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성구 외가집
아내의 졸업식을 마치고 돌아온 밤 8시. 서울 작은 아파트의 더 작은 식탁에 나와 아버지가 멋쩍게 마주 앉았다. 술잔을 기울인 적은 많았지만, 이렇게 아버지를 인터뷰하는 밤은 처음이었다. 녹음 버튼을 누르며 내가 말했다.
“자연스럽게 대화하면서 하면 돼요. 오늘은 아버지 유년을 듣고 싶어요.”
아버지는 어깨를 한 번 굴리고, 의외로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대구 수성동 외가에서 유년을 보냈다. “수성동. 수성교 지나고, 파출소 있던 데 근처.” 아버지가 손가락으로 허공의 지도를 그릴 때, 나는 낡은 골목과 낮은 둑, 비 온 뒤 흙냄새 같은 것을 같이 보았다. 아버지가 기억하는 동네는 “들판이었고, 천변이 하나 있었어. 완전히 초갓집 같은 데서 살았제.” 사는 것과 버티는 것 사이 어딘가, 겨우 매달려 있던 풍경. 그 속에서 아이였던 아버지는 계절을 어깨에 이고 컸다.
집안 형편은 빠듯했다. 친가의 형제들은 각자 흩어져 살았고, 아버지는 외삼촌 댁에 얹혀 지냈다. 외삼촌은 “도청 공무원이었고, 대구농고 5년제”를 나온 집안의 수재였다. 든든한 외가의 살림기둥이 있었기에, 3남 2녀의 막내였던 아버지는 물목이 거친 시절을 건너올 수 있었다. 큰누님과 스무 살 가까이 차이 나는 늦둥이였다는 말에, 아버지는 쑥스러운 듯 웃었다. “막내면, 다 예뻐해주잖아.”
외가는 맞이였던 할머니, 공무원이던 남동생(외삼촌), 여동생 둘이 함께 살았고, 친가 쪽 형제들은 각자 살림을 꾸리며 흩어져 있었다. 그래도 집안 어른 대부분이 공부를 놓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말했다.
“우리 집은 기본이 다 돼 있는 사람들이야. 큰아버지도 고등학교 나오고… 공부 다 잘했지.” 어른들 대부분이 공부를 놓지 않았다는 그 말은, 궁핍을 비켜나가진 못했어도 궁핍에 지지는 않으려 했던 한 집안의 기세를 보여준다.
특히 부산 고모의 이야기를 할 때는 자뭇 대견함이 스쳤다. “우리가 어렵게 살아서 중학교 보낼 형편이 안 되니까, 오성학교 재단 이사장 집에 일을 해주면서 학교를 다녔지.” 고모는 엄청 공부를 잘해 훗날 경북여고에 처음 들어간 학생 중 한 명이 되었고, 대학도 장학금으로 다녔다고 했다. 가난은 그에게 문을 닫았지만, 공부는 스스로 사람을 문으로 만들었다. 그 문 하나가 집안 전체의 바람길이 된 셈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온전히 받을 시간은 나처럼 충분하지 않았다. 일곱 살 무렵,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그땐 결핵이 많았어.” 아버지는 담담했지만, 담담함의 끝에서 아주 작은 서운함이 하마터면 흘러나올 듯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 얼굴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사진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할머니 지갑에 있었던 걸 내가 봤어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몰라,” 하고 고개를 저었다. 기억나지 않는 얼굴과 흐릿한 사진, 그 사이를 더듬는 표정이었다.
대신 장작 더미, 흙마당, 초가 처마 같은 기억의 파편들이 남았다. “어릴 적에 쌀튀밥 봉지를 들고 다니다 바람 불면 하늘 보고, 나무 보고 좋아했던 아주 작은 자신의 장면이 떠오른다고 했다. 이 모든 기억이 사실일지 어른들의 전언을 따라 길어 올린 기억일지 확인할 방법은 없었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기억의 증언이 하나하나 소중했다. 할아버지를 둘러싼 기억 또한 군데군데 이어 붙여진다. “화목… 장작을 집집마다 가져다주고 도끼로 패서 팔았던 것 같아.” 그것이 생업이었는지, 집의 난방을 위한 품앗이였는지 “확실하진 않다”지만, 아버지의 감각 속에 남아 있는 할아버지는 장작과 겨울, 그리고 부지런함의 이미지로 선다.
무엇보다, 막내였던 아버지를 예뻐했다는 이야기도 듣게 된다. “엄마 말로는, 아버지가 날 그렇게 막내라고 좋아하고 이뻐했더라 카더라.” 부부 사이도 고왔단다. “한 번도 서로 언성 높인 적이 없다 카더라.” 할아버지는 “인물이 굉장히 좋았대요. 머리도 좋았고.” 고모들은 종종 “너도 네 아버지 닮아 잘생겼다”고 놀리듯 칭찬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단정하고 준수했다는 얼굴은, 기록 속의 몇 장 사진으로만 희미하다.
그런 훌륭한 인품도 외모도 떠나는 길에서는 부질없는 일이었다. 결핵이었다.
“예순도 안 됐지. 엄마가 마흔일곱이었다.” 그 시대의 수많은 가장들이 그러했듯, 할아버지는 오십 언저리의나이로 일찍 생을 접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시절 우리 아버지와 가족은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다. 희망은 늘 가장 궁핍한 자리에서 느닷없이 고개를 들곤 한다. 어떠한 희망이 그곳에 존재함을, 파랑새는 그곳에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