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영미 Feb 07. 2021

[중국] 거상을 꿈꾸는 기업인 양쥐엔

<천국의 계단>을 즐겨 보던 소녀, 거상巨商을 꿈꾸다

밀레니엄이 시작된 해였다. 

대학원을 갓 졸업한 초짜 조 선생은 대학의 한 부설기관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학습자는 대부분 일본인이었고, 교환학생으로 온 유럽 학생도 간간이 있었으며, 중국 학생은 조선족이나 한국인과 결혼한 여성들이 주를 이뤘으며 순수하게 유학을 목적으로 온 학생들도 몇몇 있었다. 그들은 모두 성실히 한국어를 배웠다. 


그로부터 몇 해 후, 나와 교실에 함께 있었던 학생들이 텔레비전에 출연했다.

외국 여성이 출연해 자신들의 한국 살이에 대해 ‘찐’ 경험담을 나누는 <미녀들의 수다>라는 토크쇼가 인기리에 방영되었다. 한국 방송 프로그램에서 한국어로 때로는 유창하게 때로는 능청스럽게 대화하는 중국, 일본, 독일 출신의 학생들을 보며 그들이 내 교실에 앉아있었던 날이 아득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디에서 한국어를 배웠는지 참 잘하네.”

그들을 칭찬하는 내 모습에서 출연진들의 ‘유창한 한국어’라는 밥상에 ‘그들의 한국어 선생’이라는 이유로 숟가락을 얹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내 속으로 손사래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오늘도 나를 기다리지 않는 학생들을 만나러 학교로 가야 했다. 

텔레비전에서는 토크쇼에 출연한 학생들을 만났으나

현실에서는 여전히 한국어가 전혀 늘 것 같지 않은 이들을 가르쳐야 했다.


2000년대 중반이 되자 중국 유학생 수가 급격히 늘었다. 이들 중 몇몇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학생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공부를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당연히 이들은 학습의욕이 없었고, 지각도 잦았으며, 이탈자가 되기도 했다. 나는 사무실에 이들의 출결사항을 정기적으로 보고해야 했고, 때로는 이들에게 연락도 취해야 했는데, 이럴 때면 나는 과연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인지 감시하는 사람인지 헷갈리곤 했다. 


 제일 힘든 수업은 배우려는 의지나 목표 의식이 없는 학생들을 끌고 가는 시간이다. 외국어 연수생 자격으로 입국한 그들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었고, 어떻게든 학교에 꼬박꼬박 나오게 해 출석미달이 안 되게 하고 다음 단계 진급을 해서 대학에 입학하게 이끌어 주어야 했다. 그렇게 힘들게 그들과 수업을 이끌어 가던 시간이 흘러 그녀를 만났다. 


 처음으로 대학원 수업을 맡았을 때였다. 수강생들은 <한국어교육학>을 전공하는 석사생들이었고, 이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중국인이었다. 이들도 나를 반기지 않으면 어쩌나 두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냉정하게 강의계획서를 따르기만 하면 돼, 논문을 읽고 요약하는 방법과 논문작성법을 가르치면 되는 거야, 라는 다짐으로 무장한 채 교실에 들어섰다. 


그들은 모두 환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마치 오래 전부터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자기들이 배워야 할 것들에 대해, 자신들이 글쓰기에 얼마나 부족한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에 대한 궁금증까지도 서슴지 않고 묻기 시작했다. 첫 수업부터 편하고 유쾌한 대화가 이어졌다.


이 수업이 특히 좋았던 이유는 내가 애써 쉬운 말로 풀어쓰지 않아도 학생들과 말이 통했고, 학생들이 아주 적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학생들은 질문할 줄 알았고 의문점을 제기할 줄 알았다. 석사생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지만 그렇지 않은 학생들을 보아온 입장에서는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로 수업에 임하는 그들이 엄청나게 기특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인 학생은 양쥐엔(杨娟)이었다.

 그녀는 한 눈에 봐도 서글서글한 인상에 누구와도 원만하게 지내는 성격으로 보였다. 그녀는 수업 시간에 질문이 많았는데 그 질문은 때로는 날카로웠고 때로는 실없어 보이거나 유머러스했다. 다른 학생들은 그녀의 말에 가끔씩 타박을 주기도 했지만 그녀가 입을 열면 모두 그녀에게 집중했다. 그때는 그저 그녀를 성격이 밝은 학생으로만 생각했다. 그녀의 발언은 사람을 모으고 집중시키는 리더십의 일종이었다는 사실은, 그녀의 창업 스토리를 들은 후에야 알게 되었다.


