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ph Epstein, Nov 16 2012, WSJ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책을 꼭 굳이 첫 번째로 읽을 필요는 없다. (어떤 책을) 처음 읽을 때는, 물론 신중하게 읽기를 해야 하지만, 단번에 그 책의 복잡성, 다시 말해 무궁무진한 문자적 활력이 드러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없다. 대략적으로 3천 페이지 분량의 수백만의 글자가 담긴 소설을 나는 두 번 정도 읽었던 것 같다. 이렇게 했던 이유 중 하나는 나는 (책 읽기 뿐만 아니라) 운동도 하고 밥도 먹고 술도 적당히 마셔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나이 70대로 접어든 지금 매년마다 나는 책을 두 번 정도 충분히 읽을 수 있기를 소망하기도 한다.
잠깐 프랑스어 개념을 빌려 얘기한다면, 벨 에포크(Belle Epoque, 1871~1914년까지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 매우 평화롭고 아름다운 시절)의 배경으로 쓰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몇 세기에 걸친 1인칭 서술자의 모든 기억을 담은 일종의 모음집이다. 작가인 프루스트와 쏙 빼닮은 이 서술자는 어떤 부분에서는 그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달라지기는 하는데, 어떤 것을 분석할 때는 가차 없을 정도로 열정적이다. 특히 이미 지나간 과거를 기억하기 위한 그의 세심한 노력은, 문학이 추구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내포한다. 평범한 사람들은 소설의 서술자가 흘려보내는 여러 과거의 기억들 가운데 몇 개를 아마 여과하거나 간추리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 그 서술자는 어쩌면 마르셀 프루스트 그 자체였을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초고를 쓰고 몇몇 부분을 삭제하거나 빼기 위해 수정을 하는 작업을 거치는데, 1922년 프루스트는 죽음이 다가오기 직전까지 자신의 글에 더 많은 것을 추가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분명히 명작임에는 틀림없다. 대작은 매 50년마다 새로운 번역과 해석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또한 그러한 것은 프루스트의 방대한 저작에 특징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펭귄 출판사는 최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전권(7권)에 대한 재해석 작업에 착수했다고 알려왔다. 하지만, 아아, 그 책 시리즈의 전권은 각각 소유권이 다르고 배경도 비슷하지 않기에 재해석 작업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 시리즈의 재해석은 그렇게 완벽하거나 균등하지는 못하다.
나는 차라리 스캇 몽크리에프(스코틀랜드 작가)가 시리즈를 번역한 것을 테렌스 킬마틴(아일랜드어 번역가)이 재차 재해석한 작업이 더 낫다고 하고 싶다. 몽크리에프의 번역물은 “Remeberance of Things Past”(이 프레이즈는 스캇 몽크리에프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30편 구절에서 따온 것임)이라는 제목 하에 이뤄진 것이다. 번역물은 현재 랜덤 하우스 출판사에 저작 등록이 되어 있는 상태이고 그로 인해 세계 곳곳에 이것이 활자화되어 널리 보관되고 있다. 길이가 거의 큐빗(손가락 끝에서 팔꿈치 밑까지의 거리, 고대 단위)에 가까운 문장들로 인해 작업이 엄청나게 긴다고 하면 그 어떠한 혜택이나 보람을 찾기는 어려울 터.
또한 명작은 세계 유수의 명망 높은 인사들이 자신에 대해 글을 쓰게끔 만든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저작에 대해서는 프랑수아 모리아크, 사무엘 베케트, 장 프랑수아 레벨 등이 소책자를 출간한 바 있다. 소설가뿐만이 아니다. 하워드 모스나 하워드 네메로프 등 유명한 시인이나 비평가 로저 섀턱도 프루스트의 글을 연구했다. 엄청난 분량의 프루스트 자서전을 만든 사람들은 조지 페인터, 안드레 모로이, 윌리엄 C. 카터, 장 입스 타디에였다. 이밖에도 몇몇 작가들은 프루스트와 사진, 프루스트와 미술에 대해 쓰기도 했는데, 이를테면 1922년 5월에 있었던 저녁 만찬에서 프루스트와 제임스 조이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등 모더니즘에 공헌을 한 유망 있는 예술가들이 모인 자리 등 말이다. 영어에 관심이 있었지만 조금밖에 할 줄 몰랐던 프루스트 얘기도 나온다. 프루스트의 어머니에 대핸 통찰력 깊은 전기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데, 그녀는 자신의 아들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프루스트 소설 번역가들. 물론 나 자신도 여기에 들어갈 수 있겠지만, 그들은 자신의 우상의 저작을 훌륭하게 읽기를 원하지 않는다.
