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st in Translation Jan 29. 2017

싱글로서의 삶

에이미 러트킨, 2016년 12월 25일, 제제벨

원문: When Can I Say I'll Be Alone Forever?


올해 초였던가. 나는 한 저녁파티에 초대되어 친구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집주인인 친구와 파티에 초대된 사람들은 음식이 나올 때까지 부엌에 모여서 서랍장을 열고 닫으며 여러 그릇들을 식탁 위에 세팅했다. 도중에 몇몇은 근처 식료품에 가서 맥주를 구입해 가져오기도 했다. 저녁식사는 정말로 좋았다. 식사를 마친 다음 우리는 소파에 앉아 시끌벅적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음식을 같이 먹었던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연애는 잘 되고 있어요?"


이 질문은 그다지 유별나지 않아서 기억될 만한 수준이 아니었던 것 같다.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회고한다면, 나는 음식을 많이 먹은 나머지 약간은 긴장이 풀린 상태였다. 그래서 나는 정직하게 답변했다. "앞으로 또 누군가를 만날지 이제는 정말로 모르겠네요."


내가 한 줄짜리 답변을 마치기 전에 질문을 던진 그 사람은 이미 고개를 가로저으며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그 다음에 내 주변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내가 평생 홀로, 다시 말해 '싱글'로 영원히 살아갈 여지를 연신 반대하고 나섰다. 그들은 내가 온라인 데이트 어플인 '틴더(Tinder)'를 들어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잘 모른다면 '오케이큐피드(OKCupid)는요? 앞으로 누군가를 절대 만나지 않으리라, 고 생각할 때 누군가를 만날 가능성이 제일 크다고 그들은 나에게 조언을 해줬다. 우리를 봐라. 기대를 가장 하지 않을 때 갑자기 폭발음이 터지면서 사랑이 찾아온다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파티 멤버들을 둘러보았다. 식탁에 옹기종여 모여 앉아 있었던 그들은 연인처럼 아주 헌신적인 관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앞으로는 누군가와 데이트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그것이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고 답했다. 또한 그들은 내 눈을 바라보면서 과거의 자신들과 똑같히 생각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나일 뿐, 특별한 "그 순간"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곧바로 나는 "그 순간" 이후를 상상했다. 나는 기다린다. 침착하게 기다리면 된다. 내 인생의 특별한 사람은 가능한 빨리 나를 찾아 다가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 말을 듣고 나서 그런 사람은 그렇게 오지 않을 거라고 말하려 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입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의 친절한 조언을 부정하지 않는 스탠스를 취하고자 나는 침묵만을 유지했다. 굴욕을 당한 셈이다. 눈물이 눈가 주변에 맺혔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결국 "그래요, 저도 알아요."라고 답변했다. 


마지막 섹스는 3년 전에 했었고, 제대로 된 연애는 6년 전에 끝났다. 데이트를 하는 나날들은 대단히 재미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내가 왜 싱글인지를 설명하는 게 그토록 중요한지를 잘 모르겠다. 그리고 싱글일 때가, 아니면 커플일 때가, 그것도 아니면 양쪽을 줄기차게 오고가며 다양한 관계를 동시에 가질 때가 더욱 나은지에 대한 사람들의 영원한 논쟁에도 그리 관심 없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행복과 혜택을 느끼고, 또 어떤 상황에서 굴욕감과 고통을 받는다. 누구나 외로움을 느낀다. 누구나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정을, 그리고 친밀감을 갈구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과 데이트를 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지금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미혼 여성의 수가 기혼 여성의 수보다 훨씬 많아진 상황이다. 우리의 경험을 토대로 한 조언과 격려는 이 수치를 아우르지 못한다. 


어렸을 적의 로맨틱한 연애 관계가 사라진 채 작금의 초토화된 상황(scorched-earth vagina)에 직면할 때 나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외로움이 결코 아니다. 나는 혼자 잘 지낸다. 스스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법을 배웠고, 그렇게 하지 못할 시에도 지구상에는 나에게 재미를 가져다 줄 수많은 오락거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은, 내가 작금의 일상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설명할 표현이 없다는 점이다. 현재의 삶을 설명할 구체적인 단어가 부족하다. 내가 연애를 포기했다고 인정하는 꼴을 사람들은 기어코 보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영원히(ad infinitum) 지속될 "싱글"이라는 낯선 상황을 적절하게 설명할 방법이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물론 이론적으로나마 이런 낯선 상황이 끝날 여지가 있다고 하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나의 인생과 나의 사랑이 지금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제대로 설명하거나 표현 할 기회도 나에게는 별로 없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지옥에 온 것처럼 내 삶은 더욱 고통스러웠는지도 모른다.


