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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st in Translation May 23. 2016

예술이 우리의 사랑을 어떻게 망치는가

알랭 드 보통, 2016년 4월 22일, 파이낸셜 타임스

원문 : How fiction ruined love


사랑에 빠져드는 감정은 개인이 스스로 선택 내린 과정과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가 그간 문학 작품과 TV 드라마에서 사랑에 빠져드는 방법을 따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얘기한다는 것은 어쩌면 매우 기묘할지도, 심지어는 약간 모욕적으로 들릴 수가 있겠다. 하지만, 역사를 통틀어서 보면 사람들은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어 각기 다른 방법을 취했다는 사실은 기실 대중이 지니는 사랑의 기술은 보다 우세한 문화 환경에 의해 크나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까지 논의를 확장시켜 준다. 


어느 특정 시대에서 사람들은 상대방의 사랑스러운 발목(ankle)을 보자마자 곧바로 사랑에 빠져버리곤 했다. 이와 다르게,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왕조를 유지하기 위해서, 혹은 현실적인 문제점 때문에 사랑을 아주 쌀쌀맞게 멀리하곤 했다. 지금 동시대의 문화가 내뿜는 기묘하면서도 다양한 신호를 우리는 거의 따라 하면서 상대방을 사랑하는 법을 깨우치고 있다. 아니면, 인간의 기벽을 영특하게 잘 포착한 프랑수아 라 로슈푸코(Fracois de La Rochefoucauld)가 일찍이 짓궂게 언급했듯이, "사랑에 빠져드는 감정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앞으로 진정한 사랑에 빠져들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정적으로, 지난 몇 세기 동안은 인류의 사랑을 구현해내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바로 예술이었다. 문학, 시, 노래,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대중영화까지, 이런 예술 매체를 통해 우리가 소중히 여겨야 할 감정이 무엇인지, 이와 더불어 어느 지점에서 감성적인 주안점을 강조해야 할지를 공고하게 하는 아이디어를 인류는 습득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술 자체가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가장 높은 단계의 미학적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대중문화 속에서 나타나는 사랑은 심리적 속성에서 끊임없이 잘못 해석되는 경향을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을 파악하는 데 능숙하지 못하다. 특히 우정이 파괴되는 것과 관련된 연구 통계를 보면 더더욱 그렇다. 인류의 이러한 문제점은 최소한, 그리고 부분적으로나마 우리를 둘러싼 동시대 문화의 탓이다. 상대방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한 최우선의 요소는 아마도 문화의 본질을 꿰뚫는 것이다.


더욱 나은 예술을 요구한다고 해서 그것이 감동적이어야 한다거나, 흥미진진해야 한다거나, 혹은 열정적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사랑을 다루는 예술은 이미 그간 수도 없이 나타났거나, 지금도 엄청 많이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혜로움, 사실성, 그리고 성숙함을 대변하는 중요한 요소가 우리에게는 매우 부족한 상황이다. 대중문화에 나타나는 사랑 관련 이야기는 듣는 우리로 하여금 보다 특별하면서도 개성 있는 사랑을 꿈꿀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영국 시인 존 키츠(John Keats)가 발표한 일련의 송시부터 영화인 [비포 선라이즈]나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까지 사랑을 표현한 전통적 예술작품의 서사구조는 우리만의 고유한 사랑이 실상 지독할 정도로 매우 불만족스럽다는 점을 내포하면서, 인간관계는 보통 이런 식이라는 아주 사악한 본보기를 부지불식간에 형성해왔다. 인류는 이러한 사랑 관련 그릇된 이야기에 체계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상대방과 헤어지기도 하고, 아니면 낭만적으로 사랑의 저주를 퍼붓기도 한다.


사랑을 표현하는 이야기가 실제로 인간관계에서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를 심층적으로 분석하면서 아주 관대하게 그려낸 작품이 서양 문학사에 통틀어 하나가 있다. 바로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의 [마담 보바리, Madamme Bovary, 1856]이다. [마담 보바리]의 초반부에는 주인공 엠마 보바리가 수녀원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어린 시절 대부분을 낭만 소설을 읽는 것으로 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결과적으로, 엠마는 매우 탁월한 남성, 자신의 예술적 감수성을 완벽히 포용할 줄 알면서도 끊임없이 지적 탐구의 끈을 놓지 않고, 또 성적으로 흥분감을 자아낼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의 남편이 될 수 있도록 희망하고 기대한다. 


