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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의 직장생활, 그래서 우리가 살았다

원칙으로 지킨 직장과 가정

by 토모

아버지는 1977년 2월 10일에 임용되어 2012년까지 정확히 34년을 일했다. 퇴직 후 34년을 보상하는 것은 조촐한 퇴임식 행사와 녹조근정훈장이었다.


소회에 대해 질문했을 때는 “소회라... 글쎄, 그 덕에 뭐, 우리 식구 잘 살았지”라는 담백한 한 줄로 34년을 표현했다. 이제 4년차 공무원인 아들은 34년을 버틴 아버지를 존경스럽게 바라봤지만 “공무원은 원래 오래 다니는 기라.” 하고 웃으며 손사레를 치셨다. 하지만 아들은 알았다. 오래 머문다는 말이 ‘그저 버틴다’는 뜻과 같지는 않다는 것을. 그 세월동안 아버지는 스스로에게 끝없이 되묻기도 했을 것이고, 어떠한 난관앞에서 본인의 뜻을 고집했고 때로는 미움받는 일까지 자처했을 터였다.


즐거움부터 묻자 아버지는 당신의 성격처럼 시원하게 답했다.
“축구. 축구회장하는 것도 좋았고 직장생활 하는 내내 다 재미있었어"
내가 초등학생일 때 아버지는 구청 직원 축구팀의 감독을 맡았다. 간혹 대구시장배 구청장 대항전이라던지 단합대회가 있는 날엔 온 가족이 함께 그 날을 즐겼다. 축구팀에는 아버지를 따르던 후배 공무원들이 많았다. 후배들은 아버지를 추켜세우다가도 어머니가 오면 "형수님이 최고"라며 연신 따봉을 외쳐댔다. 그만큼 축구팀에 있는 순간만큼은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두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단합대회는 단순했다. 계곡가 넓은 공터에 자리를 잡고 고기를 삶고 굽고 술을 마시며 족구도 하며 하루를 함께 보냈다. 나와 쌍둥이동생도 고기를 받아 먹고 장기자랑시간엔 나와 당시 유행했던 '걸어서 하늘까지'를 불렀다. 꼬깃꼬깃 접은 지폐를 용돈이라고 쥐어주면 우리도 덩달아 신이 나던 시절이었다.


구청장님과 함께 공을 찬 적도 있었다. 그땐 갓 대학생이 되었을 때였는데 함께 축구를 하고 구청장이 "서감독 아들이가?" 묻고 "아버지한테 잘해라" 덕담을 해주기도 했다. 학교 후배인 것을 알고는 더 잘해준 것 같기도 했다.


아버지의 말에는 직장생활 모든 것이 즐거운 기억이었지만 현실은 그렇지만도 않았다.

“문제는 윗세대의 사고방식이 우리하고 너무 컸다. 우리 세대들이 안좋게 보는 것을 뻔뻔스럽게 자꾸 할라고 하더라"

그게 싫었던 아버지는 둥글둥글하다고 어떨때는 못보다 단단하게 뾰족해졌다.

"업무추진비를 현금으로 빼 쓰려 하고, 횡령 비슷한 걸 ‘관행’이라 우기고… 그게 제일 싫었다.”

사무관이 된 뒤에도 아버지는 업무추진비 카드를 몸에 지닌 적이 없다. “0.1초도 주머니에 넣어 다닌 적이 없다.” 회계 담당자에게 맡겨, 잘못된 관행과의 거리를 일부러 벌려놓았다.

"평소에 들고 다닐 이유가 없지.” 작은 습관이 하루, 한 달, 한 해를 통과하면서 성격이 되었고, 그 성격이 명확한 평판을 만들었다. 서보영은 강직한 사람이라고.


더 큰 일은 따로 있었다.
2001년경, 북구청 도시개발 허가부서의 계장 시절, 어느 날 윗선을 통해 낙동강변의 개발을 위한 토지 형질변경 허가를 은근히게 압박했다. 금호강 제3아양교 아래, 지금은 공원인 그 지점이었다. 개발업자들이 자연녹지에 대규모 성토를 해 잡종지로 바꾸려 했다. 5만 평을 6m 올리자며, 지하철 공사서 나온 흙 반입까지 거론했다. 이 사업에는 조직폭력배의 그림자도 어른거렸다. 아버지는 제방 여유고를 처음부터 재봤다. “30cm 남짓밖에 없더라.” 그 상태에서 하천변을 높이면 유속이 빨라지고 제방이 받는 압력이 커질게 자명했다. 이건 청렴의 문제가 아니라 대구시민의 안전까지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한 번 터지면 인재(人災)다. 아 이건 절대 해주면 안되겠구나”


관련 자료를 검토한 아버지는 권력자에게 짧게 답했다. “안 됩니다.”


