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함께 할 짝을 만나다.
라디오 공고 한 줄이 직업을 데려왔다면, 복현동은 사랑을 데려왔다. 1977년 2월 10일, 아버지가 첫 출근 도장을 찍은 그 작은 동사무소에 이듬해 7월, 어머니가 들어왔다. 직원이 열 명도 안 되던 시절, 복현동 첫 여성 공무원. 총각 둘 중 한 사람이었던 아버지는 과묵했고, 막내였던 어머니는 앳됐다.
“처음 날 보니 잘생겼더래. 근데 사람이 딱딱해서 찬바람이 솔솔 난다 카더라.”
아버지는 그렇게 웃었지만, 어머니의 기억 속 아버지는 ‘말수 적은데 믿음 가는 사람’이었다.
처음 가까워진 건 일 때문이었다. 서류철을 정리하는 법, 민원 응대의 첫 문장, 결재선 돌리는 순서까지 아버지는 무뚝뚝했지만 차근차근 알려주고, 어머니는 메모를 빽빽이 채워 넣었을 것이다. 점심 무렵이면 소소한 점심식사를 함께 나누고 오후엔 동사무소를 찾은 민원인들의 응대를 함께 받아냈을 것이다. 말은 많지 않았지만, 함께 하는 그 시간들이 서로에게 의지가 되고 믿음이 되는 시간들이었다.
둘 사이를 확 좁힌 건 한겨울의 작은 사건이었다. 신축 공사를 앞두고 임시 사무실을 쓰던 때, 야근하던 어머니 곁에서 석유난로가 꺼졌다. “추울까 봐” 아버지가 기름을 보태다 유증기에 불꽃이 닿는 순간 "퍽!" 불길이 스치듯 얼굴을 덮쳤다. 껍질이 일어나던 며칠 동안 어머니는 연고를 바르고 거즈를 갈아주며 툭 내뱉었다. “잘생긴 사람 얼굴이 왜 이래됐노.” 그 말에 담긴 걱정과 애정이, 난로의 불보다 뜨겁게 타올랐다. 불은 도화선이 되어 인연을 붙들어잡고 말았다.
첫 데이트는 대구역 앞 대호빌딩 맞은편의 ‘길조’라는 횟집이었다. 어머니는 삶은 오징어만 먹다가 처음으로 ‘날 것’을 접했다. 놀라 반짝이던 눈동자를 아버지는 오래 기억했다. 접시는 천천히 빈 접시가 되었고, 소주잔은 조용히 줄었다. 수성유원지의 레스토랑도 두 청년커플의 단골 데이트장소였다. 폼나게 돈가스를 썰어먹고, 수성못 둘레길을 걸었다. 둘은 수다스러운 연인은 아니었지만 서로의 걸음을 맞추면서 서로를 알아갔다. 한쪽이 빨라지면 다른 쪽이 속도를 낮췄고, 멈추면 같이 멈췄다. 김포에 살던 고모가 대구에 내려오는 날이면 고모까지 모시고 ‘길조’에 들렀다. 고모는 어머니의 말씨와 눈빛을 보고 돌아가는 차에서 말했다. “좋다, 저 아가씨.”
두사람이 서로를 알게 된지 3년, 연애는 1년반 남짓 이어졌다. 수성못에 계절을 10번도 더 갈아입은 꽤 긴 시간이었다. 영화도 보고, 레스토랑의 희미한 조명 아래 서로의 눈을 마주보며 앉아 있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저녁, 특별한 이벤트 없이 아버지가 말했다. “그만 우리 같이 살자.” 프러포즈는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반지는 그다음 대구 시내로 나가 저렴한 것으로 맞췄다. 그래도 엄마에게는 좋은 걸 하고 싶어 아버지의 반지알은 좁쌀보다 작았다.
아버지가 결혼을 결심한 이유는 명료했다. “우리 아이들.” 좋은 어른이 좋은 아이를 만든다는 믿음. 아버지는 할머니에게서 받은 ‘품위와 단정’의 유산이 어머니에게서 ‘순하고도 단단한 기개’로 이어지는 걸 보았다. 시골 중학교에서 대구로 유학와서 어려운 살림형편에 교사라는 꿈은 접었지만 공무원이라는 스스로 길을 연 어머니의 궤적은 이미 충분한 ‘검증’이었다. 어머니 장례식 때 뵈었던 동네 친구들이 기억하는 어머니는 ‘골목대장’이기도 했다. 아이들을 모아 선생님 놀이를 하고, 누구보다 먼저 서는 사람. 뜻을 펼쳤다면 직장에서도 누구보다 잘했을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나와 동생을 한번에 가지고 기꺼이 사표를 냈다. 아버지에게는 “현모양처가 내 꿈이었다.”며 오히려 위로했다. 외할머니 형편상 육아를 도와줄 손이 여의치 않았던 것도 컸다. 어머니는 그렇게 가능성의 방향을 가족 쪽으로 돌렸다. 선택의 이유가 분명했기에, 미련도 후회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
집을 꾸리는 일은 빠듯했지만 즐거웠다. 전세는 개모임과 적금 해약으로 마련했다. 복현중학교 앞 전셋방, 냉장고와 세탁기, 그리고 압력밥솥 하나로 신혼부부의 단란한 삶이 시작되었다. 첫날밤 어머니는 그 압력밥솥으로 밥을 지었다. 치이익 김이 오르는 소리, 반짝거리는 스테인리스 뚜껑, 흰 쌀의 윤기. 그 소박한 풍경이 새로 시작된 ‘우리’라는 가족의 문패가 되었다.
