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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낙방, 한 길의 시작

공직자로서 새길을 준비하다

by 토모

중학교를 어렵사리 마쳤지만, 아버지에겐 꿈이 분명했다. 누나, 형들처럼 “제대로 된” 고등학생이 되는 것. 다만 아무 학교나 아니었다. 자존심이 있었다. “차라리 안 가면 안 갔지, 좋은 학교를 가고 싶다.” 그래서 첫 원서는 경북고였다. 결과는 낙방.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대구 여름 저녁의 축축한 바람이 유난히 무거웠다고 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담담했다. “공부도 열심히 한 거 아니지. 죽기 살기로 한 건 아니지 않냐.” 스스로에게 깔끔히 판정을 내린 뒤, 다음 선택을 준비했다.


재수를 한 번 더 했다. 낮엔 집, 저녁엔 독서실. “경북 독서실 카는데가 있었지. 돈을 못 내니까 청소해 주고 자고, 그런 식으로 살았어.” 그 독서실은 공부방이자 숙소이자, 가난한 청년들의 작은 사회였다. 자리에 앉으면 책상 칠판 아래로 매트와 담요가 보였고, 밤이 되면 모두가 꾸벅꾸벅 고개를 떨구다 책상 밑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잠을 청했다. 그곳에서 친구 노영대를 만났다. 둘은 책상 사이로 밥을 먹고, 난방 끊긴 겨울밤을 같이 버텼다. “우리 시대엔 밤에 만나 놀고 이런 게 잘 없었어. 당구? 돈 든다 아이가.” 연애 이야기를 꺼내자 아버지는 웃었다. “그런 생각 자체를 안 했어. 여건이 안 되지.”


아버지에겐 사춘기의 모든 소소한 행위가 사치였다.

“사춘기? 난 그런 거 몰랐지. 사춘기도 없었다.” 그 말엔 과장이 없다. 생존과 공부가 마음을 죄던 시절이었다. 마음이 들끓을 때면 그는 소리치는 대신 손톱을 짧게 깎고, 노트를 새로 폈다. 사춘기는 지나간 계절이 아니라, 애초에 오지 않은 계절로 남았다.


두 번째 낙방 후, 길을 바꿨다. “세 번째는 검정고시로 그냥 끝내버렸지.” 이때의 결정은 패배의 인정이 아니라, 우회로의 선택이었다. 고졸 자격을 얻자 곧장 대학 시험을 보고, 서울로 향했다. 신촌 이화여대 입구 근처, 친척 형이 하던 지하 식당이 숙소였다. 낮엔 접시 닦고 설거지통 물을 갈아주며 손끝이 불어터졌고, 밤엔 식당 구석 스테인리스 테이블에 교재를 펼쳤다. 밑에서 웅웅대는 냉장고 모터 소리가 새벽까지 동맥처럼 뛰었다. “서울 하늘은 낮아 보이더라.” 그렇게 버틴 시간이 1년 남짓. 학비가 막혔다. 더는 버텨낼 수 없었다. “포기하고 대구로 내려왔지.” 말끝은 담담했지만, 그 사이에 많고 많은 자책의 밤들이 있었을 것이다.


“포기하고 대구로 내려왔지.” 대구에선 향촌동 음악다방 ‘부르시엘’에서 보조 DJ를 하며 돈을 벌었다. 낮엔 과외를 했다. 아버지 스스로는 "내가 뭐 좀 괜찮은 입장 같으면은 여자가 많았지"라고 자부할 만큼 아버지가 DJ 하는 시간대에는 젊은 여성손님들이 다방을 많이 찾았다. 편지도 많이 받아봤지만 아버지의 발목을 꽉 움켜쥔 가난이라는 고삐가 자신감을 꺾었다.


그래도 일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마땅한 직업 없는 사람한테는 괜찮은 수입이었지.” 그 사이사이엔 고속도로 공사판도 다녔다. “열흘에 한 번 돈 주거든.” 불로동에서 동대구로 넘어가는 다리 교각에 콘크리트를 붓던 날, 바람결에 날리던 먼지가 콧속에 박혀 이틀을 재채기했다. 스무 살에서 스물둘 사이, 허비하지 않으려 촘촘히 애쓰던 시간들. 낮엔 몸을 쓰고, 밤엔 음악을 틀고, 새벽엔 다음날 과외 교재를 체크했다. 청춘의 빛깔이 화려하진 않았지만 단단했다.


스물셋, 징집 영장이 나왔다. 자대는 경기도 연천 6군단 공병여단. 휴전선 바람은 대구의 겨울과 달랐다. 살을 에는 추위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한탄강 유격장 조교 파견도 몇 번 갔다. “처음엔 조교 아녔지. 군기가 하도 더러워서 공수 가려고 했는데 안 받아주더라고. ‘조교 할래?’ 해서 간 기라.” 유격장엔 규율 말고도 오래된 관성이 있었다. 선임들의 가혹행위는 지독했다. “술만 먹으면 두드려 패. 이유도 없어. ‘느그 아비 잘 만나 대학 갔나’ 이런 소리 하고.” 그때 배운 건 한 가지였다.


“사람이 술 먹고는 이래서는 안 된다.”


말년, 부대로 복귀했을 때 그는 한 번 단호해졌다. “집합해.” 후임들 앞에 서서 그는 선을 그었다. “술 먹고는 잔소리하지 마라. 술은 기분 좋자고 마시는 거다. 그걸로 남 괴롭히면 안 된다.” 집합과 기합이 끝난 뒤, 부대에선 눈에 띄는 폭력이 주춤해졌다. “남들은 군대에서 한 번도 안 때렸다 카는데, 난 거짓말이라 본다. 난 안 때려봤거든.” 폭력 대신 단호함을 택하는 법—아버지가 군에서 얻은 유일하고도 큰 기술이었다.


시간이 흘러 제대한 1976년 6월 25일. 갈 곳이 마땅치 않아 공군 근무 중이던 큰아버지 관사가 있던 팔공산 근처로 올라갔다. 라디오 트랜지스터를 베개 삼아 누운 어느 저녁, 안내 방송이 흘렀다.
“대구시 공무원 시험 공고.”
“두 달도 안 남았더라고. 그런데도 해보자, 싶었지.” 말년 휴가 무렵부터 이제는 ‘안정된 일’에 대한 생각이 자랐고, 그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공고가 아버지의 항해에 닻을 내리게 하였다.


공부는 빠르게 궤도에 올랐다. 기출문제집 한 권을 사서 처음부터 훑었다. “시벌, 이런 걸로 시험 치나 싶더라.” 국어·영어·수학·국사·일반사회, 5과목 100문항. “모르겠다 싶은 게 두 문제였어.” 군 가산점 5점을 보태 성적은 우수했고, 같은 해 늦여름(8월 중순) 시험을 치른 뒤 곧 합격 통지가 왔다. 편지 봉투를 열던 그의 손이 얼마나 떨렸을까. 그는 그 순간을 담백하게 정리했다. “내가 공부를 못한 사람은 아닌 건, 확실한 기라.”


낙방과 검정고시, 서울의 지하 식당과 향촌동 다방, 연천의 눈밭과 한탄강 유격장, 그리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공고. 실패라는 거대한 장벽과 우회로가 켜켜이 쌓여 결국 한 문으로 이어졌다. 그 문 앞에서 그는 한 번도 소리를 지르지 않았고, 누구를 탓하지도 않았다. 대신 방향을 바꾸고, 속도를 조절하고, 다시 걷는 법을 택했다. 결심은 한순간이었지만, 그 한순간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오래전부터 곁에서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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