나중에 자신이 꿈꿔왔던 부류에 가깝고, 거기까지 매우 사려 깊은 남성과 엠마는 결혼한다. 찰스가 그녀의 남편이었는데, 엠마는 실패를 직감했다. 그녀는 결혼 초기부터 유부녀의 단조로운 삶에 싫증 냈다. 집안 살림에 그다지 흥미를 가지지 않았던 엠마는 저녁 식사상 차리는 것을 증오했고, 리넨 제품을 세팅하는 것, 그리고 남편과 함께 보내는 밤을 지겨워했다. 첫째 아이를 낳았을 때 엠마의 짜증은 더욱 증폭되었다. 자신의 삶이 완전히 망가졌다고 확신한 엠마였다. 자신의 생각을 확신한 아주 중요한 이유가 하나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탐독한 낭만주의 소설이 제시한 삶과 그녀의 엄연한 현실은 너무나 달랐다.


자신의 삶을 동일시 가능케 한 예술작품을 어설프게 찾으려고 했던 엠마 보바리는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인물로 변하기 시작했다. 돈을 물 쓰듯이 쓰거나 아이를 돌보지 않는 등 그릇된 행동을 보인 그녀는 결국 파산상태에서 불명예스럽게 자살을 함으로써 자신의 굴곡 많은 인생의 종지부를 찍는다. 플로베르는 이 모든 것이 문학작품에서 비롯되었다고 비난했다. 특히 몇몇 종류의 낭만주의 소설은 엠마 보바리의 죽음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다. 매우 안타깝게도, 엠마 보바리 같은 어린 여성들이 결혼의 가혹한 현실을 미리 깨닫기 위해서 플로베르는 소설을 썼다. 엠마는 플로베리의 현실적이면서도 풍자 가득한 조언을 외면한 여성이었다. 


동시대의 예술작품들은 생략에 몰두하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엠마 보바리처럼 착각할 때가 있다. 예를 한번 들어보자. 사랑을 그린 수많은 고전 소설들은 일과 노동과 관련된 모든 사항이 지속적인 관계 형성과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거의 묘사하지 않는다. 물론, 현실에서는 어떤 관계를 수립하든지 간에 부분적으로나마 합리적인 근거가 필요한데, 이것은 당사자들이 다음 세대의 교육을 위해서라도 서로가 안정적인 경제주체로 탈바꿈되도록 유도한다. 진부한 말이 절대로 아니다. 보다 진실한 영웅들을 위한 기회는 여럿 있었다. 특히 세탁(laundry)을 떠올려 보자. 우리는 그간 수많은 예술 작품들 속에서 세탁과 관련된 이야기나 일화를 들어보지 못했다. 


낭만주의 소설을 대표하는 작품이자, 그 어떤 것보다도 독자들에게 사랑 관련해서 수많은 영향을 끼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The Sorrows of Young Werther]은  독일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괴테가 1774년에 완성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20대 중반도 되지 않았다. 이 책이 출간되자마자 독일과 프랑스, 그리고 영국에서는 베스트셀러로 곧바로 등극되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수차례나 읽었다고 한다. 학생인 베르테르가 약혼자가 있는 샤롯데를 그리워하며 자신의 불운한 사랑 이야기를 채워나가는 것이 이 작품의 주된 내용이다. 논조는 강렬하면서도 열정적이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샤롯데를 향한 사랑을 점차 키워나갈수록 베르테르는 변호사라는 자신의 직무를 서서히 멀리하게 된다. 낭만적인 사랑은 노동과 동떨어진 경험이나 마찬가지다.


낭만주의와 자본주의는 현시대를 지배하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다. 그리고 이것들은 우리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노동과 인간관계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이끌어준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기대하는 것은 낭만주의와 자본주의의 적절한 결합일 텐데, 이것은 자칫 극도로 고통스러운 결과를 가져올 수가 있다. 두 요소 간의 결합은 불운하게도 역사적으로는 충돌을 일으켰을 뿐이다. 우리는 현재 낭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엄청나게 강력하면서도 서로 이질적이라 양립 불가능한 두 가지 사회체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여기서 예술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예술 속 낭만주의를 고찰한 철학에서는 친밀감, 솔직함, 오랜 기간 서로가 함께 근심 걱정 없이 지내는 것을 강조한다. 이로 인해서 우리는 자칫 집안일을 등한시하거나, 까다롭게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일상에서의 노동을 평가 절하하거나, 혹은 경쟁이 이뤄지는 환경에서 자신만의 포지셔닝을 불확실하게 만들 수가 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Richard Linklater)의 매력적인 영화 [비포 선라이즈]에서는 두 명의 남녀 주인공이 기차 객실 안에서 우연히 만난다. 서로의 감정을 확인한 그들은 사랑에 빠지고 만다. 야간에 빈(Vienna)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그들은 대화를 주고받는다. 사랑을 그린 수많은 예술 작품들처럼, [비포 선라이즈]도 모든 것을 주제로 긴밀한 대화를 나눠보면 사랑이 꽃 피울 거라는 내용을 암시한다. 하지만 이런 솔직함과 개방적인 자세는 날마다 펼쳐지는 일상적인 생활과는 불협화음을 내기 마련이다.


