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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미 Oct 23. 2017

[일본]영화 <봄날>이 찾아낸 전문 번역가, 사토루

봄날은 간다, 또 봄날이 온다.


1.

삼겹살을 먹은 후 우리 네 명은 술집에 가서 사강 씨에게 일본어를 가르쳐 주었어요. 이번 여름에 아카네 씨를 봤을 때 일본어로 이야기를 할 수 있기를 위해서 사강 씨도 열심히 메모했어요. 사강 씨는 우리가 기대한 대로 이야기를 잘 할 수 있을까요?

2.

새 학기가 시작되었어요. 새 반(2-B) 교실이 또 211호예요. 같은 교실인데 선생님과 학생들이(마호라 씨를 빼고) 달라서 조금 이상한 기분이에요. 선생님도 방학 때 영화를 봤어요? 지난 주말에는 영화를 보려고 했는데 토요일에 우리 하숙집 친구하고 같이 홍대에 가서 다음 날까지 술을 마셨기 때문에 못 봤어요. 그래서 하순집에서 DVD로 “꽃 피는 봄이 오면”을 봤어요. 감상: 제가 사랑하는 관악(윈드 밴드)를한국 영화 안에서 볼 수 있어서 아주 기뻐요. 이야기는 “선생 김봉두”하고 조금 비슷한데 그 영화에 나오는 어린이 역 배우 (이재응)가 이 영화에도 나왔어요. 최민식도 아주 좋은 배우이다고 다시 생각했어요. OST 안에 있는 곡이 좋아서 저도 트럼펫으로연습하고 있어요. 잘 하게 되면 들어 주세요.


나카야마 사토루(NakayamaSatoru, 中山 悟)


그는 영화광이자 트럼펫 연주자이자 이미 한국어 능력자였다. 2005년 한국외국어대학교 한국어문화연수원에서 근무할 당시 그를 만났다. 1급(초급)이라 모두들 한국어가 서툴렀지만 그는 자기가 한국에 온 이유를 정확하게 말했다.

영화 <봄날은 간다>의 이영애를 보고 빠져 한국행을 결심했다는 것이었다!

그 영화가 그토록 이영애의 미모와 연기력이 돋보인 작품이었을까? 경제학을 전공한 전도유망한 일본 회사원이 사표를 내고 한국에 와서 한국어를 배우게 된 계기가 이영애였다니, 믿기 어려웠다.


사토루 씨는 교사의 입장에서 보면 볼수록 믿기 어려운 학생이었다. 한국어 기초부터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의 학습에는 놀랄 만큼 속도가 붙었기 때문이었다. 위의 일기 중 한 편은 그가 1급을 절반쯤 마쳤을 때이고, 다른 한 편은 1급을 완전히 마친 후에 쓴 글이다(나는 오래 된 학생들의 작문 자료를 아직도 갖고 있다). 심지어 워드 작업도 본인이 직접 했다. 놀라운 실력이었다. 참고로, 국내 한국어교육 기관의 학습 시간은 한 급수당 200시간이다(일일 4시간, 주 5일, 총 10주 수업).


일 년간의 어학 연수를 마치고 그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서울외국어대학원대학교에서 한일통번역을 전공하게 되었다. 한국어 학습 기간이 일 년밖에 되지 않은 상황에서 대학원에 입학했으니 언어도 생활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토루 씨는 특유의 성실함과 끈기로 해냈고, 지금까지 전문통번역사로 활동하고 있다.


사토루 씨는 중국어에도 능통하고, 대만 문화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탐크루즈가 방문해 직접 작은 만두(샤오롱바오)를 빚은 곳으로 유명한 딘타이펑(鼎泰豐)도 그가 내게 처음 소개해 주었고, 강남에 있는 대만식 빙수집도 그가 알려 준 곳이었다. 게다가 대만 생활을 그려 볼 수 있다면서 영화 몇 편을 소개해 주었는데, 그 중에서 <말할 수 없는 비밀>은 단연 최고였다(대만에 와서 그 영화 촬영지를 방문하기도 했다).


