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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작, 복현동

공직자로서의 첫출발

by 토모

“두 달도 준비 안 했지. 아니, 한 달도 안 했지.”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다. 예비군 신고하고 왔다 갔다 하는 사이, 기출문제집 한 권을 끝장을 보겠다는 각오로 넘겼다. “이런 걸로 시험을 치나 싶더라.” 아버지 입장에서는 문제가 굉장히 쉬웠던 것이다. 8월 중순, 대구시 공무원 시험을 치렀고 결과는 합격이었. 군 가산점 5점을 더하든 말든, “모르겠다 싶은 문항이 두 개뿐이었다”는 말에서 그 시절의 머리와 근성이 한꺼번에 겹쳐 보였다. 합격 통지를 확인한 그 날 오랜만에 집안 공기가 훈훈해 졌다. 누가 소리를 질러 축하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알았다. 이 집에 ‘일’이 들어왔다고.


합격 통보와 함께 잠시 몸을 눕혔던 곳은 친척 누님이 사는 대명동 집이었다.
“큰누님이 스물셋에 혼자가 돼서, 조카들이랑 한집처럼 컸다. 외삼촌이었던 아버지와도 비슷한 또래인 조카들과 아주 남매처럼 살았다. "거서 엎드려 있으면서 책 보고, 거기서 시험도 치고.”

발령일은 2월 4일. 첫 근무지는 대구 북구 복현동 동사무소였다.
“2월 4일, 복현동.”
짧게 찍어 말하는 숫자가 어떤 이들에겐 단순한 날짜겠지만, 우리 집엔 하나의 기념일처럼 남아 있다. 그날로 아버지의 ‘직업’이 생겼고, '운명'같이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고, 우리 '가족'의 구성이 태동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할머니는 광명에 살았다. 군인이었던 큰 아버지의 관사에 함께 사셨지만 할머니도 오래 있을 수는 없었다. “큰엄마하고는 사이가 썩 좋지 않아서.” 씁쓸한 웃음과 함께 서운함이 담긴 얘기였다.


부임 직후, 할머니가 내려오셨다.
“너 큰아버지가 광명에 살아서 거기 계시다가, 내가 발령 받으니까 너 할머니가 이리 내려오셨지. 날 밥해 주고 살았지.”
젊은 공무원의 첫 근무지 뒤편, 자그마한 부엌과 밥 냄새가 있었다. 고령, 광명, 다시 대구...자식 따라 이동하던 노모의 발걸음이 복현동에 멈췄다. 이후 아버지는 “결혼하고도 한 2년은 엄마(할머니)랑 같이 살았다”고 했다. 누가 누구를 부양했다기보다, 서로가 서로의 숨을 붙들었다는 말에 가까웠다. 젊은 공무원의 퇴근 뒤 밥 냄새, 노모의 뒷바라지와 노고가 더해져 집안에 훈풍이 다시 들기 시작했다.


그 무렵 아버지는 자신의 선택을 이렇게 정리했다.
“처음엔 공무원을 오래 할 생각이 없었지. 라디오에서 ‘대구시 공무원 시험’ 나오길래, 그냥 쳐봤다. 사람이 살아가는 운명이 그렇게 결정되더라.”
라디오의 한 줄 공고가 직업을, 직업이 일상을, 일상이 아버지의 을 빚었다.
“뭐 일하게 있어. 공무원이. 동사무소 일이 뭐 대단하나. 그래도… 나쁘진 않지.”
담담한 문장 속에 겸손과 겸양의 윤리가 있었다. ‘대단하고 거창한 일은 아니지만 끊임없이 가족을 위해 끊기지 않는 일'을 한다는 것. 아버지는 그 길을 택했고, 결과적으로 “그래가 평생 이래 잘 살았어”라고 말할 수 있게 됐다.


