야 하는 일도 탁구공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끔은 모래를 먼저 채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질구래한 고민이나, 불필요한 보고나 회의입니다. 결정이 따라오지 않는 보고나 회의는 대부분 불필요합니다. 점검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면, 무엇을 점검해야 할 것이지는 미리 합의가 되어야 하고, 그 후에 무엇을 지원할지, 가던 방향을 유지하면 되는지 등 결정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래가 됩니다. 제가 실무자이던 시절에는 보고서의 폰트와 줄맞춤을 하느라 하루를 보낸 적도 있었습니다. 문장의 단어와 조사를 선택하느라 새벽까지 회사에 남아있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보고를 하실 상무님이 갑작스러운 질문에 대답을 못하는 일이 없도록 추가 자료를 만드느라 몇 날 며칠을 다른 일은 접어둔 적도 있습니다. 심지어 보고서를 잘 만든다는 이유로, 보고서 작성이 주 업무인 사람도 있었습니다. 모래를 먼저 채워서 탁구공 자리가 없었던 경우입니다. 반대로 탁구공만으로 그릇을 채우려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요한 일만 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일의 진행을 보고하거나 점검받지도 않고, 다른 부서의 일은 내 일이 아니라고 무시하는 경우입니다. 그릇에 탁구공만 채우면 그릇 안의 탁구공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계속 굴러다니거나, 밖으로 튕겨져 나가게 됩니다. 중요한 것으로만 채웠지만, 외부의 충격이 오면 그 중요한 것을 지킬 수 없기도 합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모래입니다. 탁구공 사이사이를 채우고 있는 모래가 탁구공을 잡아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가지 일만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계속 새로운 일이 추가되고, 갑자기 하던 일을 멈추어야 하기도 합니다. 어제까지 가장 중요했던 일이 오늘은 뒤로 밀려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 리더의 역할입니다. 무언가를 포기하는 선택을 해야 할 수도 있지만, 일의 순서를 바꾸는 결정을 해야 하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순간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중요해서 새로운 일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일이 더 중요해서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그만두는 것이 아닌 잠시 뒤로 미루는 결정이,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에 나만의 순서를 매기는 것이 리더의 역할입니다. 순서는 리더의 가치관에 따라 정해집니다. 상사의 결정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리더라면 누가 지시한 일인지가 순서를 결정할 것입니다. 고객이 가장 중요한 리더라면, 고객이 순서 결정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결과가 중요한 경우와 과정이 중요한 경우에도 다른 순서가 만들어집니다. 일과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중요도의 차이가 별로 없거나, 결정의 기준이 없어서 일이 들어온 순서대로 하는 때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리더의 가치관에 의해 결정됩니다.


한 번쯤 나는 무엇에 우선순위를 두는가를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과거의 자신을 돌아봐도 좋고, 일어나지 않은 경우를 가정해도 좋습니다. 다양한 일들이 한꺼번에 밀려올 때 당신은 무엇을 먼저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차 한잔의 여유도 가지고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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