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스무 살부터 그의 스무 살까지
일곱 살 아이가 책 표지의 글자를 검지로 하나씩 짚으며 천천히 입을 떼었다.
“입 속의 검은 잎, 기.형.도.”
드디어 아이가 한글을 읽기 시작했다. 엄마가 활짝 웃자 아이가 물었다.
“얘 알아?”
엄마는 대답 대신 아이를 멀뚱히 보았다. 아이는 채근하듯 다시 물었다.
“기형도, 얘 아냐고?”
안다고 대답했다. 아이는 또 물었다.
“얘도 엄마 알아?”
“몰라.”
아이는 내 대답에 마뜩잖아 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얘랑 놀지 마.”
엄마는 고민했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시인은 놀고 싶다고 해서 같이 놀 수 있는 인물이 아니며 무엇보다도 기형도는 처음이자 마지막 이 시집을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는 말을 굳이 갓 한글을 뗀 아이에게 해 주어야 하는가. 하지만 이런 걱정 따위는 할 필요가 없었다. 아이는 언제나 그러했듯이 질문에 질문을 이어갔으니.
“엄마, 이건 뭐야?”
아이는 ‘詩集’을 가리키며 물었다. 엄마는 시집이라고 했다. 아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
“얘 여자야?”
“아니, 남자.”
그럼 왜 시집이야? 남자는 장가가야지, 기형도 장가
기형도 '장가’라고 쓰인 책 표지를 상상해 보았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이에게 시집의 또 다른 의미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엄마도 나중에 시집을 한 권 내고 싶다고도 했다. 아이가 그 말을 못 알아들은 것 같았지만 엄마는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아이가 한글을 또박또박 읽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던 어느 날이었다고 기억한다.
나는 그런 엄마로 살아갔다, 그때는.
아이가 커서 중학교에 입학했다. 첫 국어 시간에 시 <엄마 걱정>을 배웠다.
“아주 먼 옛날 /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왜 기형도 '장가’가 아니라 기형도 '시집’이냐고 묻던 아이는 ‘기형도 시집’에 수록된 작품을 배웠고, 덧붙여 엄마가 왜 기형도랑 놀 수 없었는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엄마 걱정>은 기형도 시집에서 가장 마지막에 실린 작품이었다.
시집의 맨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 듯 아이의 중학교 시절도 어느 새 다 넘어갔다.
그 때까지도 나는, 시집을 내는 사람이 되지 못했다.
스무 살 때였다. 당시 나는 국문과 새내기 학생이었고 소모임인 시학회에 들어가 선배들에게 무참히 짓밟히는 조잡한 글을 써대고 있었다. 얼굴에 주근깨가 많은 선배는 나의 졸작을 읽고, “시가 참 어렵네”라며 한숨짓듯 말했고, 트렌치 코트의 벨트를 꽉 조인 선배는 “야, 뭔 말인지 모르겠어”라고 소리쳤는데, 이런 말이 오가고 난 뒤면 우리는 어김없이 술을 마시러 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찍, 소리 못했던 소심한 신입생은 글보다 술을 더 빨리 빨아들이고는, “시는요, 원래 어려운 거 아닌가요?”라고 혀 꼬인 채 중얼거리듯 말하며 길바닥에 주저앉아 몹쓸 것들을 게워내며 켁켁, 댔다.
그날, 지하철을 타고 집 대신 신촌으로 갔다. 친구 P로부터 신촌역 근처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망설임 없이 ‘삐삐’에 녹음된 그의 목소리를 따라 한 술집으로 갔다. 그 지하 동굴 같은 곳에 들어가서도 아무도 듣지 않는 내 시 얘기를 목놓아 했고, 나보다 덜 취했던 P는 게슴츠레 한 눈으로 내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었던 것도 같다. 그리고는 나를 신촌의 한 허름한 서점으로 데리고 가 책 한 권을 건네며 말했다.
“시 쓴다면서 기형도도 모르면 되겠냐?”
그가 사 준 한 권의 시집을 안고는 지금은 없어진 12번 좌석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날 이후, 기형도와 함께 ‘시집’살이가 시작되었다. 그렇다. 우리는 아직도 한집에 산다. 엄마는 기형도 시집만 들춰보고 자기와는 안 놀아준다고 투정하던 나의 아이는, 올해 스무 살이 되었다.
아무도 내가 쓴 시를 제대로 읽지 않는다며 불평만 늘어놓다가 얻어 가진 기형도 시집.
내 스무 살 시절부터 아이가 스무 살이 되기까지의 세월 동안 그는 나와 함께 했으며, 가격표 3,000원을 붙인 채 변치 않은 모습으로 나를 보며 말을 건다.
그래, 알고 있다.
나는 아무것도 되지 않았으며, 또 누군가가 되어 있었다, 어느 새.
아이의 말대로 기형도와 놀지 않았으나 내 청춘의 기로에는 기형도 시집이 항상 곁에 있었다. 그의 시를 읽으며 시인을 꿈꿨고, 사랑을 했고, 아파했고, 사람을 ‘건졌다*’. 여전히 ‘질투가 내게 힘**’이 되는지 알 수 없고, 때론 ‘추억을 경멸***’하기도 했지만 나는 이렇게 그와 함께 세월의 묵은 때를 묻혀가고 있었다. 스무 살의 내가 따져 물었던 “시를 쓰면 시인이지 왜 난 시인이 아니라는 거야?”라는 질문에 굳이 답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실 하나쯤 건졌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인지, 지금 이 순간에도 기형도 시집은 내게 나긋이 속삭이고 있을 뿐이고.
다음 표시는 기형도의 시 중에서 인용했습니다.
*<위험한 家系, 1969> 중
**<질투는 나의 힘>
***<추억에 대한 경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