복현동에서의 첫해는 배움보다 ‘몸’이 앞섰다. 새벽에 문 열고, 민원 창구 지키고, 구획 정리하고, 인감대장을 정리하고, 호적부를 넘겨가며 호주 성명을 확인했다. 낡은 서류철을 들고 동네를 걸으며 표지판을 세우기도 하고고, 노인정에 문제가 있으면 찾아가서 도움도 주고, 행정 계도를 하다가도 동네 아지매가 건넨 떡 한 조각을 받아 먹으며 하루의 피로를 씻었다. 하루 끝에 해가 깔딱 넘어갈 때쯤 ‘행정’은 책에서 배운 말이고, 현장은 사람과 발이라는 생각이 떠 올랐다.


그러나 그 단조로움 속에서 아버지는 의외의 기쁨과 만났다.
“창덕이 당숙이 나를 무척 아꼈다. ‘공부도 잘하고 착하고, 우리 집안에서 니가 제일 잘났다’고 늘 칭찬하셨지.”
가문이 주는 자부심과 동네가 주는 인정이 한사코 등을 떠밀었다. ‘여기서 버티면 된다’는 믿음이 쌓이던 때였다.


2월의 바람은 차고, 동사무소 앞 은행나무는 앙상했다. 점심시간, 사무실 뒤편에서 대충 라면을 끓여 먹고 나면 아버지는 창문을 열어 연기를 빼내곤 했다. 동네 어르신들이 들어와 “인감증명서 두 장만” 하고 말하면, 그는 늘 의자를 내주고 먼저 앉히는 쪽을 택했다. 누군가에게는 일상이고, 누군가에게는 어색한 관공서 방문에서 아버지는 경상도 특유의 딱딱한 친절을 베풀었다. "여 앉으시소"


월급날은 조용했다. 봉투에 들어온 돈을 꺼내 반은 생활비, 반은 저축. 주말이면 할머니를 모시고 시장에 들러 고기나 생선을 사고, 집에 돌아와 식탁보를 펴며 말했다. “엄마, 오늘은 내가 설거지하께.” 그러한 삶이 젊은 가장을 더 단단하고 더 건실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복현동은 직업만이 아니라 인연도 데려왔다.
“그때는 복현동 하나였지. 동이 아직 안 나뉠 때. …거기서 네 엄마를 처음 만났다.”

아버지는 거기까지 말하고 미소를 지었다. 날짜도, 시각도 흐릿하게 세월에 깎여나갔는데 아버지의 얼굴에 번지는 미소만큼은 오히려 더 또혓해졌다. 새로 발령받아 들어온 스무 살의 여직원.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소녀티를 막 벗은 초임공무원. 그가 연필을 깎고 서류를 반듯이 정리하고 민원창구에 앉으면 살짝 굳어지는 어깨에 자꾸 눈이 갔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그 감정을 한켠에 숨겨두고 “찬바람이 솔솔 난다”는 이미지만 어머니에게 주고 말았다.


사랑에 사실은 서툴렀고, 그래서 더 성실했다. 아버지는 묵묵히 서류 양식을 알려주고, 인감증명서 발급 순서를 한 번 더 설명했다. 그렇게 ‘일’이란 가정은 어느덧 ‘마음’으로 건너갔다. 첫 발령지가 첫사랑의 좌표가 될 줄, 라디오 공고를 적어 내던 그 시절 누군들 알았을까.


그해 여름, 장마가 길었다. 빗물이 골목을 가득 채우던 날, 민원실 바닥에 신문지를 깔아 미끄럼을 막고, 젖은 신발들을 가지런히 세워두었다. 퇴근 시간이 지난 뒤에도 아버지는 서류철을 정리하며 업무를 마무리했을 것이다. ‘크지 않지만 끊기지 않는’ 하루들이 한 줄, 한 줄 쌓여 가는 그 시절이 우리를 여기 있게 하였다.


아버지는 자주 덧붙였다.
“운명이란 게 큰일 같아도, 사실은 작은 일의 연속이더라.”
두 달도 채 준비하지 못한 시험, 합격통지서 한장, 할머니와 함께 한 저녁, 2월 4일의 출근 도장, 점심시간에 불어오는 바람, 동사무소 에서 만난 운명적인 사람과의 어색한 첫 인사. 작은 일들이 모여 큰 줄기를 이루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방향 끝에서, 우리 가족의 서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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