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치는 과연 실패했는가?
나는 개인적으로 인물들과 풍경을 절묘한 색감과 터치로 아름답게 표현한 르누아르, 모네같은 전통적인 화가들을 좋아한다. 그림 본연의 가치를 지키며 대중들에게 직관적으로 아름답다라는 인식을 줄 수 있는 그런 화가들의 작품. 나태주 시인의 '풀꽃'처럼 심심할 수 있어도 오래 보아야 더 예쁜 마음에 안정감을 주는 그런 작품들 말이다.
2018년이었나 그즈음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있었던 마르셀 뒤샹전은 나에게 꽤나 큰 충격이었다. 무슨 변기통을 가지고 와서 그것도 자기 이름이 아닌 R.Mutt라는 사인을 박아넣은 작품이 기성공산품에 대한 최초의 작품성을 인정하고 기존의 정형성을 파괴한 대단한 작품이라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나같은 범인들에게는 그저 제자리를 잃은 변기통에 불과했다.
뒤샹으로 대표되는 다다이즘은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종류의 이성 언어를 부정한다. 이와 같이 류장강으로 대표되는 정의당의 정치 역시 전통을 부정하고 기존 체계와 관습에 적대적으로 반발하는 점에서 둘은 닮아있다. 제1차세계대전에 따른 젊은 예술가들의 분노가 현실에 담겨 표출된 다다이즘이 현재의 젊은 정치인들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그들은 민주당과 국민의힘과 같은 거대양당에 대한 분노를 바탕으로 정치를 하는 듯 하다. 국민 98%의 선택을 받는 양당이지만 그런 거대양당은 전통적인 양당체계에서 나온 괴물일 뿐이며 기성 문법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기에 반드시 타도되어야 할 대상으로 규정한다.
남성에 대한 적대감 역시 마찬가지다. 남성중심의 모든 체계를 부정한다. 이러한 사회적구조 역시 모두 남성중심적이며 남성이 주류인 세계 자체를 거부한다. 그들이 내세우는 페미니즘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여성을 죽이는 사람들로 프로파간다를 내세우기까지 한다.
대중언어에 대한 반발 역시 그들은 다다이즘적이다. 관용적이거나 은유적으로 사용되던 표현인 외눈, 깜깜이, 절름발이 등을 그들은 용납할 수 없다. 그녀, 여왕, 아가씨, 아줌마 등 여성을 지칭하는 언어들 역시 차별적이며 남성중심적 가치의 언어들로 규정한다. 물론 그들은 그들자신에게만큼은 절름발이의 의학적용어인 파행은 마음껏 써도 된다는 입장일 정도로 한없이 관대한 편이다.
사회상규로의 관혼상제 역시 그들에게는 타도대상일 뿐이다. 누군가의 죽음앞에 그들이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은 조화에 누구 이름이 박혀 있나에 불과하다. 그들에게는 남은 유가족의 마음을 살피는 것 역시 근대적인 관습에 불과하다. 그런 것들은 이 세계를 온정주의로 물들게 하는 악습에 불과한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바쁜 세상을 살아가는 대중들은 이들의 고결한 뜻을 깨닫지 못하고 오랫동안 이어져 온 관습을 이어나가기 마련이다. 가끔씩 술자리에서 걸쭉한 욕지기를 하고 누군가의 죽음이 딱하기도 하다 위로도 하기 마련이다. 물론 그들은 자기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느덧 혐오주의자로 조리돌림당하는 것이 그들의 사회이다.
호불호를 떠나 분명한 것은 그들의 정치문법은 기존의 고전적 진보정치와는 궤를 완전히 달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전적 진보정치는 무엇보다 사람중심의 정치를 하고 민초들의 삶과 가장 가까운 정치를 지향했다는 점이다. 가장 아래에서 이끌어내는 변화를 진보정치의 힘이라고 생각했다면 다다이즘 정치는 과두정치처럼 당 내 일부 정치인과 학자들을 중심으로 이론을 구성하고 이 세상 자체를 재구성하는 것에 방점을 둔다는 것이 결정적인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차이는 르누아르의 그림과 뒤샹의 작품처럼 하늘과 땅 끝 차이나 마찬가지다.
대선이 끝났다. 2.37%의 득표. 세상을 부정하는 그들이 주도한 선거의 성적표이다. 나는 결코 이번 대선이 진보정치의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새롭게 태동하는 허무적 다다이즘정치의 발현이며 세상을 바꾸는 진보정치의 새로운 재구성이 시작되는 시점이라고 믿는다. 나는 고전적인 진보정치를 지지하는 시민으로 여전히 같은 곳에 남아있을 것이다. 새롭게 태동하는 다다이즘 정치의 앞날에도 응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