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기자 관두고 한국어 배우러 왔던 메구미의 뒷 이야기
1.
학생 같지 않은 학생이 있다.
외국인 같지 않은 외국인이 있다.
네가 그렇다.
학생인데, 언니 같고(실제 언니이고), 선생 같다(실제 선생이다).
나는 선생이고 너는 학생이었다. 학생들은 너를 왕언니라고 불렀다.
너의 이름은,
.
.
하가 메구미(芳賀恵)
이천 년대 초반 만해도 국내 대학 부설 한국어교육 기관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은 대부분 일본인 혹은 재일교포들이었다. 중국계 학생들은 조선족이나 결혼이민자를 중심으로 있긴 했으나 다수를 차지하지는 않았다. 지금보다는 학생들의 연령대도 다양했다. 특히 여름 방학이 되면 민단(在日本大韓民國民團,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한반도에 뿌리가 있는 이들 포함)을 위한 단체로 한국어교육도 이루어지고 있다)에서 한국어를 배워온 일본 어르신들이 많았고, 일반 학기 중에도 휴직이나 퇴직을 하고 한국으로 오는 일본 젊은이들이 종종 있었다.
메구미도 그런 젊은이 중의 하나였다. 90년대 한국 영화, <서편제>, <초록물고기>, <8월의 크리스마스>, <미술관 옆 동물원>이 그녀를 한국으로 이끌었다고 했다.
한국어 4급(중급)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가 한국에 온 지 반 년쯤 된 시점이었다. 기본적으로 글쓰기 훈련이 잘 되어 있어 한국어 쓰기도 중급부터 이미 고급 수준이었다. 내가 수정해 주는 부분은 사소한 맞춤법이나 일본어식 어투 정도였다. 그녀는 누구하고도 잘 어울렸고, 쉽게 주눅드는 어린 동급생을 다독일 줄도 알았다.
그녀가 우리 반에 있어서 나는 정말 든든했다.
당시 나는 초짜 선생이라, 알 수 없는 일로 토라져서 입을 닫아버린 학생들이나 자기들 간의 팽팽한 기싸움으로 수업 분위기를 얼어붙게 만드는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잘 몰랐다. 여담이지만, 학생들 간에는 은근히 기싸움이 많다. 외국 학생들도 한국에 오면 한국 사람이 되어 버리는지, “쟤가 나한테 형이라고 안 해서 기분 나쁘다고요.” 혹은 “나보다 어린데 자꾸 반말을 쓰잖아요.”라는 등 그들 간에 서열 문화가 암암리에 자리잡곤 한다. 초짜 조 선생은 그들의 기싸움에 큰 눈을 굴리며 이리저리 눈치를 보기 바빴다.
당시 우리 반에는 한국인과 결혼한 러시아 남성(한 순간도 쉬지 않고 말을 쏟아낼 정도로 한국어가 유창했던 학생이었는데 지금까지도 그의 목소리가 귓전에 울린다), 조선족 연인을 둔 중국 한족 여성, 한국 남성을 좋아하는 중국 여성,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취업 대신 한국행을 택한 일본 여학생, 한국인 어머니와 독일인 아버지를 둔 독일 대학생, 그리고 번듯한 직장을 잘 다니다가 그만 두고 한국에 온 일본 여성들이 있었는데 메구미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우리 반에 일본 여성들이 많았던 관계로 우리 교실은 쉬는 시간에 일본 학생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그들은 우리 반에 모여 들면 모두 “메구미 언니”를 불렀다. 일본인이었지만, 혹은 남자였지만 그래도 그들은 그녀를 한국어로 “메구미 언니”라고 불렀다. 학생들이 기억하는 메구미는 이렇다.
매력이 있다, 왕언니, 요리를 잘한다, 사투리를 쓴다, 똑똑하고 예쁜 아가씨, 항상 기분이 좋다
항상 밝은 얼굴로 학생들의 왕언니가 된 메구미도 화를 낼 때가 있었다. 다음은 메구미가 4급에서 한 첫 발표의 내용이다. 2002년 가을에 쓴 글이다.
“몇 살이에요?” “결혼했어요?” 아니면 ”결혼한 적이 있어요?” 같은 질문 말인데, 어쩐지 남자가 많이 해요. 이런 질문이 하도 많아서 가끔 짜증이 나요. 그리고 한 질문에 대답하기가 무섭게 바로 다음 질문을 하는 사람도 드물지 않아요. 어떤 때는, 제가 결혼하지 않았다고 대답했더니 “왜 결혼 안 했어요?”, “언제 할 계획이에요?”, “부모님이 걱정하지 않아요?” 등 더 자세한 질문을 하더라고요.
삼십 대 미혼 여성이라면 흔히 들었을 질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이는 한국만의 문제나 미혼 여성만의 문제로 보기는 어렵다. 해외 체류 시에는 여성들의 경우, 현지 남성들의 선을 넘는 호기심에 대처해야 하는 법까지도 배워가야 한다. 나 또한 메구미의 입장이 되어 봤다. 대만 택시 기사나 전통시장 상인들에게 나는 한국인입니다, 중국인이 아닙니다, 네, 결혼했습니다, 남편은 대만인이 아닙니다, 애도 있습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등등을 연속적으로 말해야 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너는 남편보다 돈이 좋아서 대만에 온 거냐?”라는 질문을 택시 기사에게서 들은 이후로는 기러기 가족이라는 사실을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학생들이 겪은 일은 곧 내가 겪을 일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그렇게 이방인이 된다. 선생이지만 학생이 되고, 현지인이 이방인이 되고, 누군가에게 물었을 질문을 내가 다시 받기도 한다. 대만에서 개인적인 질문을 받으면서 오래 전 메구미의 발표가 떠올랐다. 학생이지만 선생 같은 메구미는 이렇게 인생의 선배로서 나에게 한 수 가르쳐 주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대만에 있을 때 메구미는 나를 만나러 왔다. 우리는 오래 전 함께 수업을 했던 일, 당시 메구미가 한국에서 들었던 질문을 나 또한 대만에서 듣고 있다고도 했다. 마치 친언니한테 속상한 일을 일러바치듯이…
2.