그럼에도 유혹은 더 노골적이었다.
“옛날엔 백화점 쇼핑백에 만 원권을 꽉 채우면 1억이 된다. 그걸 들고 와서 ‘좀 봐달라’고 하더라고”
또 어떤 이들은 어머니를 찾아 우리 집까지 찾아왔다. “허가만 내주시면 수성구 아파트 하나 해주겠십니더라고 하더라.” 그들이 어머니를 찾아갔던 이유는 자명했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당신들 집도 알고 모든 지 할 수 있다고' 그럼에도 아버지는 당당했다.


“사람인데 돈 보면 탐나지. 근데 받으면 형무소 간다. 그리고 더 크게는 시민들한테 죄 짓는 거다.”


아버지는 절차대로 개발업자들에게 말했다. “허가신청 내라. 나는 불허 처분한다. 그리고 행정소송 걸어라. 판사가 하라고 하면 그때 하겠다. 그 전에는 절대 못 해준다.” 윗선 라인까지 압박은 계속 내려왔지만 실무책임자로서 그는 서명하지 않았다. “내 빼고 내위에부터 알아서 사인해라. 나는 못 한다.” 결국 그 사업은 좌초했고, 그 땅은 지금은 대구시민의 공원으로 남았다. 지금 사람들로 붐비는 수변카페 거리와 산책로를 떠올리자 아버지는 손을 내저었다. “내 공이랄 건 없다.” 그래도 나는 안다. 누군가의 강고함이 그 풍경을 지켜냈다는 걸.


아버지는 원칙을 강조했다. “대도시에선 자연녹지를 더 줄이면 안 된다. 공원을 일부러라도 늘려야 한다.”


그 뒤 좌천성 전보가 났다. “교통과로 잠깐 갔지." 도시국 주무계장에서 한직인 교통과로 가라는 건 더이상의 앞날이 보장되기 어려운 순간이었다. "사무관? 포기하려 했다.” 그러나 7개월 만에 다시 아버지는 총무국 행정계장으로 콜-업 되었다. 마이너리그에서 메이저리그로 복귀한 박찬호같은 귀환이었다.


“그래도 바른 말 하는 건 서보영밖에 없다더라.” 가장 아래까지 떨어졌다가 구행정의 중심으로 복귀했고, 이듬해 선거철에는 ‘선거관리업무’ 를 총괄했다. “능력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르겠다. 근데, 입 닫고 넘어가진 못하겠더라.” 당시를 말하며 쓴웃음을 지었지만, 그 웃음 뒤엔 확고한 태도가 있었다.


그는 지갑에 법인카드를 넣지 않았고, 어떤 공무를 처리할 때도 규정을 가장 먼저 생각했다.


아버지의 원칙과 정도로 집안은 그 34년을 함께 버텼다. 급여 봉투는 생활비와 대출을 갚는데 사용했다. 까치둥지에서 어미의 먹이를 받아먹는 새끼들처럼 우리들은 그렇게 사회에서 치열하게 싸워온 아버지의 품에서 무럭무럭 자랄 수 있었다.


34년이라는 세월은 역사에 남을 거창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어떤 역사보다 위대했다. 그러한 버팀속에 가족의 보금자리, 어머니의 첫 자동차, 세 아이의 대학등록금이 만들어졌다.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큰일’ 대신 ‘매일’을 택해서 얻은 성취였다. 그리고 그 매일이 우리 집의 삶을 지켰던 것이다.


“그 덕에 우리 식구 잘 살았지.”
거기에 하나를 더 얹고 싶다. 그 덕에 우리 도시도 잘 살아남았다. 한 공직자의 굳건한 마음, 지갑에 법인카드를 넣지 않던 한 사람의 버팀이, 제방의 여유고처럼 보이지 않는 도시의 안전을 만들어 주었다. 그 높이가 있었기에, 욕망의 물살이 아무리 높아져도 제방은 쉽게 넘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도시를 지켜 낸 시간, 우리를 살린 시간이 바로, 아버지의 공직 인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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