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트 속 렌턴 같았던 아버지
아버지에게 휴가는 곧 가족이었다.
“의도라 카기보다, 아버지니까 당연히 하는 거지. 내가 휴가고, 니들은 방학이니까.”
우리의 여름은 청량했다. 트렁크를 열어 장비를 실었다. 내 기억 첫 텐트는 자칼이라는 브랜드의 4-5인용 텐트였다. 해마다 짐이 한 조각씩 늘었다. 테이블, 접이의자, 파라솔, 랜턴까지. 엑셀 자동차에 5명의 가족과 그 많은 짐이 어떻게 다 들어갔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그리고 우리 여행에서 결코 빠지지 않았던 늘 압력밥솥.
어머니는 “코펠밥은 맛이 없다”는 신념이 산보다 단단해서, 언제나 압력밥솥을 실고 다녔다. 쌀을 씻고 압력이 오르길 기다리는 동안 계곡물에 수박을 재워 두는 과정은 우리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렇게 다섯 식구가 엑셀 트렁크와 뒷좌석을 꽉 채워 앉으면, 차는 그 자체로 작은 집이 됐다.
가장 자주 간 곳은 금원산이었다. 조용한 산이었고 공기가 시원하다 못해 청량했다. 입구를 지나 숲 그늘만 들어오면 뜨거웠던 열기가 훅 낮아지는 곳, 한낮에도 소매를 끌어올릴 이유가 별로 없었다. 아버지는 “여긴 겨울이 더 좋다”고 했지만, 여름의 금원산도 충분히 겨울 같았다. 물은 맑고 차가웠고, 나무는 푸르고 연신 서늘한 바람을 길어올렸다.
영양 계곡도 빠지지 않았다. 작은 물고기를 건지던 얕은 물길, 돌 틈에 손을 넣으면 미끌한 감촉과 함께 번쩍 튀어나오던 작은 은빛가재들. 가지산 자락에서는 바람에 힘을 빌려 먼저 텐트를 세웠고, 밤이면 별이 천장을 못질하듯 촘촘히 박혔다. 저녁이면 어른들 술잔이 돌고, 우리는 젖은 머리칼을 모닥불에 말리며 빈 그릇을 들고 왔다 갔다 했다.
바다도 우리 여름의 절반이었다. 고래불 해수욕장의 그 모래밭은 우리 집의 여름 정류장이었다. 파도가 발목을 끌어당기던 날, 아버지가 나를 번쩍 안아 깊은 물로 데려갔다가 “깊다” 싶어 황급히 되돌아 나오던 표정이 아직도 선명하다. 난생 처음 깊은 물을 접한 꼬마의 허우적이 아버지에게도 꽤나 버거웠을 것이다. 그래도 허리 아래의 파도와 모래, 조개껍질과 햇빛은 아직도 눈부신 추억처럼 남아 있다.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마른 소금이 다리에서 반짝이던 그 순간까지.
여행의 원형은 신혼에서 시작됐다. “결혼하고 그해 여름에 무주 구천동 갔지. 그때는 포장도 안 돼가 버스 덜컹덜컹 타고 올라갔다.” 어머니는 야영이 처음이었다. 그래도 좋아했다. 모래를 털고, 텐트를 치고, 불을 살리고, 물을 끓이는 사이 하루가 저물었다. 그 여름이 이후 가족과 하는 모든 여름의 설계도가 됐다. 아버지는 젊을 때 지리산 종주도 했고 산을 좋아했지만, 가족과 함께하는 캠핑은 또 달랐다. 산의 고독 대신 아이들의 재잘거림, 정상의 성취 대신 밥 짓는 연기. 아버지는 그 교환을 기꺼이 택했다.
장비는 어떻게 그 작은 트렁크에 다 들어갔을까. 압력밥솥 옆에 양은대접, 소금, 화로, 긴 젓가락, 그리고 커다란 아이스박스. 아이스박스 뚜껑을 열면 얼음과 캔음료 사이에 오이를 넣은 물병이, 그 아래로 하룻밤 물에 재워 둔 수박이 있었다. 어머니는 계곡가에서 미나리를 씻고, 아버지는 화롯불을 만지작거리다 고기를 올렸다. 백숙을 해먹던 해엔, 냄비가 보글거리며 텐트 안으로 닭향이 퍼졌다. 숲에선 늘 배가 더 고팠다.
