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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살, 셋방에서 배운 할머니의 가르침

동인동에서의 기억

by 토모

“학교 갈 나이쯤, 동인동으로 갔다.”
할아버지가 일곱 살 무렵 세상을 떠난 뒤였다. 외가의 품을 잠시 접고, 할머니와 형제자매가 함께 동인동 셋방으로 들었다. “방 하나 세 얻어가 살았지.” 방 하나에 식구 몇이 구겨져 들어가면 숨소리도 나눠 써야 할 것 같던 날들. 살림은 빠듯했고, 할머니는 동부시장 노점에서 건어물, 그중에서도 ‘메르치(멸치)’를 팔았다. 집에 들어서면 늘 코끝을 찌르던 비릿한 냄새가, 아버지에겐 어느새 할머니의 손 냄새처럼 기억되었을 터이다.


그 즈음 아버지는 동인국민학교에 입학했다. “동인초등학교, 내가 20회다.”

교실은 늘 붐볐다. “반에 60명 넘었지. 오전·오후반도 했고.” 지금 시대에서 상상하기 힘든 복작복작한 그곳에서 아버지는 삶의 일부로, 또 삶의 용기와 기회를 꿈꿔왔을 것이다.


교실 한쪽에는 화목난로나 번개탄 난로가 놓였고, 겨울이면 난로 주변부터 자리가 금세 찼다. 물을 끓이던 주전자는 시간이 지나면 깡깡 울어댔을 것이고 그것이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였을 것이다.

점심시간의 풍경은 형편을 닮았다. “좀 잘 사는 집은 도시락 싸오고, 우리는 주로 강냉이죽, 고체 우유 같은 구호 물자 먹었다.” 커다란 통에 퍼주는 강냉이죽을 빈 도시락에 받아 먹거나, 때로는 도시락을 가져온 아이와 ‘바꿔 먹는’ 일도 있었다. “반수는 넘었지, 강냉이죽 먹는 게.” 철제 통에서 ‘벽돌처럼 굳어 나온’ 고체 우유는 삶을 지탱하는 벽돌이자 연료였다. 그건 선택의 여지가 존재할 수 없는 생존이었을것이리라. “그것도 전부 다 미국서 온 거야.” 시대의 배경을 짐작케하는 첨언이 따라붙었다.


그럼에도 옷차림은 늘 정갈했다. 할머니의 영향이었다. 할머니는 언제나 품위와 예의를 강조했다. 공군 부사관이던 큰아버지의 곤색 군복을 얻어 까맣게 물들여 교복처럼 입고 다녔다. “천이 좋아 입고 다니면 품위 있어보였지. 공부도 잘하고, 말도 잘 듣고.” 단정한 옷차림, 성실한 태도, 나쁜 짓과는 거리가 먼 성품이 겹치자 선생님들의 신임이 따랐다. “공부도 잘하지, 옷도 깔끔하지, 말도 잘 듣지.” 그래서 아버지는 늘 반장이었다. 가난은 주머니를 비웠지만, 단정함은 체면을 지켜주었다.


“우리 어머니, 훌륭하신 분이야. 내가 엄마한테 한 대 맞아보지도 않았고, 늘 바르게 키우려고 하셨지.”

손찌검 대신 태도로 훈육을 하던 할머니였다. 아버지께서 그러한 그 시절 할머니를 설명하는 문장은 하나였다.

“엄마는 나한테 한 번도 소리치지 않았다. 믿고 기다리는 법을 가르쳤다.”


“국민학교 다닐 적에 동네에서 말타기 하고 놀잖아. 저녁이 되면 엄마는 부르지도 않고 멀리서 가만히 보고만 있어. 내가 눈이 딱 마주치면 ‘간다’ 하고 집에 갔지.”

호통도, 호명도 없었다. 단정함과 예의는 그렇게 침묵의 신호로 배웠다. 아버지는 “맞을 짓은 안 했지. 한 번도 안 해봤으니까”아버지는 쑥스레 웃었다.


작은 마음의 그림자도 있었다. 부모 면담이나 학부모 참관 같은 날, 할머니는 나이가 많은 편이라 “내가 못 가겠다” 하며 주저하셨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말했다. “엄마, 괜찮다. 내가 공부도 잘하고 하니께 아무 걱정하지 마라.” 성적과 태도가 스스로의 방패가 되어 주던 시절이었다.


출신 이야기를 할 때면 아버지는 할머니를 더 공손히 불렀다. “우리 엄마가 광주이씬데, 경기도 광주 이씨야. 양반가문이지.” 할머니는 칠곡군 신동인근의 마을에서 나고 자라 우리 할아버지와 혼인을 하셨다고 한다. 학력은 “무학”이었지만 배우는 데 뜻이 깊었다고도 한다. “엄마가 절에 다니면서 불경을 읽고 싶다 하셔서, 군대 가기 전에 내가 한글을 가르쳐 드렸지. 한 일주일 하니까 깨우치더라.” 환갑 무렵의 배움이었다. 그렇게 할머니는 배움에 대한 의지가 깊으신 분이었다.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 대신 검정고시를 준비하던 아버지는 경부고속도로 공사판에 나가 열흘에 한 번 품삯을 받았다. “봉투 들고 ‘이만큼 벌었습니다’ 하면, 엄마가 안 받아. ‘니가 알아서 써라’ 하고 돌려주면서

“돈은 버는 자랑이 아니고, 쓰는 자랑을 할 줄 알아야 된다.”며 아비의 기를 살려주셨다. 벌이는 들쭉날쭉했지만, 쓰는 법만큼은 언제나 점잖았다. 살림이 궁하면 먼저 자신부터 줄이고, 남에게 꿀 때에도 갚는 날짜를 먼저 말하는 식의 품위. 그것이 ‘양반’의 기품이자 품위였다.

아버지는 덧붙였다. “나는 지금도 그걸 명심하고 살아.” 긴 세월 아버지의 기준으로 품어온 말이다.


그날 밤 인터뷰는 아이가 물을 찾고, 끈끈이가 손에 묻어 모두가 우왕좌왕하는 틈에도 이어졌다. 수성동의 초가와 동인동의 셋방, 동부시장의 멸치 비린내와 저녁의 밥 냄새. 그 모든 좌표가 모여 유년의 지도가 되었다. 그렇게 배운 태도가, 훗날의 청년과 공무원, 남편과 아버지를 만든 씨앗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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