[Monsieur Proust’s Library]를 만든 안카 멀스타인은 프로스트의 저작을 분석한 수많은 책들 가운데 자신의 해석본을 또 집어넣는다. 문학예술에 심도 깊은 분석과 이해를 시도하면서 지적 계량화를 완벽히 수행한 멀스타인은 이미 아스톨프 드 퀴스탱의 전기를 멋지게 쓴 바 있다. 아스톨프 드 퀴스탱은 19세기 프랑스 귀족인데,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미국을 위해 민주주의를 전파한 것과 똑같이 그대로 러시아에 전해준 장본인이다. 그녀의 또 다른 저작인 [발자크의 오믈렛, Balzac’s Omelette]은 발자크의 인생과 작품이 멋지게 다뤄져 있다.
[Monsieur Proust’s Library]는 멀스타인이 과거 발자크를 다룬 저작의 변주곡이라 할 수 있겠다. [발자크의 오믈렛]에서 그녀는 “어디서, 무엇을, 그리고 하루 중 언제 밥을 먹는지 나에게 알려주면, 곧 내가 당신이 누구인지를 알려 주겠다.”라고 썼다. 이것을 여기에 똑같이 적용했다. 그러나 연구하고 탐사하면서 더 많이 배워야 할 것이 있었기에, 멀스타인은 [Monsieur Proust’s Library]에서는 한 남성이 무엇을 읽고, 자신이 읽은 것을 언제, 혹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자신에게 어떻게 영향을 줄지를 세심히 표현했다. 발자크를 위한 오믈렛, 그리고 프루스트를 위한 책. 멀스타인은 고품질에 지적으로 무장한 작품들의 훌륭한 연료(식품) 담당자이다.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는 엄청난 독서광이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는 자신이 알고 있는 범위 내에 프랑스 문학의 주요 전통을 요약 및 압축했는데, 픽션(라파예트 부인부터 스탕달, 플로베르, 발자크, 졸라까지)과 문자주의적 철학 사상(몽테뉴부터 파스칼, 프랑수아 드 라류사프코, 샹포르까지)의 진수를 녹아냈다. 프로스트는 이런 작가들을 통해 일반화를 위한 강력한 취향을 만들어냈다. 그의 소설과 잡다한 글에서 뽑아낸 일종의 격언집이 나한테 있는데, 이상하게도 그것은 휘황찬란할 정도로 깊은 심금을 울린다. 한 구절을 보여주겠다. “신의 위대한 기쁨은 창조는 창조주를 깨끗이 제거할 만큼 충분하게 완벽하다고 보는 무신론자의 위치 바로 정반대에 놓여 있다.”
어린 시절 천식을 앓았던 프루스트는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더 많은 책을 읽었다. 멀스타인은 보다 세심하게 연구를 했는데, 15세의 프루스트는 이미 현대문학에 깊은 조예를 나타냈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나톨 프랑스나 피에르 로티에의 소설과 에세이, 말라르메와 르콩트 드 릴의 시,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디킨스, 그리고 조지 엘리엇의 소설들을 탐독했다고 한다. 헨리 제임스가 ‘baggy monsters’라고 비꼰 것과는 다르게 프로스트는 러시아 문학 작가들의 작품에 위대한 경의를 표현했다. 그는 톨스토이의 작품들을 보면서 인간 본성에 대한 연민을 형식화하는데서 나타난 일반성을 높게 평가했다. 멀스타인은 프로스트가 도스토예프스키보다 더 뛰어난 작가가 없었다고 말한 점을 주시하면서, 그는 [백치]라는 작품이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설이라고 평가한 것을 알려준다. 프로스트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자주 구사한 플롯 내에서의 갑작스러운 전환, 다시 말해 그럴듯한 놀라움을 제시하면서 자신의 소설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능력을 자주 칭송했다.
1905년 프루스트가 쓴 에세이 [On Reading]에서 멀스타인은 한 가지 포인트를 찾아낸다. 프루스트는 훌륭한 소설을 쓰기 위해서라도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해방시키기를 원했다는 점이다. 그는 철학자 데카르트(Descartes)의 구절을 인용하는데, “지구상의 모든 좋은 책을 읽는다는 것은 지난 세기에 작가가 된 가장 세련되고 교양이 넘친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과 같다.” 프루스트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독서라 불리는 가장 원초적인 정신심리학적 행위는 가장 숭고한 오락과도 같으며, 책은 즉시 소멸할 것 같은 대화를 오랫동안 꼭 붙잡을 수 있는 최상의 것이다.”
프루스트가 느끼기에 책은 “우정이며, 현재 죽어있는, 부재하는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전해지는 사실과 같다. 객관적인 무엇인가를 전해주거나 감동을 알려줄 수도 있다.” 책은 친구보다 더 낫다고 그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당신이 진실로 책과 함께하기를 원할 때면 책장을 넘길 수 있기 때문이고 한 등장인물이 정말로 진실한지를 그다지 생각하고 싶지 않을 때, 무시하고 싶을 때는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책에서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좋아할 수도 있는데, 실생활에서의 실제 친구들보다 더 많은 이목과 애정을 느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프로스트는 자신의 한 소설에서 “실제 인생, 드디어 마지막에 환한 빛에 발가벗겨진 인생– 실제로 살았다는 결과에 의해 만들어진 인생–은 결국 문학이 되고 말았다.”
