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명희 시, <사과나무, 사과나무, 사과나무>
한 남자가 진흙탕 위를 달린다. 속도를 내다가 넘어졌는데 얼굴부터 먼저 진흙탕에 빠졌다. 사람들이 박장대소한다. 그는 얼굴보다 더 더러운 손으로 연신 제 눈을 비빈다.
과욕이 부른 참사
이 자막이 뜨자 화면 밖에서 그를 보던 이들도 소리 내어 웃는다.
제 아무리 얼굴에 진흙 따위 묻히지 않아도 충분히 웃긴 예능인이라지만
나는 그를 보고 웃을 수 없었다.
내게 그는, 제 살 길을 찾아 갯벌을 가는,
게 같았다.
나도 한 때는
게 같이 살았다.
뒤뚱거리며 다리 열 개를 휘적거리며 걸어도 멀리 가지도 못하는,
남들이 앞을 보며 달려갈 때 휘청거리며 옆으로 가던
나는,
게 같았다.
누군가는 나를 보고는 배를 잡고 웃었다.
그렇게 나의 노력은 누군가에게 조롱거리가 되었다.
진흙범벅이 된 얼굴에 조금은 비뚤어진 눈을 하고 시를 읽었다.
눈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앞이 조금씩 보였다.
내 마음 속에도 “반쯤은 억울하고 반쯤은 그리워”하는 사과나무가 있었나...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살아야 할지, 사과든 배든 감이든 이름없는 과실이든 마음 속의 나무는 열매를 맺게 마련이라고 생각해야 하는지 괜한 생각으로 불금을 맞는다.
밤이 빨갛다.
한명희 시인의 <<꽃뱀>>에 실린 시.
동병상련
쑥 한 줌이 모자라, 마늘 한 쪽이 모자라
인간이 되지 못한 호랑이들에게
꼬리 하나가 모자라
인간이 되지 못한 여우들에게
일 점이 모자라
만점이 되지 못한 불합격자들에게
만 원짜리 하나라 모자라
만점이 되지 못한 불합격들에게
만 원짜리 하나가 모자라
사람 구실이 되지 못한 밥값들에게, 술값들에게
영 점 영 일 초가 모자라
금메달이 되지 못한 올림픽 기록들에게
표 하나가 모자라
당선이 되지 못한 선거들에게
한 조각이 모자라
완성이 되지 못한 퍼즐들에게
두 발자국도 아니고
한 발자국이 모자라
잘리고 만 선착순들에게
딱 한 사람이 모자라
의인이 되지 못한 소돔에게, 고모라에게
정말 한 사람이 모자라
피를 보아야 했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단두대에게도
나는 성공한 사람
나는 탈옥에 성공한 사람
감시의 눈을 피해 파놉티콘을
빠져나온 사람
막아서는 벽들을
온몸으로 뚫은 사람
고공 절벽에서 뛰어내리고도
죽지 않은 사람
넘실대는 파도 속을 헤엄쳐
바다를 건넌 사람
마지막 관문
국경을 넘은 사람
유유히
자세히 뜯어보면
처절히
금을 그은 사람
수직선과 수평선을 딱 부러지게 그린 사람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깃발을 꽂았고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깃발을 꽂을지라도
나는 이 깃발을 꽂고야 만 사람
깃발 앞에 펼쳐진 것이
가시밭에 자갈밭뿐일지라도
나는 어쨌든
되돌아볼 수도 없는 사람
돌아갈 수도 없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