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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 키운 아이들

믿음으로 커져가는 가족의 사랑

by 토모

아버지는 자주 말했다. “너거 엄마가 참말로 현명한 사람이었다.”


그 말에 아버지의 어머니에 대한 찐한 애정과 존경이 묻어나왔다. 우리 역시 그랬다. 두 사람은 한 번도(사실 기억에 2번정도 있긴 하지만 체감상으로 정리하자) 큰소리로 싸우지 않았고, 화목한 가정의 질서를 위해 소리보다는 균형과 조화를 중요시했다. 두분의 믿음으로 만든 집의 균형이었다.


신혼 초, 첫째딸을 낳을 때까지 공직생활을 계속 했던 어머니였지만 쌍둥이의 탄생에 더이상 슈퍼맘의 유지는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외할머니의 육아지원은 감감무소식이었다.


"내 원래 꿈이 현모양처 아이가. 나는 우리 아들 잘 키울테니 여보가 잘 벌어오소"

어머니는 살아 생전에 나에게 그당시 공직을 포기한 게 아깝지 않냐는 질문에 아버지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어머니의 동기들이 서기관을 달고 시청, 구청에서 날아다니는 소식을 들을 때 내심 씁쓸해하며 "내가 계속 했어도 서기관은 달았을낀데"하면서도 "그래도 우리 아들 잘키웠으니 됐지"하며 이내 마음을 다스리던 당신이었다.


아버지도 에피소드 하나를 보탠다.

3남매를 키우던 신혼시절, 공무원사회에서도 월급봉투에서 통장으로 바뀌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통장을 어머니에게 전하며 "생활비할 때 꺼내쓰라"며 어머니에게 집안의 돈줄을 맡기셨다. 하지만 어머니가 그 통장을 아버지에게 다시 건넸다.
“당신 체면을 세워야 우리 아이들이 말을 곧게 듣지. 매달 내가 필요하다고 하면 뽑아서 전해주소”
그래서 집에서는 돈을 건넬 일이 생기면 일부러 아버지 손을 거쳐 갔다. 아이들에게 너거 아버지가 얼마나 고생해서 돈을 벌고 이 집의 기둥이 누군지를 보여주고 싶어했던 것이다. 부부의 동맹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단단해졌다.


우리가 초등학생이던 시절에는 할머니도 함께였다. 늦둥이 막내집에서 홀어머니를 모시는 상황이 찾아온 것이다.

“당신이 시어머니 모실 기회가 이제 없을 테니 1~2년만 같이 살자.”

어머니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배도 안 된 방에서 처음 아버지와 인사를 했던 작지만 단단했던 그 시어머니를 모시며 아버지의 두 사람이 한자리에 모였다. 아마 아버지는 그 시기 가장 안정적이며 가장 평온한 시기를 보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1982년 첫 아이가 태어나고, 1985년, 곧 쌍둥이가 뒤따랐다. 작은 전셋방에 아이 셋이 우르르 모여 살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꼭 강조하는 이야기가 있다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일들 빼고, 나머지는 마음대로 하고 살아라"
아버지는 “이 안에서만 살아라” 하고 경계선을 좁히고 좨는 것보다, “저기까지 가도 된다” 하고 폭을 넓혀 주었다. 해수욕장 경계선 끝까지 마음닿는곳 까지 달려보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눈은 늘 아이들을 바라봤다. 멀리서 지켜보되, 아이들이 허우적대는 순간에는 기꺼이 달려와 두툼한 팔뚝으로 우리를 끌어안아 안전한 곳으로 옮겨낼 그런 채비가 되어 있었던 세아이의 아버지였다.


참 대단했던 것은 아버지는 단 한번도 우리에게 성적표를 보여달라 한 적이 없다.
“잘했으면 니들이 먼저 갖고 오겠지. 굳이 못한 성적표 마주보고 서로 속상할 필요 뭐있겠노. 껄껄”
아버지의 기가 막힌 우문현답에 박장대소를 하다가도 참 우리 아버지가 우리를 자유롭게 했구나, 다만 우리가 그 자유를 너무 험하게 썼다는 부끄러움이 어울렁거렸다.


통제 대신 신뢰를 무한하게 보내던 우리 아버지, 틀을 좁히면 아이들의 세상도 함께 줄어든다는 걸 아버지는 본능처럼 알았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들과 골목어귀에서 해가 지고도 한참을 더 천방지축으로 놀 수 있었고, 첫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아버지가 챙겨준 시바스리갈을 가방에 몰래 넣어갈 수 있었다.


무한한 자유와 신뢰를 얻고 우리는 좌충우돌하며 커갔다. 누나는 외국 한번 안가고도 영어를 똑부러지게 잘하더니 미국으로 훌쩍 넘어갔다. 쌍둥이 동생은 오랜 기간 꿈꿔왔던 변호사의 길을 걷고 있다. 나 역시 어쩌다 공무원이 되었지만 부모님이 바라마지 않았던 공직자의 길을 걷고 있다. 수많은 실패와 시련을 겪어왔지만 돌고 돌아 제 궤도를 모두 찾아갔던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부모로 섰다.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가는 방식대로 아이들에게도 그들의 삶을 존중했다. 아이를 키우는 방법은 아이가 스스로 커지게 놓아두는 것이었다. 믿음의 부피만큼 가족의 공간이 넓어졌다. 그리고 그 넓어진 공간 안에서 우리는 각자의 속도로 어른이 되었다.


나도 이제는 두 아이를 키우며 종종 그 문장을 떠올린다.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몇 가지만 빼고는, 다 해봐도 된다.”
그 말은 허용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신뢰의 다른 표현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러했듯, 우리도 아이들에게 그 믿음을 건네본다. 그리고 천천히 이해한다. 자유로 키운다는 건 결국, 부모 스스로가 먼저 자유로워지는 일이라는 것을. 나 역시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배운 그대로 내 아이들에게 무한한 자유를 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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