중국인 양쥐엔은 2년 반 전, 한국에서 창업했다. 

대학원을 졸업한 뒤 그녀는 고향에 돌아가서 한국어교사가 되는 길 대신 한국에서 창업을 결정했다. 한국인과 중국인 직원을 6명 둔 고용주로 <YYK 인터내셔널>이라는 이름의 회사 대표인 그녀는 한국화장품을 중국으로 유통하는 업무를 주로 해오다가 최근에는 자사 화장품 브랜드를 키우고 있다. 사실 그녀가 학자나 교사보다는 기업가로서의 자질을 보인다고 느낀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녀의 화법 때문이었다. 


 나는 그 시절 만난 대학원생들과 수업 후 종종 ‘미녀들의 수다’ 시간을 가졌다. 매사 거리낌없이 말하던 양쥐엔을 비롯한 이 중국 여성들은 최근 한국으로 유학 온 여동생이나 자신들에게 무례한 한국인 이야기나 누구 집에서 사천 요리를 만들어 먹었는데 너무 맵고도 맛있었다는 일상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당시 사천 요리가 뭔지 몰랐던 나는 ‘중국 음식의 매운 맛’을 상상하지 못하겠다는 말을 했던 것도 같았다. 


 일 년 간의 대학원 수업을 마무리하며 나의 대만행을 학생들에게 알렸다. 이들은 내가 중국어를 전혀 못한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걱정을 해 주었고, 서로 내게 중국어를 ‘공짜로’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나는 학생에게 중국어를 배울 생각도, 더욱이 공짜로 그들을 모실 생각이 없어 그들이 내게 중국어를 가르치겠다고 할 때면 웃어넘겼다. 양쥐엔은 이러한 순간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고, 스리슬쩍 내게 중국어를 쓰게끔 했다. 이상하게도 그녀가 시키면 난, 또 했다. 그녀가 내 중국어를 고쳐주면, 난 또 바로잡았다. 그녀에게는 신기한 힘이 있었다. 상대에게 과제를 부여하고, 그것을 수행하게끔 하는 능력 말이다. 그것이 그녀만의 화법이었다.


 내가 대만에 있었을 때 그녀는 가오슝으로 출장을 온 적이 있었다. 빡빡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늦은 시간에 나를 만나러 내가 일하는 학교 앞으로 와 주었다. 거의 2년 만의 만남이었고, 그녀가 막 창업을 시작할 무렵이기도 했다. 그녀는 한국 화장품을 중국과 대만 지역에 판매하는 업무를 했고, 대만 화장품 현지 조사도 진행 중이었다. 그녀는 내 나이와 피부 상태를 진단해 주고 내가 사용해야 할 화장품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나도 몰랐던 한국 화장품 브랜드를 그녀로부터 들었다.


 사실, ‘한국인도 모르는 한국 화장품의 저력’은 대만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알아가게 되었다.

내가 한국에 잠시 들어갈 때면 대만 친구들은 내게 기다렸다는 듯이 상품배송 주문을 이어갔는데, 대부분이 화장품이었으며 그녀들이 주문한 제품은 내가 한 번도 사용해 보지 않았거나 아예 들어본 적도 없는 제품들이었다. 그녀들과 함께 한국 화장품 인터넷 주문을 하거나 가로수길 매장에 가서 구입해 오는 일이 허다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어린 시절 우리집을 종종 오셨던 ‘화장품 방문 판매 여사님’들이 떠올랐다. 그 여사님들은 고객에게 맞는 제품을 소개해주었지만, 나는 고객들이 요구하는 제품을 들고 ‘방문’했다는 점에서 차이는 있었지만…


 내가 친구들의 요구나 요청을 ‘전달’의 차원에서 그쳤다면, 양쥐엔은 고객의 요구를 심도 있게 이해한 후 ‘제품 개발’까지 이어지게 했다. 해외 소비자들이 필요로 하는 제품에 대한 이해를, 양쥐엔은 그 누구보다 잘하고 있었다.




