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uki Murakami, Nov 29 2010, NY Times
20세기와 확연하게 구분될 정도로 21세기의 정신적인 착란을 불러일으킨 사건은 무엇으로 꼽을 수 있을까? 지구적 관점에 보자면, 첫 번째는 냉전의 종식으로 인한 베를린 장벽의 붕괴이다. 두 번째는 2001년 9월 11일 일어난 세계무역센터 테러 사건이 되겠다.
전자는 당시 절망에 허우적거리고 있었던 많은 사람들에게 밝고 건강한 희망을 품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짐에 따라 ‘더 나은 세계'를 원했던 우리는 10년을 갓 넘긴 2001년에 엄청난 희생이 발생한 9/11 세계무역센터 테러사건으로 희망이 완전히 재앙으로 반전되었음을 인식할 수 있었다. 이러한 두 가지의 붕괴 사건은 밀레니엄이라는 새로운 국면에서 각각 전혀 다른 운동(movement)의 결과를 보여줌과 동시에 인류의 정신세계에 큰 변화를 가지고 온 한 쌍의 결합체로써 강한 인상을 심었다.
지난 30여 년 동안, 나는 단편부터 장편까지 다양한 창작 활동을 계속해왔다. 내가 말하는 이야기는 언제나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요소에 그 틀을 두고 있다. 각각의 이야기는 독특하지만 주요 부분은 서로 다른 부분 및 이야기와 소통 및 공유되고 있다. 서로 다른 이야기가 연결되는 지점은 각각의 이야기가 갖는 많은 건설적인 요소들 가운데 매우 중요한 하나의 요소가 될 수 있다. 또한 이야기는 각 세대나 시대의 공기를 흡입하여 받아들임으로써 자유롭게 변화무쌍하다. 문화의 전파 기능을 실현하는 매개체로써 이야기가 변화하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하지 않을까 싶다.
비유법을 사용해보자면, 패션 디자이너처럼 우리들(소설가)은 이야기의 옷을 입힌다. 유의미한 요소에 적절한 언어를 입혀 매일 변화하는 시대의 모습을 반영한다. 소설가의 시각에서 볼 때, 이는 새로운 세기의 문턱에서 시대가 교차될 때마다 발생하는 이전의 그 어떤 변화들보다 우리와 이야기의 영역이 조우할 때 이루어지는 변화의 힘이 더욱 크다. 이러한 변화는 좋은 것인지, 아니면 환영받지 못할 일인지에 대해서는 판단을 보류하고자 한다.
하지만 내가 이러한 것에 대해 확실히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우리는 언제나 원점(처음)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이유는 소설을 쓸 때마다 내 스스로가 어떤 변화를 미리 강력하게 감지한다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이야기는 꾸준하게 새로운 기운을 들이키며, 형태를 변화시킨다. 나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확실히 인지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내 작품을 수용하는 독자들에게도 그러한 변화가 어떤 통로로 하여금 전달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소설가로서 발화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럽과 미국 독자들에게서도 한 번쯤 곱씹어 볼 만한 변화가 일어난 것 같다. 지금까지 내 이야기는 20세기 관점에서 '오리엔탈리즘’, '포스트모더니즘’, '환상적 리얼리즘'으로써 독자들 마음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독자들은 새로운 세기를 받아들이면서 자신들의 가치관에 ’~~ 주의'를 없애버렸다. 그런 가운데도 내 이야기가 만들어가는 세계는 독자들과 더욱 가까워졌고 결국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유럽과 미국을 방문할 때면 이 같은 의식의 변환을 감지하곤 했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독자들이 나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을 반증한다.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시간의 논리적 개념을 깨트리는 구성 및 사건 등을 통해서 현실이 재정렬되어가는 장면을 포함해서 말이다. 다시 말해 독자들은 내 이야기 속의 혼란을 철저히 분석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제 안으로 온전히 나의 이야기를 받아 들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아시아 지역 내 독자들은 내 소설을 일고 받아들이는 데 그 어떠한 문학적 기초가 필요하지 않은 듯 보였다. 이들은 내가 작업을 시작했을 때부터 가까운 것처럼 자연스레 나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 같다. 먼저 받아들이고 나중에 분석을 시도한다. 이와 반대로, 서양 독자들은 어떤 변화를 선택했다. 받아들이기 전에 문장에 관해서 논리적인 분석을 시도한다. 이와 같이 동서양의 차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각각 영역에 큰 영향을 끼치며 자연스레 희석되어 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최근 몇 년 동안 세계 흐름을 감지해서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재편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게다.
중요한 정치 및 경제 체제의 재배치는 냉전이 일단락된 후 시작됐다. IT 영역의 기술 재편성에 대해서도 조금이나마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특히 이 기술은 매우 놀랄 만큼 전 세계적인 규모로 해체했고, 다시 합쳐지는 것을 반복, 또 반복했다.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서 분명 문학만이 홀로 수동적이 되어 변화를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심각한 어려움이나 꼭 풀어야 할 난제는 재편성에 따른 종합적인 진행과정이 무뎌지는 것과 같은 곳에서 발생한다. 만약 일시적인 것이라면, 평가 척도의 표준 축에서 조정이 가능하다. 표준 축은 지금까지 시물의 가치를 측정하는 신뢰할 만한 기본으로서 능력을 발휘했다. 이 축은 책상 머리맡에 앉아서 한 집안의 가장처럼 무엇을 따르고, 따르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해왔다.