교묘한 하루(혹은 일주일)를 보낸 사람일수록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나 걱정거리를 무감각하게 느낄 공산이 크다. (떠나간 상대를 생각하며) 침묵을 유지한 채 앉아서 부엌의 전자기기들을 바라보거나, 혹은 자신의 이야기와 비슷한 TV 드라마 전편을 시청한 후 다음날 직장에서 일을 하던 도중 홀로 울음을 터뜨리는 행위 말고는 그 사람이 할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이런 양상을 보일 때 옆에서 지켜보는 것은 그다지 기쁜 일은 아니다. 또한 그는 투덜거리면서 불평을 나타내거나, 시무룩하게 침묵만을 유지하거나, 성급한 행동을 하는 등 주변 사람으로부터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범위 내에서 자신의 감정을 감히 표현하려고 한다. 그날 어떻게 되었냐고 악의 없이 당사자에게 물어보아도, 만약 질문을 반복해서 받는다면 당사자는 결국 폭발하고 만다. 로맨틱한 소설이나 영화에서 나오는 사랑을 꿈꾸는 사람들 가운데서 이런 결과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낭만적인 소설을 집필하는 주요 작가들은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표현할 때 독자들을 중요하지만 현실에서는 현저한 한계를 가지는 몇몇 이슈들에게 집중하도록 유도한다. 러시아 대문호인 알렉산데르 푸쉬킨(Alexander Pushkin)은  [예브게니 오네긴, Eugene Onegin]에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들의 진실한 욕망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남다른 어려움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제인 오스틴(Jane Austen)은 사회적 지위의 차이가 어떤 특정 커플이 서로의 만족감을 느끼는 순간에 결정적인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세심하게 관조했다. 알레산드로 만초니(Alessandro Manzoni)의 [약혼자들]이라는 소설은 19세기 이탈리아인들에게 크나큰 사랑을 받았다. 그는 이 작품에서 정치부패가 사랑을 어떻게 압도하는지를 친히 보여주었다. 이처럼 위대한 작가들은, 각기 다른 방법론을 취했지만, 인간관계의 지속성의 어려움에 대해서 깊은 성찰을 이끌어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중요시 여겨야 하는 개념 가운데 하나는 지금까지도 빠져 있는 실정이다. 그 누구도 우리가 "가사(domestic)"라고 부르는 개념에 포함되는 영역에 대해서는 심도 깊은 성찰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가사"라는 것은 함께 살아가는 우리가 완수해야 할 실용적 능력을 지칭하는데, 하찮은 성격을 띠지만 매우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이를 테면, 주말마다 나를 찾아와 반겨주는 사람은 누가 되어야 하는지를, 잠은 몇 시에 자야 하는지를, 그리고 화장실에 수건을 놓아야 하는지를 따져보는 것이 여기에 해당된다.


낭만주의적 시각에서 이런 실용적 능력은 중요하게, 혹은 심각하게 다뤄지지 않는 편이다. 정절과 배신, 자신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용기, 정치적 억압에 따른 후폭풍 등 인간관계는 주로 극적이면서도 숭고한 이유로 인해 맺어지거나 깨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보게 되는, 날마다 해야 하는 가사 같은 경우에는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 아예 굴욕적으로 무시당하기 십상이다.


무라카미 하루키(Haruki Murakami)의 1987년작인 [상실의 시대, Norwegian Wood]을 보면 우리는 일방적이고 불운한 사랑이 표현된 감정선이 매 장면마다 미묘한 차이를 나타낸다는 점을 알 수가 있다. 이 작품에서 가장 무시되는 부분은, 모든 예술 작품들이 다 그랬지만, 결혼을 하지 않은 채 먼 거리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이제는 손 쓸 수도 없는 사람과 자신의 인생을 함께 공유하는 장면이다. 우리가 주로 "러브 스토리(love story)"라고 부르는 작품들은 두 사람의 사랑이 시작되기 직전에 경험하게 되는 여러 난관이나 방해물을 헤쳐나가는 것에 주로 집중한다. 하지만 진정으로 사랑이 시작되어 관계를 맺고 현실적인 경험을 하려는 찰나에 영화나 소설은 끝을 맺는다.