이별 이후의 삶을 예로 들어보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싱글로 돌아온 이후 나는 몇 년 간 동시에 여러 사람과 데이트를 하는 지인 몇 명을 알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 몇몇은 사랑에 열정적으로 헌신했지만, 여러 관계에서 오는 다양한 변수 때문에 제대로 숨 쉴 틈을 찾지 못했다. 사랑이 끝날 때마다 찾아오는 상실감은 너무나 고통스럽다. 다행히도, 이 고통을 제대로 표현할 단어가 있기는 하다. 바로 '비통(heartbreak)'이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은 천천히 진행되어서, 이제는 무감각해진  육체적-정서적 친밀감의 소멸을 간단하게 표현 할 방법을 찾지는 못하겠다. 싱글이 되었다고 해서 술에 취한 채 바닥에 고꾸라진다면 참으로 바보 같을 것이다. 또한 이별 때문에 힘들워하는 사람에게 "네 얘기는 그 전부터 계속 들어왔어. 내가 이별을 나중에 할 때까지 이 얘기는 계속 듣게 될 거야."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고 잔인한 행위다. 하지만 괴로움과 분노가 치밀어오를 때 나는 그 구절을 말하고 싶어 했다.


무엇보다도 사랑과 연애관계는 시간의 표식에 가깝다. "영원히"라는 개념은 사랑 앞에 종종 삽입되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론적으로는 싱글인 상태와 마찬가지로 취약하고 빈곤할 뿐이다. 종점을 향해 달리는 열차에 탑승한 나를 가정해서 앞으로의 나날들을 상상해 보자. 내 미래에는 열차에 내려 땅을 디딜 만큼의 커다란 이벤트나, 인간 존재를 확인시켜 줄 연대기나, 아니면 사랑에 빠져 벌어지는 사건 등이 예상되지 않는다. 나의 절친이 결혼을 한 후 다음날 내내 눈물을 흘리는 광경을 목격한 바 있다.  그녀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흘러 넘치는 애정에 고무되어 울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싱글로 지내 온 나는 앞으로의 인생에서 그녀만큼의 비슷하면서도 예의바른 반응이 없을 것이며, 가족과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생을 마감할 때도, 물론 죽음은 그리 재미있는 일은 아니지만, 이런 양상은 쭉 계속되지 않을까 싶다. 헌신이라는 푯말 없이, 그리고 사랑의 결실인 출산을 하지 않을 시 나의 존재론적 가치를 견고하게 뿌리내리는 일에는 많은 노력이 뒤따른다. 나는 종종 그런 노력을 포기하고 싶었다. 오직  부유(浮遊)만 철저하게 허용되는 극단적인, 끝이 안 보이는 회색 공간으로 차츰 사라지면서..


결혼과 이혼은 사랑의 항로에서 가장 강렬한 순간이고, 그럴 때마다 당신이 살아있음을 극명하게 알려준다. 사랑이 끝난 후 바보 같은 행위를 하는 데 있어 카타르시스적인 뭔가가 있기 마련이다. TV를 보면서 아이스크림의 용기까지 빨아먹거나, 감정적인 도움을 받고자 동성 친구들에게 매달린다. 도심 술집에서 술에 취한 채 처음 보는 남성과 키스를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고, 키스가 끝난 후에도 당신은 그저 아이스크림을 탐욕하는 여성으로 돌아간다. 여기에 감정적인 변곡점은 없다. 이건 그저 당신의 인생일 테고, 친구들과 가족들을 혼란스럽게 할 뿐이다. 내가 앞으로 영원히 혼자서 살 거라고 얘기한다면, 주변 사람들은 갑자기 말문이 턱 막히고 말 것이다. 그들은 내 얘기를 멈추고 싶어 한다. 또한 그들은 나의 "문제"에 실마리를 갖다 줄 근저의 맥락을 생각하지 않은 채 조언만을 해준다.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단조로운 조언의 근본적 내용은 상대방을 염원하고 때를 기다리라는 것이다.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려라. 그 이유는, 지금의 삶보다 더욱 나은 순간이 훗날에 보장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랑 역시 보장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왜냐고? 기실, 쿨하고 합리적이고 매력적이며 그렇게 엉뚱한 사람이 아닌 나도 사랑이 미래에 보장되지 않다는 점을 확실히 알기 때문이다. 나는 그날 파티 저녁식사를 하던 도중에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상대방을 만날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그저 아무것도 안 한 채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점을 그대로 수용한다는 일종의 연기를 한 셈이다. 이것은 내가 주도하는 삶, 긍정적인 삶을 축소시켜야 한다는 점을 의미하기도 했다. 나는 영원히 혼자서 살겠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저 진정한 삶이 시작될 때까지 홀로 대기하겠다고 둘러대겠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