메구미는 일본에서 방송국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커리어가 점점 쌓일 시기에 모든 것을 접고 한국행을 택했다.
그녀는 한국외대 외국어연수평가원 졸업 후에도 한국에 머물렀다. 우리는 으레 6급(고급, 마지막 과정)까지 마치면 ‘졸업’이라고 하는데, 그 이후 그녀는 한국에 있는 일본계 미디어 기업에 취직을 했고, 거기서 한국 뉴스(경제 분야를 중심으로 정치, 사회 분야까지)를 일본어로 번역해 일본 주재원들이나 한국 기업과 교류가 있는 일본 기업에게 제공하는 일을 했다. 메구미가 미디어 기업에서 업무를 보았을 때가 2004년이었으니 욘사마 열풍이 일본 열도를 강타했을 시기와 맞물려 있었다. 그리하여 메구미에게 드라마 자막 번역 일도 함께 밀려왔다.
한국에 5년간 체류하며 한국어 공부와 업무 경력을 쌓은 메구미는 일본으로 돌아가 프리랜서로 방송국 PD로 일했다. 동시에 미디어커뮤니케이션 전공으로 <한국 영화의 사회성>을 주제로 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메구미는 일본 대학에서 미디어가 아닌 한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영화 <러브레터>의 유명 대사 “오겡끼데스까?”의 배경인 홋카이도에서 메구미는 한국어 선생님이 되었다. 학생들은 대부분 케이팝 팬으로 모두들 열심히 배워 예쁘다고 했다. 학생들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메구미, 그녀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그려 볼 수 있었다.
3.
오래 전 그날을 생각해 본다.
우리들의 왕언니 메구미 씨는 한국 영화에 푹 빠져 방송국 기자라는 안정된 직업을 그만 두고 한국행을 결심했었다. 일본에서 한류가 일기 전이었고, 한국어나 한국인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그다지 좋은 인상을 갖지 않은 일본인들이 적지 않았을 시기였을 것이다.
오늘 퇴사합니다. 한국에 가려고요.
이 말을 들은 그녀의 상사, 나카무라 상은 뭐라고 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한국행은 당시 그녀에게 큰 결심이 아닐 수 없었다.
불과 몇 년 후, 나카무라 상은 메구미의 선구안에 놀랐을 것이다.
메구미가 한국어에 유창해질 무렵, 하늘이 도왔는지 드라마 ‘겨울연가’로 욘사마 앓이에 빠진 일본 언니, 엄마, 할머니들이 한국을 찾게 되었다. 덕분에 일본 미디어 업계로부터 메구미에게 러브콜이 이어졌다. 한국 영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 유창한 한국어, 한국의 “무례한 뭇 남성들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정문정 작가의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참고) 등으로 무장한 메구미 상을 찾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후에도 메구미는 부산 국제 영화제 등의 굵직굵직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한국을 방문했고, 유명 영화감독을 만났다. 영화 <곡성>의 나홍진이 감독이 나와 중학교 동창이라는 사실을, 나는 몇 년 전에야 알게 되었는데, 이미 메구미는 나홍진 감독을 직접 만나 인터뷰했다고 했다. 메구미는 일본에서도 국제영화제 일을 했는데, 한국 영화인들이 찾아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일본을 방문한 한국 영화인 인터뷰 기사도 쓴다고 한다. 최근에 메구미가 부산 국제영화제에 대해 쓴 기사는 다음과 같다.
https://www.nna.jp/news/result/1966405#釜山映画祭
https://www.nna.jp/news/result/1823886#映画祭%E3%80%80韓国
4.
메구미는 매년 동창회에 참석한다.
19년 전, 외대 한국어문화연수원에서 함께 한국어를 공부했던 일본인들이 일 년에 한 번 도쿄에 모여 동창회를 연다. 홋카이도에 사는 메구미는 동창들을 만나러 머나먼 도쿄행도 마다하지 않는다. 재일교포와 일본인, 일본인과 결혼한 중국인이 모두 모여 오래 전 그 수업을 떠올리며 함께 자리한다고 했다. 나도 그 동창회에 참석할 날을 기대해 본다. 의욕만 앞섰던 초짜 선생을 이해해 준, 나보다 어른이었던 그 학생들이 나를 알아보려나?
메구미는 퇴사 후 한국에 와서 초급부터 한국어를 배웠다.
나는 첫 직장에서 메구미를 만났다.
서로 다른 꿈을 막 키우던 시기에 우리는 만났다.
이십 년 가까지 지난 지금,
우리는 또 이렇게 각자의 자리에 서 있다.
그리고 서로에게 여전히 좋은 친구이자 동료로 남아 있다.
오늘, 나의 첫 마음을 되감기 해 보았다.
학생 같지 않은 학생
외국인 같지 않은 외국인
우리 마음 속에 왕언니로 남아 있는 홋카이도의 기자이자 한국어 선생님, 메구미 덕분이다.
* 본 글은 하가메구미님이 두 차례 검토한 내용임을 밝힙니다.