그렇기 때문에 평범한 사랑 이야기를 만족스럽게 표현한 작품들은 더욱 주목받을 만한 가치를 지닌다. 자신의 일상생활을 기록한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Karl Ove Knausgaard)의 소설이 떠오른다. 아니면, 20세기 중반에 에반 코널(Evan Connell)이 쓴 [브리지 부인]에서는 결혼 생활의 불운한 나날들을 나오기도 한다. 영화 쪽으로 눈을 돌려 보면, 프랑스의 에릭 로메르(Eric Rohmer)나 영국의 조안나 호그(Joanna Hogg)의 작품도 좋고,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2013년작인 [비포 미드나잇]도 꼽을 수 있는데, 불만족스러운 중년의 삶에 접어든 [비포 선라이즈] 커플들이 다시 나온다. 이 작품은 링클레이터의 [비포 선라이즈]를 현실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라고도 할 수가 있겠다. 지금 언급한 소설과 영화는 사랑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하겠지만, 몽상에 가까운 비현실적인 편애에 빠진 사람들에게 적절한 대조군이 충분히 될 수가 있다.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와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은 한 커플의 사랑이 시작되는 단계만을 집중해서 전형적으로 표현한 예술 작품들이다. 하지만 우리 대다수가 경험했듯이, 인생의 고난은 상대방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나는 상대방을 참고 견디는 것이다. 또한 오랜 시간 동안 나 역시 상대방으로부터 이런 관용의 혜택을 받기도 한다. 우리보다 더욱 현명한 문화를 지닌 사람들은 관계의 시작을 현대 예술작품처럼 고귀하게 그리거나 운명론을 내세우지 않는다. 아주 길고 긴 관계의 시작일 뿐이다. 이 관계는 상반된 감정이 서로 공존하는 것이며 나와 상대방, 즉 우리의 지성과 경험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조용하면서도 호기심 가득한 여정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을 그린 예술작품이 빠뜨린 중요한 요소 한 가지가 더 있다. 바로 아이들이다. 영화 [아멜리에, Amelie]를 보면 비록 아이들은 우연히 태어났지만, 상호 간 사랑의 달콤한 상징성을 의미한다. 이 장난꾸러기들을 애정 어린 방식으로 영화는 보여준다. 그들은 좀처럼 울지 않는다. 울더라도 단번에 울음을 그친다. 또한 이 아이들은 똑똑하고 홈스쿨링의 이점을 전면적으로 은혜받은 인물로 표현된다. 하지만 실제 세계에서는, 우리는 사랑을 기초로 하는 관계의 최종 목적을 결혼을 한 후 아이들을 출산해 양육하는 것으로 설정하는 것이 일반사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아이들은 참기 어려운 존재로 되거나 경제적 부담의 산물로 종종 변화하기도 한다. 숭고에서 출발한 사랑은 후에 쳇바퀴 같은 일상으로 도달한다. 거실에는 온갖 장난감들이 흩어져 있고, 탁자 밑에는 아이들이 먹다 버린 치킨 조각들이 남아 있으며, 사춘기가 되면 입을 닫아버리는 아이들이 된다. 모두가 피곤에 허우적거린다. 이것 역시 모든 게 다 사랑이다. 비록 보들레르(Bauderlaire)나 셸리(Shelley)가 말한 사랑하고는 천지차이이겠지만.


사랑을 애잔하고 교묘하게 표현하는 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예술 문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랑은 우리 실생활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간 우리는 잘못된 예술작품이 심어준 기대와 희망으로 우리의 삶을 판단하고 평가했다. 하지만 우리의 관계는 매번 불만족스럽고 상처를 받기 쉽다. 빈번한 이별과 이혼은 이제 너무 흔해서 그다지 놀랍지가 않다. 그들은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되었다. 우리는 관계를 맺으면서 나타나는 모든 현실적인 단계들, 그리고 상처나 문제가 언제나 깃드는 사랑 이야기들을 서로 얘기 나눠봐야 한다. 그리고 이런 논의를 통해서 보다 지적이면서도 도움이 될 만한 인생의 항로를 설정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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