사토루 씨와 그의 아내 요코, 강남 딘타이펑에서


사토루 씨가 전방위적으로 외국어와 타문화 수용에 능동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었던 건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했다. 외국어에 관심을 보인 어린 사토루는 급기야 아랍어에도 손을 댔다. 외국어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져 해외에 나가 외국어와 타문화를 익혀야 할 젊은이가 일반 회사 영업사원으로 4년이나 근무했으니 답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던 차에 이영애의 <봄날을 간다>를 보았고, 운명적인 끌림으로 한국에 왔던 것이다. 한국에서 진짜 운명을 만난 그는 멋진 일본 여성과 한국에서 결혼했다. 그의 아내 요코도 한국어와 중국어에 능한 재원이다. 드라마 <운명처럼 널 사랑해>에 잠시 출연한 경험이 있고, <태양의 후예>에서는 총 맞아 죽는 일본인 역할로 출연했다며 자랑을 하기도 했다.


부부는 한국에 살았다. 이문동, 도곡동, 양재동, 사당동을 비롯해 한국에 오랜 기간 거주했는데, 서울에 살 때에는 <오코노미야키>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일본에서 재료를 공수해 와 우리집에서 두 부부가 직접 만들어 주기도 했다. 사토루 씨와 요코 씨를 만나는 일은 언제나 유쾌했다.




고백하자면,

외국인을 오래 만나는 일을 했다고 해서, 외국에 많이 살아봤다고 해서, 외국인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편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더욱 견고해지기도 한다. 마음에 맞지 않은 외국인을 보면, “역시 저 나라 사람이라 그런가 봐.”라고 생각하게 된다. 일본인에 대해 갖는 고정관념도 완전히 깨지 못했다. 자기 속을 전혀 내비치지 않는, 의사소통 시 감지되는 모호한 기류가 일본인에게서 자주 느껴진다. 이상하게도 사토루 씨에게는 그런 기류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처음부터 참, 솔직했다. 자신의 모습이 상대에게 어떻게 비쳐질지에 대해 고민하지도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을 했고, 해야 할 말을 했고, 누구하고나 잘 어울렸다. 사토루 씨라고 해서 일본인으로서 한국에서 고정관념과 맞서야 하는 일이 없었을까? 하지만 그는 불편한 순간을 아무런 분쟁없이 잘 넘겼다. 그의 솔직하고 둥글둥글한 성격과 유창한 한국어 실력, 그리고 한국인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덕분이었다.


사토루 & 요코 부부와 함께, 강남역 근처의 대만식 빙수집에서


2005년에 그를 처음 만났으니 벌서 16년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그는 내가 거쳐 온 기쁜 순간에 함께 해 주었다. 첫 책을 출판했을 때, 대만에 가기로 결정했을 때 그는 곁에서 함께 기뻐해 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의 트럼펫 연주회에 두 번 정도 참석했을 뿐, 그의 결혼식에 급한 일로 참석하지 못했던 일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말라며 오히려 나를 다독였다. 대만에 와서도 그는 종종 내게 근황을 알리곤 했다.


지금 일본에서 일하고 있는데 불편해요. 한국이 더 편하거든요.


그는 현재 일본 기업인 R사에 재직 중으로, 일본에서 한국으로 제품을 판매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을 자주 오가며 일하는 그가 한국을 더 편하게 느끼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러면서 나를 또 위로해 주며 내 이야기에 공감해 주었다.

선생님 블로그를 읽으니 십 여 년 전 제가 한국에서 살던 모습 같아요.

 

그는 열심히 일하며 또 배운다. 그가 보낸 메일이나 메시지에서 어색한 단어나 표현을 단 한 군데도 찾아내지 못 했지만 그는 아직 더 배우겠다고 한다. 사토루 씨의 언어 능력과 겸손, 그리고 모나지 않은 성격이 내심 부러워진다. 봄날을 몰고 오는 듯한 밝고 산뜻한 느낌의 그들과 다시 마주하고 싶다.



*본 글은 사토루 씨 본인이 두 번 확인했습니다. 사진은 사토루 씨가 제공했습니다.

** 영화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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