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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녀의 장녀의 장녀

할머니는 나의 할머니이기 전에 엄마의 엄마였다.

by 결아

치매가 진행될수록 자의로 할 수 있는 것은 줄어 하나부터 열까지 타인의 도움으로 생활해야 한다. 가장 사적인 것들 조차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에 '나'와 나를 도와주는 이와의 경계가 사라지며 프라이버시는 흘러간 시절의 사치 밖에 되지 않는다.


가장 사적인 순간들에 할머니의 존엄성을 지키며 그를 보좌하는 사람은 두 딸인 엄마와 이모다. 손녀들에게도 본인 몸집의 두 배인 냉장고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집청소를 하는 강철의 여인이었던 할머니인데, 없는 살림에 육군 생도들과 자녀 셋을 더불어 키우던 엄마를 바라보는 딸들의 마음은 과연 어떨지.


날이 갈수록 아이가 돼 가는 할머니를 보며 나는 너무나 두렵다.

할머니는 나의 할머니이기 전에 엄마의 엄마였기에.


할머니를 보며 엄마가 걱정되는 것은 아마 엄마와 이모가 할머니를 바라보았던 시선이 나와 동생이 엄마를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나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는 늘 이야기한다. 자신이 알던 사람 중 가장 유능하고 가장 유쾌했던 사람이 할머니였다고. 할아버지가 키운 일들의 뒷일은 늘 할머니가 감당했고, 모두를 품고 혼자 앓았던 것을 알기에 그 시절 끝에 이기적으로 살기를 바랐었다고. 그래서 현재가 너무 억울하다고.


엄마는 할머니와 분명히 다른 성품을 갖고 극명히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어쩌면 엄마는 할머니의 삶을 보며 나는 다르게 살리라 다짐하지 않았을까. 내가 엄마를 보며 다짐했듯이. 하지만 그 둘은 서로를 이해 못 하면서도 특유의 유쾌함으로 역정을 이겨내는 강인함을 공유했고 그 힘으로 주변은 물론 서로를 지탱해 왔다. 다른 글자의 삶을 같은 필체로 참아낸 그들의 말년이 비슷하진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내가 지금부터 무슨 준비를 해야 할까? 엄마는 지금의 할머니를 보며 조금씩 깨지는 것 같은데, 나는 그러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지금도 나는 깨지는 엄마를 보며 간신히 내게서 떨어져 나가려 하는 부스러기를 움켜쥐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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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보호자인 이모가 자유시간을 가지러 간 사이 엄마가 할머니를 목욕시키신 뒤 몸에 로션을 바르고 머리를 말려드린다. 그 사이 나는 짐을 정리하고 요깃거리를 준비한다. 뽀송뽀송한 할머니와 엄마가 나온다.


"우리 할머니 안 그래도 고우신데 얼굴이 더 빛나시네--!"


할머니가 소파에 앉고 딸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엄마를 당신 옆에 앉히신다. 바닥에 앉아 소파에 기대어 나는 할머니의 반대쪽 손을 잡는다. 세 여자가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웃다 숨을 내쉰다. 침묵이 흐른다.


대신 들어줄 수는 없지만 각자와 서로의 무게를 그렇게 지탱한다. 끝까지.


IMG_3853.JPG 할매 손, 할배 손, 내 손


23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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