김만기 외 <중국의 젊은 부자들>에 의하면, 중국의 젊은 부자들에게는 6가지 원칙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흙수저 출신”에 “일에 미쳤고”, “유연한 사고를 한다” 등등은 다른 성공한 이들의 규칙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 “글로벌 마인드를 지향한다”는 원칙에 주목하게 되었다. 중국 IT 1세대는 중국 내에서 IT 시장을 구축했다면, 2세대는 해외시장으로 나가는 데 주저함이 없다는 것이다. 양쥐엔 씨도 한국어에 어느 정도 능숙해진 후에는 중국이나 한국 기업에 취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한 선택을 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중국인으로서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기업을 만들려는 것이었다. 그녀는 올해 한국 색조 브랜드 3종을 중국에서 의뢰를 받고 중국으로 유통하고 있다. 현재 목표는 “2025년까지 자체 브랜드 월 매출액 100억 달성”이라고 망설임 없이 말했다. 


어떻게 보면 창업은 그녀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다.

 그녀는 가톨릭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한 뒤 1년 간 여행사에 근무해 사회생활을 경험했다. 하지만 한국어를 좀 더 깊이 있게 배우고 싶다는 욕심에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원 재학 시절, 지인의 소개로 화장품 회사에서 일한 경력이 있다. 그녀는 학생비자가 아닌 취업비자를 받고 대학원을 다니는 상태라 가능한 일이었다.


90년대생인 양쥐엔 씨는 어린 시절부터 한국드라마와 음악을 접하며 자랐다. 가을동화, 온에어, 호텔리어, 슬픈 연가, 천국의 계단 등을 보아 왔다. 한국 드라마를 자주 본 덕에 한국에 친밀감을 느꼈고, 이러한 감정은 자연스럽게 고향 후난성(湖南省)도 지리적으로 한국과 가깝다는 사실도 한몫 했다. 해외 유학을 결정했을 때, 다른 나라가 아닌 한국을 제일 먼저 떠올린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고 했다. 90년대 초반 중국의 개방으로 해외 문화가 자연스레 유입이 되었고, 당시 유소년기를 보냈던 양쥐엔 씨는 사회적 변화 및 분위기와 성장기의 사고 확장을 계기로 한국과 한국문화에 깊이 관심을 갖게 된 것이었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한국에 와서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인과 어울리고,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성인이 되면서부터 유학생과 사회인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통해 자신을 성장시켰다. 


정체성(identity)과 언어학습(Language learning)의 관계를 오랜 기간 연구한 보니 노튼(Bonny Norton)이라는 응용언어학자에 따르면, 정체성이란, 한 사람이 세계와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그 관계가 시공간을 넘어 어떻게 구성되느냐, 미래를 위한 가능성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를 지칭한다고 했다. 즉, 외국어 학습의 관점에서 보자면 정체성이란 언어를 배우면서 세계와 관계를 맺고, 시공간에 따라 관계를 (재)구성하고, 미래를 구상하며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간접적으로나마 한국을 보고 자란 중국 소녀가 한국에 와서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에서 창업해 한국인, 중국인들과 함께 글로벌 기업을 만들어 가고 있다. 양쥐엔 씨의 정체성은 ‘한국 드라마를 즐겨 보는 중국 소녀’에서 또, ‘유학생’에서 ‘창업을 준비하는 외국인’을 거쳐 ‘기업인’으로 변모한 것이다. 

이 모든 변화는 양쥐엔 씨가 한국문화를 접하지 않았다면, 또 한국어를 배우지 않았다면,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모든 단계에서 자신의 비전을 명확히 하며 한 단계씩 올라가며 꿈을 이루고 있으니 그녀의 한국어 학습 과정은 진정 ‘계단’이 되어 준 것이다. 


양쥐엔 씨는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다.


한국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솔직히 한국이 외국이라는 사실을 항상 잊어버려요. 저한테 제2의 고향인 셈이지요.


그런 친구들이 있다. 

국적과 나이를 떠나 오랜 친구나 동료 같은 이들 말이다. 양쥐엔 씨는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그런 사람이다. 그리하여 한국어 학습으로 시작된 그녀의 성취가 진심으로 반갑고 기쁘다.




* 정부 차원에서도 외국인들의 국내 창업을 돕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서울글로벌스타트업센터(Seoul Global Startup Center, SeoulGSC)의 존재에서도 알 수 있다. 이는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2016년 설립되었다. 

Seoul Global Startup Center | 서울글로벌창업센터 (seoulgsc.com)


* 본 글은 양쥐엔 씨가 검토하였으며, 사진은 본인이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 대문사진: 픽사베이

이전 11화 [인도] 세종학당이 낳은 인재, 가야트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