신혼여행은 대한항공에 다니던 지인의 도움을 받아 비행기를 저렴하게 끊었다. 두 사람 모두 그때가 생애 첫 비행기였다. 활주로에서 엔진이 울릴 때, 어머니는 “귀 먹먹하다” 하고 웃었고, 아버지는 창가에 붙어 파도 같은 구름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 시절 제주도는 말 그대로 ‘하와이’였다. 많은 신혼부부가 경주를 택하던 때, 두 사람은 과감히 바다를 건너 섬으로 갔다.
여행은 2박 3일 일정이었다. 공항에 내려 택시를 대절해 섬을 한 바퀴 도는 방식으로 움직였다. 기사님이 아침에 데려와 하루 종일 주요 지점을 안내하고, 저녁이면 숙소 앞에 내려주는 식. 숙소는 호텔이 아닌 여관(요즘으로 치면 모텔)에 잡았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신혼여행에 꼭 필요한 것들은 모두 갖춰진 방이었다.
세부 코스는 ‘어디를 가자’ 하고 따로 정하지 않았다. “아버지의견에 99% 따르는" 어머니의 스타일에 맞춰, 전반적인 결정은 아버지가 맡아 여행을 이끌었다. 용두암에 서서 바닷바람에 세차게 볼을 맞았을 것이고 동문시장에서 상인이 건내는 귤을 서너개 집어 먹었을 것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어머니의 머릿칼과 아버지의 선글라스도 셔터소리에 함께 저장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섬의 바람을 맞으며 사진을 몇 장 남겼고 셋째 날 비행기에 올랐다.
아버지는 뒤에 종종 말했다. “그때 제주도는 우리에겐 하와이 같은 곳이었다.” 꿈만 같았던 첫 비행, 2박 3일의 섬바람의 추억, 그 설레고 행복했던 여행의 기억이, 두 사람의 결혼 초기를 오래 지탱했다.
결혼 뒤에도 사랑은 생활의 속도대로 잔잔히 흘러갔다. 낮에는 민원실, 밤에는 작은 식탁. 아버지는 와이셔츠를 다리며 한 주를 마무리했고, 어머니는 다음 날 도시락 반찬을 챙겼다. 주말이면 친척이 보내준 고추를 다듬고, 한참을 말렸다. 고추의 매캐한 냄새가 올라와도 그 냄새가 이상하게 집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아이들이 태어난 뒤 어머니는 육아에 집중했고, 아버지는 더 늦게까지 일했다. 운동회와 재롱잔치에 자주 가지 못한 미안함은 방학에 텐트를 싣고 계곡으로 가는 방식으로 갚았다. ‘시간’으로 못 준 것을 ‘추억’으로 돌려주는, 그들다운 해법이었다.
돌이켜보면 복현동은 인생의 대서사시가 펼쳐진 무대가 아니었다. 다섯 평 남짓한 민원실, 바람 새던 창틀, 석유난로, 고무줄로 묶인 서류철, 그리고 저녁마다 같은 방향으로 걷던 둘의 발걸음. 그 소소한 프레임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보고, 사랑에 들고, 한 가정을 세웠다. 어머니가 바로 그 파랑새였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파랑새가 날아든 뒤, 단단한 가족, 아이들이 삶의 중심으로 찾아올 수 있었다.
많은 사랑이 그렇듯, 시작은 우연 같고 결과는 필연 같다. 성적순 발령표에 써진 ‘복현동’ 네 글자에서, 우리가족의 톱니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큰일” 대신 “매일”을 택했고, 어머니는 자신의 가능성을 가족의 일상으로 바꿨다. 그 둘의 만남은 화려하거나 특별한건 아닐지 몰랐으나 그래서 더 경이롭고 기적같으 일이었다. 아이들은 자랐고 우리는 안다. 우리 집을 세운 건 기적 같은 사건이 아니라, 아버지가 복현동에서 찾은 파랑새, 어머니와의 연애, 사랑, 결혼, 그리고 그 뒤의 매일이 함께 했디 때문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