안카 멀스타인은 프로스트의 취향과 습관에 대해 매우 포괄적인 개관을 담는다. 그러나 그녀가 이번 저서에서 보여준 내면적 힘은 아마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창작 과정 가운데 프로스트가 자신의 독서 습관을 어떻게 포괄시켰는지를 매우 명료하게 풀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작가가 그동안 동경했던 것을 가득 품은 채로 나온다. 예를 들어서, 인상파 화가 엘스티르는 당시 활동했던 영국 예술 비평가인 존 러스킨(John Ruskin)의 여러 사상을 빌려서 말한다. 이때 프루스트보다 영어를 훨씬 잘한 어머니의 힘을 빌렸다고 한다. 멀스타인은 프로스트의 위대한 창조 인물도 존 러스킨의 사상을 빗댄 것이라고 귀띔한다.
프로스트의 할머니는 세비네 부인 작품(어머니상을 더할 나위 없이 애정 충만하게 표현한 17세기의 여러 서신들)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프루스트의 어머니가 되는 자신의 딸을 애지중지하게 키웠고 양육방식의 롤모델을 바로 세비네 부인으로 삼았다. 소설에서 샤를리에 남작은 집에서 생시몽의 연대기를 순차적으로 기억하면서 루이 16세처럼 매우 평범한 삶을 살고자 노력했다. 여기서 잠깐, 샤를리에 남작은 프루스트가 창조한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인데, 틀림없이 그가 전면에 나서서 얘기를 할 때에 소설은 생명력을 가진다. 또한 샤를리에 남작은 뛰어난 독서가이다. 아나톨 프랑스(Anatole France)와 어딘가 흡사한 작가 베르고트는 작가 프루스트와 완전 똑같이 문학에 대해 여러 시각을 설파한다. 공코트 형제들은 현재 우리가 모파상, 플로베르, 고티에 등 19세기 프랑스 문학 작가들을 여기는 것과 같이 비슷하게 직접적으로, 혹은 완연하게 비평하는 잡지를 소유하고 있다. 장 라신의 희곡작품 [페드라, Phedre]는 한 여성이 자신의 의붓아들에 대한 연모를 나타내는 그리스 고대 신화에서부터 따왔다. 이 작품은 ‘병든 여인’(l'amour-malade)라고 해서 부적절한 사랑, 강한 소유욕, 질투, 실망, 거절 등을 표현하는 어구로 널리 사용되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등장인물만큼 엄청난 독서량을 풍기는 주인공들도 아마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 그들이 읽었던 것, 읽고 나서 보여준 반응이 종종 프루스트 작품 내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의 눈앞에서 어떻게 비치는지 결정짓는 여타 다른 작품도 거의 없을 것이다. 이밖에도 등장인물들은 발자크 문체에 나타나는 실수를 속물근성으로 비판하거나 서술자의 친구인 블로흐가 러스킨을 “매우 따분한 녀석”이라고 한 수 내려보는 것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어느 부분 밝힌다. 특히 게르망트 공작부인(the Duchesse de Guermantes)은 이 소설 내에서 사회적, 예술적으로 중심인물로 꼽히는데, 그녀는 책에 관해 매우 이질적인 의견을 제시하면서 충격을 주는 동시에 타인들을 매우 불편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을 내세우며 문학이라는 것이 사회 통치에 있어 하나의 절대적인 무기가 될 수 있음을 피력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그저 세계 명작 작품이 아니라 고품질의 책을 비평하는 책이라 할 수 있겠다.
안카 멀스타인의 [Monsieur Proust’s Library]에는, 비록 내가 읽고 나서 후에 동의를 못하겠다고 판명한 구절이 하나 있다. 동시대의 도덕성을 공격한 공코트 형제들을 향한 프루스트의 비난이 주 내용인데, “프루스트 문학에서는 도덕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라는 구절이다. 아마도 여기서 멀스타인은 ‘전통적인 도덕성’을 염두에 둔 것이지 않을까. 왜냐하면 이 구절은 “프루스트 문학은 도덕성과 완전하게도 상관이 있다.”라고 고쳐 쓰는 게 진실과 가깝기 때문이다. 그만큼 야수성, 속물근성, 잔임함을 매우 생생하게 표현한 작가도 별로 없다. 그 어떤 위대한 작가들도 결코 도덕성을 일부러 건드리지 않은 채 글을 쓰지는 않았다. 그리고 마르셀 프루스트도 훌륭한 것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을 구축한 몇몇 작가들 중에 하나이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