한 번은 4박 5일 코스로 금원산과 바다를 묶어 돌았다. 텐트를 걷어 차에 싣고, 모서리를 접었다 붙이며 우리도 함께 작은 집을 접었다 폈다. 비 예보가 있던 여름엔 텐트 천에 탁탁 치는 빗소리를 세다가 아침을 맞았다. 어둠 속에서 랜턴 원이 흔들릴 때, 그 원의 중심엔 언제나 아버지가 있었다. 휴가는 그 사람의 얼굴을 닮았다.
집에서도 바다는 이어졌다. 어떤 해는 베란다에 대게 한 상이 들어왔다. 어머니가 신문지를 넓게 깔고 한 마리, 두 마리 분해해 살을 모으면, 우리는 그릇을 들고 주변을 맴돌았다. “반찬은 니들이 먹지, 내가 먹나?”라며 아버지는 껍질을 모았다. 어머니가 좋아하던 건 늘 그 ‘대게의 순간’이었다. 영덕에서 온 한 박스, 겨울이면 꼭 한 번은 집안에 바다 냄새가 났다. 그때의 어머니는 소녀 같았다. 끝까지 앉아 마지막 한 점까지 발라 먹고, 빈 껍데기들을 산처럼 쌓아 올렸다.
왜 그렇게 많이 다녔냐고 묻자, 아버지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는 의도라카기보다, 아버지니까. 내가 휴가, 니들은 방학.”
여행은 거창한 이벤트가 아니라 아이들 시간이 늙지 않게 해주는 생활의 기술이었다. 텐트 기둥을 세워 채우는 건 바람이었지만, 사실은 서로를 기대는 법을 배우던 연습이었다. 모닥불 옆에서 설거지를 함께 하고, 랜턴을 들고 화장실 가는 길을 나란히 걸으며, 우리는 가족의 보폭을 맞췄다.
누나는 고학년이 되며 점차 자유를 찾아 떠나고, 우리는 중학생이 되어 친구들과도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래도 대체로 우리는 늘 함께였다. “방학만 맞으면 갔죠.” 아버지 말대로였다. 휴가가 5일이면 5일을 온전히 묶었고, 못해도 2박 3일은 꼭 길을 나섰다. 출발 전날 밤이면 어머니가 장을 보고, 아버지는 텐트 팩을 다시 세었다.
어느 해 여름, 20대 후반의 나이에 금원산을 친구와 함께 다시 찾은 적이 있었다. 데크가 생기고, 표지판이 새로 달렸지만 공기는 그대로였다. 그늘의 온도, 바람의 냄새, 물소리의 기울기. 텐트는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었지만, 그 자리엔 여전히 우리의 시간이 있었다. 그때 알았다. 아버지가 되려 했던 건 ‘휴가를 주는 사람’이 아니라 ‘휴가 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옆에 있으면 숨이 길어지고, 같이 걸으면 시간이 천천히 가는 사람.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고, 꽤 오래 그렇게 살았다.
휴가같은 아버지
그 문장은 우리 가족의 계절을 정리하는 말이면서, 아버지 삶의 자세를 요약했다. 휴가는 5일이면 충분했고, 그 5일 동안 아버지는 우리와 같은 속도로 걸었다. 압력밥솥의 김이 솟아오르거나, 모래 속에 묻어 둔 수박이 서늘해질 때까지 기다려 주는 속도. 그 속도가 우리에게 남긴 건, 커다란 풍경이 아니라 함께 보폭을 맞추던 감각이었다.
이제 각자의 여름을 보내며 가끔 그 속도를 그리워한다. 도시의 에어컨 바람 앞에서는 잘 기억나지 않는 냄새와 소리, 물의 온도, 텐트 천을 두드리던 빗소리의 박자. 그 모든 좌표가 모여 한 사람의 윤곽을 만든다. 휴가 같은 아빠. 방학 같은 여름. 그리고 그 여름을 오래오래 지켜준 한 문장.
“아버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