그러나 이제야 우리는 그 가정의 가장뿐만 아니라 책상 역시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 같은 현상은 현재 카오스에 의해 삼켜졌고, 우리 주위에서 한 번 일어나 계속 진행, 반복을 하고 있다. 나는 '혼돈'이라는 단어를 들을 시 자동적으로 9/11 사태의 장면들이 떠오른다. TV에서 백만 번은 계속 봤을 법한 무섭고 흉측한 장면들, 이를테면 2대의 점보제트기가 쌍둥이 빌딩을 향해 돌진하고, 빌딩이 흔적도 없이 스스로 무너지는 장면, 이러한 장면은 엄청 많이 봤음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부터 우리가 실재로서 살고 있는 현실을 'Reality A'라고 칭하고, 9/11 사태와 같은 테러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는 세계를 'Reality B'라고 말해 보겠다. 그러니까 'Reality B'의 세계는 'Reality A’ 세계보다 더욱 합리적이고, 더욱 이성적인 세계라는 명제에 여러분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다른 용어로 치환해 표현해 보자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비현실적 세계보다 더욱 낮은 레벨의 현 세계인 것이다. 이 귀납적 표현을 '카오스'가 아니면 무엇이라 바꿔 말할 수 있을까?
분명하게도 이러한 의구심은 소설가들이 과거에 직면한 바 있고, 나름대로 혜안을 찾기 위해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대중의 심리가 새로운 세기의 문턱을 넘어가는 순간, 작가들은 우리 모두를 위해서라도 현실적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이야기의 힘이 기존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도록 여러 곳에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고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다는 것을 작가들은 인지하고 있다. 아마 소설과 이야기의 근본적인 주제는 확실히 이전의 것과는 다른 차원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소설은 19세기와 비교해 명확히 달라졌고, 독자들도 이점을 느낀다.
이야기의 적절한 목표는 무엇일까? 어떤 게 좋은 것이고 나쁜 것인지를, 아니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독자들에게 가이드해주는 역할은 절대로 아니다. 더욱 중요한 점은 우리 내부에 있는 가변적인 요소와 조화를 이루면서 앞으로 나아가는지의 여부다. 또한 개인적 이야기와 공통적인 이야기가 근본적인 요소에서부터 함께 진행되는지를 확인해 나가는 작업일 게다.
새로운 도덕과 규범은 이러한 작업으로부터 매우 자연스레 등장하기 마련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현실의 공기 속에서 숨을 한번 깊게 쉬며 살아가야 한다. 편견과 그 어떤 반대급부를 기대하지 말고, 이야기가 우리 안에서 변화를 이끌어내는 방식을 편안하게 응시해야 한다. 이와 더불어 그러한 변화의 흐름과 호흡을 새로운 단어로 표현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소설은 현재 커다란 테스트를 준비하는 것과 마찬가지며 역사상 유래 없는 엄청난 기회를 체득하고 있다. 물론 소설은 언제나 매 시대를 다루면서 반드시 어떤 종류의 질문과 책임을 부여받기는 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 질문과 책임이 과거와 다르게 더욱 엄청날 정도로 작가들, 우리들 앞에 놓여 있다.
소설은 모든 것을 이야기 속으로 가져올 수 있는 매우 유별난 기능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우리 주변의 사물과 현상에 대해서도 비유 및 은유의 방법으로 틀을 만들고,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자연스러움을 제안하곤 한다.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아닐까 싶다.
나는 최근 작품인 [1Q84]에서 조지 오웰이 그 당시 가까운 미래를 묘사한 것과는 반대로 가까운 과거를 그렸다. 두 소설이 서술하는 1984년은 매우 다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원래 1984년은 절대로 아니다. 그렇다면 변형된 1984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만일 우리가 이 세계에 던져진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어쩌면 우리는 그 상황 속에서도 새로운 현실을 향해 발버둥 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우리가 갈구하는 현실과 실제 현실이 뒤바뀐 지금, 'Reality A'와 'Reality B'와의 차이에서 우리는 얼마나 오랜 기간 동안 주어진 가치를 잘 보존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작품 [1Q84]의 테마 중 하나다. 3년 동안 [1Q84]에 몰입하면서 나는 스스로 시뮬레이션을 하며 가상의 세계를 가로지른 바 있다. 혼돈은 아직도 거기에 있다. 존재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말이다. 그러나 시행착오와 오류를 겪으면서, 나는 결국 이야기의 필수 조건을 얻을 수 있는 매우 강력한 감각을 체화했다. '혼돈은 애초에 거기에 존재하지 않았다'라고 부정할 게 아니라, 오히려 느긋하게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이는 근본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요소를 거부할 게 아니라, '실제 사실'에 접근하는 방법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내가 너무나 긍정적일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독자의 마음과 정신에 불러일으킬 희망을 기대하는 겸손한 조종사이다. 그래서 좋은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고, 그래야 한다. 이미 세상은 다양한 시행착오를 거쳤고, 새로운 형태의 신뢰를 주고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궁극적으로 세계와 이야기는 과거 여러 세기의 문턱을 넘어와 현재에 이르기까지 존립을 위해 많은 이정표를 통과하면서 해결 방안을 제시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